449화. 누가 그러더냐?
짙은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일렁였다.
주위를 둘러싼 수십의 눈동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것은 바로 지옥혈룡의 눈동자였다.
“크크큭. 그리고 너, 능세영.”
조소를 흘리며 지옥혈룡은 말했다.
“기대해도 좋다. 너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몸이 되게 해 줄 테니까.”
과거 젊고 아름다운 능세영이 혈인들을 무참히 베어 넘기는 것을 보며 몇 번이나 이를 갈았던가?
그래서 지옥혈룡은 비릿한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녀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만으로도 지옥혈룡의 전신에 쾌감이 달리고 있었으니까.
“능 어르신.”
운현이 나지막이 물었다.
“저자를 물리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그건 능세영이 말한 ‘혈마인의 권능’을 의식한 물음이었다.
“우선 혈인을 처리해야 하네.”
능세영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혈인은 저자의 수족과도 같아서 혈인들과 저자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네. 내 경우엔 저들을 추적하며 틈을 타 한 놈씩, 한 놈씩 베어 버렸지.”
말하던 능세영이 희미하게 웃었다.
“분노로 미치려 하더군. 수족으로 부릴 만한 혈인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후후후.”
혈마인은 사람을 혈인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한 줌 핏물이 되거나 혹은 짐승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 곧 자멸해 버린다.
게다가 혈인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큰 힘을 소모하는 것이라서, 능세영에게 혈인을 잃은 지옥혈룡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금화영이 불쑥 물었다.
“그럼 혈인만 처리하면 되는 건가? 할망.”
“아니.”
능세영은 고개를 저었다.
“혈인은 혈마인의 능력 중 일부에 불과해. 혈마인의 진정한 권능은 피를 매개로 한 능력에 있지. 저자가 자신의 피로 만들어 낸 혈검은 내 검기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금화영의 안색이 굳었다.
“그럼 저자들의 저 손톱 같은 병기도…….”
“아마도.”
능세영은 지옥혈룡을 바라보았다.
지옥혈룡의 비릿한 조소는 여전했다.
“아무래도 저자의 능력이 더욱 강해진 것 같구나. 아, 그리고.”
능세영이 금화영과 운현, 객옹에게 말했다.
“저자 앞에서 절대로 피를 흘리지 마라. 혈마인은 피를 제어하는 능력이 있다. 아주 작은 상처라도 치명적이야.”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상대의 피라도 말이냐?”
“그래. 다른 사람의 피라도.”
능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구리에 입은 아주 작은 상처만으로도 내 내장을 순식간에 헤집어 버리더군. 내가 저자의 목을 날려 버린 것과 동시에 말이다.”
“그럼 이번에도 목을 날리면 되겠군.”
객옹의 말에 능세영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글쎄? 과연 그럴지…….”
능세영은 주위를 둘러싼 혈인들을 바라보았다.
“과거 저자가 거느리던 혈인은 아홉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은…….”
숫자를 셀 필요도 없었다.
지금 일행을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는 수십 쌍에 달했으니까.
“그러니 그때처럼 목을 벤다고 죽으리란 보장은 없다. 뭐, 잘못하면 우리가 죽을 판이니 어떻게든 하긴 해야겠다만.”
“어떻게든 해야 하는 문제라면.”
객옹이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현이가 전문이다.”
능세영도, 금화영도 운현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운현은 당황하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능세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네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네만…….”
“할 수 있네.”
금화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운 공자라면 반드시 어떻게든 해 줄 걸세. 금 아가씨도 살려 주지 않았나?”
운현을 바라보는 금화영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능세영은 한숨을 쉬었다.
무턱대고 믿는 제자의 모습에 마치 딸을 빼앗긴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그럼 우선.”
저벅.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객옹이 말했다.
“혈인들을 처리해야겠군.”
객옹은 혈인과 지옥혈룡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한 손을 들어올렸다.
슥.
콰드득.
순간 사방의 땅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객옹이 선 방문 앞에서 시작된 그 변화는 마치 누군가 땅을 한 꺼풀 벗겨 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웃!”
지옥혈룡의 안색이 단번에 변했다.
그 순간에도 흙과 돌로 이루어진 벽은 혈인들을 향해 엄청난 기세로 덮쳐들고 있었다.
