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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47화 (447/530)
  • 447화. 불길한 기운

    과거 정사대전 당시 혈교와 마교가 움직이려 했었다는 능세영의 말은 모두에게, 특히 객옹에겐 더없는 충격이었다.

    환우오천존인 자신도 모르던 일이 정사대전 당시에 벌어지고 있었다니 말이다.

    침묵하던 객옹이 노부인 능세영에게 말했다.

    “그런데 왜 혈교나 마교가 정사대전에 개입하지 않았지? 그리고 너는 어떻게 이 같은 일들을 알았느냐?”

    그 의문은 당연했다.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인 객옹조차 모르던 일을 어떻게 능세영이 알 수 있었을까?

    “일은이 나를 찾아왔네.”

    능세영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이곳에 은거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네. 생전 처음 보는 그가 갑자기 찾아오더니…….”

    말하던 능세영이 피식 웃었다.

    “너무 꼭꼭 숨어 있어서 찾기가 힘들었다고 불평을 하더군.”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너를 알고 있었단 말이냐?”

    “아니. 그가 알고 있던 건 내가 아니라 우리 사문이었다.”

    능세영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는 내게 이 모든 일을 전해 주며 도움을 청하더군. 혈교와 마교가 움직이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말이네.”

    운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그럼 두 분 어르신께서 혈교와 마교를…….”

    능세영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내가 혈교를, 그가 마교를 감당하기로 했지. 나는 그가 전해 준 내용에 따라 혈교를 추적하기 시작했네. 천일검이라는 명호도 그때 스스로 정한 것이고.”

    조금 쑥스러운지 능세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침내 청해호 인근의 한 사원에서 혈마인과 그 수하들을 척살하는 데 성공했네.”

    청해호는 이곳 기련산맥 너머 서남쪽에 있는 거대한 호수다.

    “혈마인요?”

    “혈교의 비전대법으로 만들어지는 괴인일세. 여하튼 혈마인을 척살함으로써 혈교의 기세를 꺾을 수 있었네. 그리고 무림맹이 설립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지.”

    능세영은 두 손으로 찻잔을 쥐었다.

    “그래서 알았네. 일은이 마교를 막아 내는 데 성공했음을, 그리고 신승과 함께 마침내 정사대전을 끝냈다는 것도.”

    운현은 내심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일은은 신승이 무림맹을 세우고 정사대전을 끝내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 된다.

    게다가 무림이 정사대전에 휘말려 있는 동안 마교를 막아 낸 장본인이고 말이다.

    “으음.”

    객옹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일은이 신비한 인물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정사대전 당시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화산지약 당시에 일은이 어째서 신승에게 협력했는지도 이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금가장의 장주에게 은혜를 입은 것도 그때였지.”

    말하던 능세영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금화영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잘 있더냐?”

    “잘 있지 못했다네.”

    “뭐?”

    눈살을 찌푸리는 능세영에게 금화영이 금가장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말해 주었다.

    금가장이 쌍검문과 호암상단에 핍박을 받았다는 말에 능세영의 눈매가 대번에 매서워졌지만, 금화영이 두 마두를 박살 내고 이후에 운현이 호암상단을 정리한 이야기를 하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허어, 자네 정말로 맹주였군.”

    능세영의 감탄에 운현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면 금가장의 어려움을 아시고 금 소저를 보내신 것은 아니었군요.”

    “여기 있는 내가 어찌 그들의 어려움을 알았겠나? 옛 은혜를 갚을 겸 처음 세상에 나가는 미숙한 제자의 신변을 부탁하려 한 것이지.”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금화영은 산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운현에게 말했었다.

    “헌데 금 소저라니?”

    능세영의 물음에 금화영이 자랑스레 말했다.

    “아, 운 공자의 뜻을 따라 내가 금가장의 양녀가 되기로 했다네. 난 이제 금화영일세.”

    순간 능세영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운현은 내심 아차 싶었다.

    스승인 능세영이 물려준 성을 버린 셈이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몰랐다.

