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화. 혈마인의 습격
기련산맥에 어둠이 내렸다.
아직 달이 뜨지 않은 시간이라 주위는 더욱 어두컴컴했다.
그 어두움 사이로 섬뜩한 기운이 진창처럼 넘실대며 흘러오고 있었다.
비록 그 불길함을 감지한 사람은 운현뿐이었지만 무엇인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운현만이 아니었다.
덜컹.
대응은 빨랐다.
운현과 객옹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서고, 금화영 역시 튕기듯 일어나며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탁.
그녀는 벽에 걸려 있던 검을 스승인 능세영에게 건넸다.
능세영은 금화영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자신의 검을 받아 들었다.
창밖을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설마…….”
슥.
능세영은 재빨리 방문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달칵.
문이 열리고 서늘한 기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보다 더 뚜렷한 것은 바로 피부를 찌르는 살기였다.
능세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이것들이 지금…….”
“크르르.”
그녀에게 대답하듯 어둠 속에서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흘렀다.
마치 산짐승 같은 울음과 함께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륵, 스륵.
대문과 담장 위에도, 나무 사이에서도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수십의 새빨간 눈동자들이 사방에서 날카로운 안광을 뿌리고 있었다.
저벅.
“이것들은 뭐냐?”
객옹이 능세영 옆에 서며 말했다.
짙은 어둠 속이라도 객옹의 눈은 이 붉은 눈동자들의 정체를 똑똑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건 짐승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결코 온전한 사람은 아니었다.
객옹이 ‘이것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들의 눈동자는 이지를 상실하고 오직 살기로만 붉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자들은 혈인이다.”
능세영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혈마인이 수족처럼 부리는 자들이지.”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능세영의 말은 곧 혈교가 움직였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할망, 그럼…….”
금화영이 무엇이라 말하려던 때였다.
“크크크크.”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흘러나왔다.
철판을 긁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웃음소리에 금화영이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탁.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한 머리와 잘생긴 얼굴, 그리고 멋지게 차려입은 붉은빛의 무복.
“천일검 능세영.”
마치 대도시 번화가에서 마주칠 법한 그 젊은 사내는 새빨간 눈동자를 번들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그걸로 끝이 아니라고.”
“……지옥혈룡!”
능세영이 탄식처럼 내뱉었다.
“그래. 나다.”
젊은 사내는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네가 베었던 지옥혈룡이 다시 널 찾아왔다. 약속한 대로 말이다.”
“지옥혈룡?”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능세영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혈마인일세. 이지를 상실한 혈인들과 달리 냉혹하고 교활한 데다 강하기까지 하지. 내가 그때 분명히 참했거늘…….”
“흠.”
객옹은 앞에 서 있는 지옥혈룡을 바라보았다.
그저 젊고 오만한 사내로 보이는 그가 혈마인이라니?
그러나 지옥혈룡을 바라보는 능세영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큭큭, 세월이 참으로 잔인하군. 천일검 능세영이 이 모양 이 꼴이라니.”
지옥혈룡이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는 노골적인 눈빛으로 능세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토록 아름답고 생기 넘치던 능세영이 이제는 늙고 병들어 머리마저 허옇게 세지 않았나? 천하를 위해 목숨을 걸고 나를 벤 결과가 고작 이 모습이란 말이냐?”
능세영은 이를 악물었다.
“너…….”
“이 모습이 어때서?”
그 목소리는 객옹이었다.
객옹은 고개를 들고 지옥혈룡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머리가 센 것이 뭐가 어떻단 말이냐? 세월이 은빛 관을 씌운 것은 이 여인의 삶이 고결하고 그 뜻이 귀하기 때문이다.”
그 말에 능세영은 깜짝 놀랐다.
앞에 혈마인이 있는 것조차 잊고 객옹을 돌아볼 정도였다.
그러나 객옹은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너 같은 것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이지.”
뒤에 있던 금화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운현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객옹이 이처럼 누군가를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놀란 사람은 능세영이었다.
객옹을 바라보던 그녀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고맙긴 하네만 당사자 앞에서 그런 말은 좀…….”
“고마울 것 없다.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객옹은 여전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사실이니까.”
그 말에 그만 능세영의 뺨에 홍조가 어렸다.
순간 대답할 말조차 잊을 정도였다.
“크크크.”
섬뜩한 웃음소리가 두 사람의 대화를 끊었다.
“과연 독선의 혀는 날카롭군. 사람들이 자네를 ‘삶과 죽음의 주관자’라 부른다지?”
지옥혈룡의 눈동자는 완연한 호기심으로 번들거렸다.
정사대전에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던 혈교는 독선에 대해서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 과거의 기억이 지옥혈룡에게는 마치 어제처럼 생생했다.
“오래된 옛 원한을 갚으러 왔더니 이곳에서 널 만나게 될 줄이야. 허나 잘된 일이지.”
객옹을 노려보며 지옥혈룡은 말했다.
“오늘 그 같잖은 허명을 부숴 주마. 천일검의 목숨과 함께 말이다.”
슥.
지옥혈룡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혈인들의 눈빛이 단번에 변했다.
“크르르르.”
혈인들은 이를 내보이며 적의를 표했다.
그들의 치아는 짐승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가라.”
파바밧.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혈인들이 몸을 날렸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혈인들이 일시에 덤벼든 것이다.
슈슈슉.
혈인들의 손에는 철로 된 날카롭고 긴 손톱 모양의 병기인 철조가 번득이고 있었다.
수십 개의 철조가 객옹과 능세영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러나 운현 일행도 그대로 있지 않았다.
“타하!”
한 줄기 낭랑한 외침과 함께 초록빛 검기가 어둠을 갈랐다.