콰드드드득.
그러나 혈인들은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려야 할 지옥혈룡이 객옹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못 박힌 곳은 바로 객옹의 손바닥이었다.
후웅.
객옹의 손 위에서 자그마한 나비가 떠올랐다.
영롱한 빛을 일렁이는 나비의 모습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웠다.
금화영은 물론 능세영조차 그 나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동시에 두 사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작은 나비가 품고 있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말이다.
“너 같은 자에게는 과분하지만.”
지옥혈룡을 바라보며 객옹이 말했다.
사방이 뒤집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 목소리는 지옥혈룡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것이 나의 천향접이다.”
지옥혈룡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막아라!”
그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파바박.
혈인들은 일제히 객옹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일어서고 있는 흙더미들이 혈인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사락.
엄청난 기세도, 요란한 소리도 없었다.
작고 아름다운 그 나비는 가볍게 객옹의 손바닥에서 날아올랐다.
마치 꿈인 양 아름다운 날개를 일렁이며 천향접이 날았다.
그 부드러운 날갯짓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으득.
지옥혈룡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지체없이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그었다.
촤아악.
옷이 찢기고 가슴이 갈라지며 피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다음 순간, 객옹이 날려 보낸 작은 나비는 지옥혈룡의 지척에 이르러 있었다.
번쩍.
콰아아아앙.
엄청난 빛이 사방을 밝히며 폭음이 터져나왔다.
“웃.”
지켜보던 능세영과 금화영은 고개를 돌리며 옷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흙과 돌들이 사방으로 날고 폭풍 같은 기세가 주위를 휩쓸었다.
퍼벅, 퍽.
문 주위로 무엇인가 날아와 부딪혔다.
잠시 후, 기세가 잦아들고 능세영과 금화영은 고개를 들었다.
폐허가 된 그곳에 작은 언덕 같은 것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새카맣게 타 버린 혈인들이었다.
후드득.
혈인들이 부서지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붉은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크크.”
지옥혈룡이 조소를 흘렸다.
그 찰나의 순간, 지옥혈룡은 혈인들로 하여금 천향접을 막아서게 한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는 컸다.
수십에 이르던 혈인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타 버리고 만 것이다.
“대단하구나. 내 혈인들을 단번에…….”
지옥혈룡이 신음처럼 말했다.
그의 앞에는 피처럼 붉은 휘장 같은 것이 둘러 있었다.
제대로 모양조차 갖춰지지 않은 것이었으나 그 피의 휘장이 아니었다면 지옥혈룡은 멀쩡하지 못했을 것이다.
객옹이 날려 보낸 그 작은 나비는 그렇게나 위협적이었던 것이다.
“대단해야지.”
슥.
손을 내밀며 객옹은 말했다.
“이 정도는 해야 현이와 같이 다닐 수 있으니까.”
후웅.
“헉!”
지옥혈룡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객옹의 손 위에, 또 하나의 작은 나비가 떠오르고 있었다.
희미하게 웃으며 객옹이 말했다.
“한 번 간 길은 다시 가기도 쉬운 법이다.”
사락.
작은 나비는 영롱한 빛을 뿜어내며 날아올랐다.
피할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어디로 향하든 저 작은 나비를 피할 수 없으리란 것을 지옥혈룡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촤악.
지옥혈룡은 즉시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베었다.
상처 위에 새로운 상처가 생겼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저 작은 나비가 닿기 전에 피의 휘장을 둘러쳐야 했다.
촤좌자자작.
흘러나온 피는 즉시 지옥혈룡의 의지를 따라 그를 휘감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작은 나비가 그를 향해 날개를 펴며 내려앉았다.
번쩍.
콰아아아앙.
빛과 폭음이 다시 한번 기련산맥에 울려 퍼졌다.
“윽.”
금화영과 능세영은 다시 옷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번에는 눈만 슬쩍 감았을 뿐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후우욱.
폭풍 같은 기세가 지나갔다.
그러나 객옹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능세영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혈마인을 베고 스스로 환우오천존에 부족하지 않다 여겼거늘…….’
혈마인은 혈교의 수호자이자 최강의 전력이다.