    하지만 금화영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장주께서 할망도 모셔 와서 함께 지내자고 하던데, 아예 같이 내려가는 게 어떤가?”

    “……그게 정말이냐?”

    능세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금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이고말고. 예쁜 여동생도 생겼다네. 금혜린이라고, 내가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여성스러운 아가씨인데…….”

    턱.

    능세영의 손이 금화영의 등에 얹혔다.

    “아주 잘했다.”

    환한 표정으로 능세영은 말했다.

    “금가장이 호남성에서 유명한 데다 상단의 후원까지 받게 되었다고 했지? 내려가자마자 그런 가문의 양녀가 되다니, 네가 아주 복덩이로구나.”

    “내 할망이 좋아할 줄 알았네.”

    금화영도 싱글벙글 웃음을 머금었다.

    은거기인이라 그런지 몰라도 능세영은 제자가 금가장의 양녀가 된 것에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저기…….”

    어색한 표정으로 말한 사람은 운현이었다.

    “그렇게 하셔도 괜찮습니까? 어르신께서는 세속을 피해 은거하신 것이…….”

    “이곳도 계속 있다 보니 좀 지겨워져서 말이네.”

    빙긋 웃으며 능세영이 말했다.

    “게다가 꼭 심산유곡에 있어야만 세상을 피해 숨는 것은 아니지 않겠나?”

    그 말에 운현도 그리고 객옹도 흠칫했다.

    능세영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혈마인을 참한 이후, 일은이 다시 한번 나를 찾아왔었네. 그리고 내게 말하더군. 장차 나를 경악케 할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설마 이렇게 젊으리라곤 생각 못 했네만.”

    살짝 웃던 능세영이 말을 이었다.

    “그가 자네를 기다리고 있네. 비록 일은의 정체나 행적을 아는 이는 천하에 아무도 없으나 그는 내게 이런 말을 남겼지. 세상은 그를 일은이라 부르나 자신은 대은은 커녕…….”

    “소은도 되지 못했다는 것 말인가?”

    객옹의 목소리가 능세영의 말을 끊었다.

    능세영은 놀란 표정으로 객옹에게 되물었다.

    “자네가 어찌 그걸…….”

    “일은은 이미 만났다.”

    객옹이 툭 던지듯 말했다.

    “그리고 현이가 이겼지.”

    “아, 그건…….”

    이긴 건 아니라고 말하려던 운현은 멈칫했다.

    객옹이 운현을 향해 슬쩍 눈을 찌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란 능세영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자네가 일은을 이겼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능세영이 운현에게 말했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많이 배웠습니다.”

    “허어.”

    겸양의 표현이 아니라 진심이었지만 능세영은 놀란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일은을 이기다니……. 하긴 그러니 화영이가 자넬 여기까지 데려왔겠지.”

    고개를 끄덕이던 능세영이 운현에게 말했다.

    “잘되었군. 이로써 일은과 한 약조를 지킨 셈이 되었으니 이제 아무런 여한이 없네.”

    능세영은 금화영을 바라보았다.

    “화영아.”

    제자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금가장에는 너 혼자 가거라. 나는 가지 않겠다.”

    “뭐라고?”

    금화영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니, 왜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바뀌었다. 생각해 보니 이 나이에 새로운 곳으로 가는 것도 귀찮은 데다, 한 사람쯤은 사문의 마지막을 지키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말이야.”

    “할망! 갑자기 왜…….”

    사락.

    능세영이 두 손으로 금화영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괜찮다. 너는 세상으로 나가서 마음껏 꿈을 펼쳐라. 금가장도 일으키고, 좋은 남자 만나서 가정도 이루거라. 이 깊은 산속에서 괴팍한 늙은이를 보살피며 고생했으니 이제는 행복할 때도 되었지 않느냐?”

    “그, 그런 말 말게. 나는…….”

    금화영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능세영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였다.

    “내상 때문이냐?”

    문득 객옹이 말했다.

    능세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객옹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런 제자를 키워 낸 사람치고는 네 기운이 유난히 불규칙하더군. 그 증세가 오랜 것을 보면 아마도 혈마인을 상대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던 게지.”