어느새 앞으로 나선 금화영이 혈인들을 향해 검을 휘두른 것이다.
쉬익.
그녀의 검이 초록빛 검기를 흩뿌렸다.
그러나 결과는 놀라웠다.
카가가강.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의 철조가 금화영의 검기를 버텨 낸 것이다.
그래도 검에 담긴 내력으로 인한 충격은 어쩔 수 없는지 혈인들이 멈칫했지만, 그 뒤로 다른 혈인들이 빗발치듯 몰려들고 있었다.
“화영아!”
능세영이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서려 했다.
하지만 객옹의 손이 그녀를 막았다.
슥.
능세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돌아보자 객옹이 말했다.
“환자는 물러서 있어라. 여긴…….”
“자네에게 내 목숨을 맡기겠다고 했으나.”
단호한 목소리로 능세영이 말했다.
“내 책임마저 떠넘길 생각은 없네. 내 제자는 내가 구해.”
저벅.
능세영은 검을 뽑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객옹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리는 것을 운현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우웅.
나지막한 울음과 함께 그녀의 검이 초록빛 기운을 머금기 시작했다.
하지만 운현도, 그리고 객옹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검기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아!”
쉬익.
능세영의 검은 거침없이 혈인들을 베어 갔다.
카강.
그러나 그녀의 검기 역시 혈인들의 철조에 막혔다.
하지만 능세영이 가세한 덕에 금화영을 노리던 혈인들의 공세는 분산되었다.
후웅, 카가강, 카강.
초록빛의 두 검기가 현란하게 어우러지며 어둠 속을 가로질렀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두 여인의 검은 수십에 이르는 혈인들의 파상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 내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혈인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지옥혈룡의 비릿한 조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슥.
지옥혈룡이 손을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한 혈인이 금화영을 향해 짓쳐 들었다.
“키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혈인을 향해 금화영은 주저 없이 검을 내질렀다.
막을 생각조차 없는 듯, 혈인은 금화영의 초록빛 검기에 그대로 목을 내어 주었다.
서걱.
혈인의 목이 잘렸다.
그러나 놀랍게도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능세영은 다급하게 외쳤다.
“조심해! 저들은…….”
그러나 금화영은 스승의 경고를 들을 수 없었다.
목이 잘린 혈인이 여전히 금화영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충격적인 모습과 돌발적인 상황에 그만 금화영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목이 없는 혈인이 막 금화영을 덮치려던 때였다.
퍼퍼벅.
북을 치는 듯 둔탁한 소리와 함께 혈인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 틈을 옆에 있던 능세영이 놓치지 않았다.
“타하!”
능세영은 즉시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검에서 짙은 검기가 뻗어 나왔다.
서걱.
혈인의 허리가 둘로 잘렸다.
능세영은 몸을 빙글 돌리며 혈인의 상체를 걷어찼다.
퍼억.
잘려진 혈인의 상체는 지옥혈룡을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지옥혈룡은 슬쩍 고개를 비틀 뿐이었다.
휘익.
혈인의 상체가 지옥혈룡의 머리를 스쳐 지나고, 그사이 정신을 차린 금화영이 남은 혈인의 하체를 발로 걷어찼다.
“에잇!”
퍽.
둘로 잘린 혈인의 잔해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기괴하기까지 한 장면이었지만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맙네.”
능세영이 객옹을 돌아보며 말했다.
객옹은 들고 있던 한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가 날린 기세가 조금 전 금화영을 향해 덤벼들던 목 없는 혈인을 물러서게 한 것이다.
“어르신. 저도…….”
운현이 미명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기다려라.”
객옹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시선은 지옥혈룡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서 혈인 하나가 잘려나갔는데도 지옥혈룡의 조소는 여전했다.
“본래 비장의 한 수는 나중에 내미는 법이니까.”
지옥혈룡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는 객옹의 눈빛은 더없이 서늘했다.
“흥.”
지옥혈룡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다시 가볍게 손을 움직였다.
“크아아아!”
혈인들 넷이 입을 벌리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즉시 허공으로 도약했다.
휙, 휘릭.
어두운 밤하늘에 떠오른 혈인들은 각기 다른 방향에서 능세영과 금화영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웃!’
고개를 든 능세영은 혈인들의 붉은 눈동자가 새빨갛게 빛을 내는 것을 보았다.
“피해라!”
능세영은 즉시 금화영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앗! 할망! 갑자기 왜…….”
금화영의 말을 무시하고 능세영은 집 안으로 몸을 날렸다.
탓.
“문을 닫아!”
능세영이 방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객옹이 슬쩍 뒤로 물러서며 문을 닫았다.
떨어져 내리던 혈인들의 몸이 크게 부푼 것은 동시였다.
퍼버벙.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혈인들이 폭발했다.
그들의 체액과 살점이 사방으로 터져 나가고, 문 위에도 혈인들의 체액이 흩뿌려졌다.
치이익.
혈인들의 시커먼 체액이 매캐한 연기를 내며 문을 태웠다.
목이 잘려도 피 한 방울 나지 않던 것과는 명백히 다른 모습이었다.
“맙소사.”
반쯤 주저앉은 금화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건 대체 무슨…….”
슥.
능세영이 금화영을 안은 팔을 풀며 일어났다.
“혈독이다. 혈마인의 권능 중 하나지.”
덜컹.
객옹은 다시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여전히 수십의 혈인들이 붉은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 너머로 지옥혈룡의 비릿한 조소가 보였다.
“왜 그러지? 독선은 삶과 죽음의 주관자라 하지 않았나? 크크크.”
섬뜩한 웃음을 흘리며 지옥혈룡은 말했다.
“오늘, 죽음의 진정한 주관자가 누구인지 알게 해 주마.”
지옥혈룡의 눈이 어둠 속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