전설적인 존재인 혈마를 제외하면 혈마인은 사실상 혈교의 핵심인 동시에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옥혈룡은 정사대전 당시의 혈교가 모든 역량을 쏟아 완성한 유일한 혈마인이었다.
그 지옥혈룡을 능세영은 베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내심 환우오천존과 비교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서 보는 객옹의 무위는 그녀조차 놀랄 정도였다.
“허어.”
능세영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그사이, 주위를 휩쓸던 폭풍 같은 기세가 가라앉았다.
후드득.
흙과 새카만 파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 사이로 지옥혈룡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처참할 정도였다.
그가 둘렀던 피의 장막은 형체조차 찾을 수 없었고, 앞으로 내밀고 있는 오른손은 아예 팔꿈치까지 박살이 나 있었다.
단정하던 머리카락도 산발이 되었고 옷은 마치 불에 탄 듯 여기저기 시커멓게 변색되었다.
“크크크큭.”
지옥혈룡이 웃었다.
“고작 이것뿐이더냐? 독선.”
능세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지옥혈룡의 패색이 완연한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슥.
지옥혈룡은 자신의 부서진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왼손을 칼날처럼 세우더니 서슴없이 오른쪽 어깨를 베어 버렸다.
서걱.
능세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더 놀랄 일은 그 후에 벌어졌다.
“으으음.”
지옥혈룡이 인상을 썼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푸욱.
지옥혈룡의 어깨에서 피로 범벅이 된 팔이 불쑥 튀어나왔다.
그 섬뜩한 광경에 능세영도, 금화영도, 그리고 운현도 눈살을 일그러뜨렸다.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오직 객옹뿐이었다.
“후후후.”
지옥혈룡은 객옹을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왜? 또 그 나비를 날려 보시지?”
객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지옥혈룡은 노골적인 조소를 흘렸다.
“그렇겠지. 제아무리 독선이라도 그런 절기를 몇 번이나 펼칠 수는 없을 테니까. 허나 나는…….”
슥.
객옹이 손을 들어 올렸다.
“세 번째는 못한다고.”
담담한 표정으로 객옹이 말했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이 유난히 하얗게 두드러졌다.
“……누가 그러더냐?”
지옥혈룡의 안색이 단번에 굳었다.
능세영과 금화영, 그리고 운현도 놀란 얼굴로 객옹을 돌아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팟.
지옥혈룡은 즉시 땅을 박차고 도주했다.
능세영은 깜짝 놀랐다.
“헛!”
설마 혈마인이 도망할 줄은 그녀조차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지옥혈룡의 결정은 지극히 단순하고 합리적이었다.
재생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만의 하나 또다시 천향접에 직격당했다가는 제아무리 지옥혈룡이라도 결코 무사할 수 없었다.
파밧, 팟.
지옥혈룡은 순식간에 기련산맥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허어.”
능세영이 탄식을 흘렸다.
“지옥혈룡이 도주라니…….”
혈마인이 꼬리를 말고 도망가다니, 자신의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옥혈룡이 도주한 것은 사실이었다.
남은 것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뒹굴고 있는 박살 난 오른팔과 부서진 혈인들의 파편뿐이었다.
능세영은 새삼 놀라운 표정으로 객옹에게 말했다.
“안타깝게 되었군. 혈마인을 처리할 기회였는데.”
“안타까울 것 없다.”
슥.
독선이 손을 내리며 말했다.
“세 번은 아직 무리니까.”
“뭐라고?”
능세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객옹이라도 그런 가공할 절기를 연달아 세 번이나 펼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그럼 거짓말이었던 말인가?”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
조금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객옹은 말했다.
“누가 그러더냐고 물었을 뿐이지.”
“아니, 하지만…….”
“들어가자.”
객옹이 능세영의 말을 끊었다.
“환자에게 밤바람은 좋지 않으니.”
놀라는 능세영을 뒤로하고 객옹은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객옹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능세영이나 금화영이 객옹의 무위에 놀란 것과 달리, 운현은 객옹이 정말로 무리를 할까 봐 염려했었던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운현은 정중하게 말했다.
“수고한 것 없다.”
객옹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어차피 네가 어떻게든 했을 테니까.”
운현은 빙긋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어조였지만 객옹의 입가에 머무는 미소를 똑똑히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득의의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