    금화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상이라니? 우리 할망은 워낙 튼튼해서 한 번도 아픈 적이…….”

    “쯧.”

    객옹이 혀를 찼다.

    “세상에 어느 스승이 제자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겠느냐?”

    금화영이 멈칫했다.

    “어르신 말씀이 맞습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지금 능 어르신의 건강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처음에 같이 가겠다고 하신 것은 아마도 저희가 일은을 찾도록 도우려 하심이었겠지요.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옛 약조를 지키기 위해 말입니다.”

    금화영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능세영을 돌아보았다.

    “허허.”

    능세영이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은 금화영의 마음을 단숨에 나락으로 떨어지게 했다.

    “하, 할망!”

    “자네들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

    “할망!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내상이라니! 그런…….”

    “조용.”

    능세영의 단호한 목소리는 격앙된 표정으로 소리치던 금화영을 단번에 침묵하게 만들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능세영은 객옹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내 체면을 구겨 버렸군. 제자에게는 끝까지 강한 스승으로 남아 있고 싶었는데.”

    “네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객옹은 담담하게 답했다.

    “너는 네 제자의 고집을 꺾지 못할 테니까.”

    객옹의 말은 옳았다.

    이번 일이 아니더라도 금화영은 조만간 능세영을 찾아왔을 것이다.

    금가장에서 함께 살자고 말이다.

    그런 금화영의 마음을, 그녀를 지극히 아끼는 능세영이 어찌 끝까지 외면할 수 있을까?

    “후우. 허나 내 몸은…….”

    “너는 죽지 않는다.”

    능세영을 똑바로 쳐다보며 객옹이 말했다.

    “내가 널 살릴 테니 말이다.”

    그 말에 모든 시선이 일제히 객옹을 향했다.

    오직 한 사람, 희미하게 웃고 있는 운현을 제외하고서.

    “……그, 그게 무슨…….”

    “객옹 어르신!”

    쿵.

    금화영이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할망을 살려 주게! 그러면 내가, 내가…….”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던 금화영이 울상을 지었다.

    자신이 객옹에게 해 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운 공자!”

    도와 달라는 듯 금화영이 운현을 돌아보았다.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괜찮습니다. 금 소저. 어르신께서 이미 살리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객옹을 돌아보며 운현은 말했다.

    “어르신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됩니다. 이분은 바로 객옹이시니까요.”

    빛나는 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객옹은 쓴웃음을 지었다.

    운현 역시 능세영의 치료를 위해 나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떨리는 목소리로 능세영이 말했다.

    “어째서 나를 구해 주려는 것인가? 나는…….”

    “네가 세상을 위해 한 일은 마땅히 보답받을 만하다.”

    객옹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 정도는 해야 나도 나중에 불영을 만나서 할 말이 있지 않겠느냐?”

    그 말에 가슴이 뭉클해진 사람은 능세영만이 아니었다.

    운현은 뜨거워지는 눈가를 감추려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렇군.”

    능세영의 주름진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눈을 감고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의 눈빛에 주저함은 조금도 없었다.

    “고맙네. 내 자네를 믿고 기꺼이 내 목숨을 맡기겠네.”

    “네 믿음은.”

    담담한 목소리로 객옹은 말했다.

    “보답받게 될 것이다.”

    능세영이 눈물진 눈으로 빙긋 웃었다.

    바로 그때였다.

    덜컹.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객옹이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노려보는 두 사람의 표정은 더없이 심각했다.

    “무슨……. 응?”

    의아한 표정으로 묻던 금화영도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고운 눈썹이 단번에 일그러졌다.

    “이건…….”

    “적입니다.”

    금화영의 말에 답하듯 운현이 말했다.

    그저 기운을 느낀 것뿐이었지만 운현은 서슴없이 상대가 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마치 시커먼 진창 같은 그 느낌이 예전 무림맹이 무너질 때 보았던 실혼대와 너무나도 흡사했기 때문이다.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불길한 기운이 사방에서 넘실대며 몰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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