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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46화 (446/530)

446화. 정사대전의 이면

운현 일행을 맞이한 노부인은 우아한 느낌의 미인이었다.

비록 곱게 빗어 넘긴 머리는 하얗게 세었고, 눈가의 잔주름도 숨길 수 없었지만 온화한 눈매와 단아한 표정은 여전히 곱고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노부인을 향한 객옹의 눈빛은 서늘하기만 했다.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우선 안으로 들어오지 그러나?”

여유로운 표정으로 노부인이 말했다.

“계속 이곳에 서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일세.”

객옹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녀의 말이 옳았다.

“들어가시지요.”

운현까지 나서자 객옹이 낮게 혀를 찼다.

“……알았다.”

“자, 이리들 들어오게.”

노부인이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는 집 안으로 향했다.

잠시 노부인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객옹은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안절부절하던 금화영의 표정이 그제야 밝아졌다.

“운 공자, 우리도 들어가세.”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쏴아아.

스산한 바람이 나무를 흔들며 소리를 냈다.

산에는 낮이 짧다더니 어느새 해가 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붉게 물드는 기련산맥의 장엄한 모습을 뒤로하고, 운현은 금화영과 함께 집 안으로 들어섰다.

달칵.

따뜻한 차향이 부드럽게 퍼지며 방 안을 채웠다.

이곳이 본래 사찰이었음을 알려 주듯 천장이 아주 높았다.

그러나 종교적인 색채는 그것뿐이었다.

“자네들은 운이 좋군.”

또르륵.

찻주전자를 기울이며 노부인이 말했다.

“이게 마지막 찻잎이었으니 말이야.”

“내가 새로 많이 사 왔다네, 할망!”

금화영이 얼른 말했다.

노부인은 잘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고맙다.”

금화영은 환하게 웃었다.

노부인은 그런 금화영을 보며 새삼 놀랍다는 듯 말했다.

“세상에, 평생 선머슴처럼 혼자 살 줄 알았더니 이렇게 빨리 남자를 잡아 올 줄은…….”

“그, 그런 게 아닐세!”

금화영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노부인은 눈을 찌푸렸다.

“아니라고? 그럼 대체 여긴 왜 온 게냐?”

“하, 할망이 그러지 않았나? 감히 한 수 배울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경지에 이른 사람을 만나거든 즉시 알리라고. 그래서…….”

말하던 금화영은 운현을 돌아보았다.

노부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아이가 말이냐?”

금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살을 찌푸린 노부인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영 미덥지 못한 제자지만 그래도 거짓을 말할 금화영이 아니다.

노부인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슥.

그녀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조금 전까지의 온화한 표정이 온데간데없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노부인의 눈동자에 어렸다.

“흐음. 제법 멀쩡하게 생기긴 했다만……. 응?”

노부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을 때였다.

슥.

객옹의 팔이 운현을 가렸다.

그래 봤자 운현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 의도는 분명했다.

“손님을 청했으면.”

낮은 목소리로 객옹이 말했다.

“예를 갖춰라.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기 전에.”

운현 일행이 이곳에 온 것은 금화영에게 한 노부인의 명 때문이다.

그러니 노부인이 청했다는 객옹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 이런.”

노부인도 그제야 자신이 성급했음을 알아차렸다.

사락.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운현과 객옹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사람을 대함이 오랜만이라 무례를 행했군. 나는 능세영이네.”

운현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청명한 눈빛으로 노부인이 말을 이었다.

“천일검이라는 명호를 가졌으나 버릇없는 제자에게 물려주었고 지금은 이곳에서 홀로 늙어 가는 할망구라네. 후후후.”

“저는 운현이라 합니다.”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운현이 말했다.

“그리고 이분은 객옹이십니다.”

“객옹?”

노부인 능세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객옹을 돌아보았다.

“독선이 아니란 말인가?”

“지금은 객옹이십니다.”

능세영은 운현의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아하, 그렇군.”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능세영이 말했다.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운현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 모습을 능세영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예상과는 조금 다르군.”

“네?”

“아닐세. 편히 앉으시게.”

운현이 앉자 능세영도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후룩.

능세영은 느긋하게 차를 음미했다.

객옹이 뚫어지게 쳐다보자 능세영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칵.

“이거 오랜만에 사내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니 조금 부끄러워지는군그래.”

말과는 달리 여유롭게 웃으며 능세영이 말했다.

객옹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네가 어찌 나를 아느냐?”

“자네 같은 강렬한 기세를 가진 이가 천하에 또 누가 있겠나? 분명 환우오천존 중 한 명일 테지.”

능세영이 온화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허나 승려로는 보이지 않고, 뱀이라 불릴 만큼 교활해 보이지도 않으며 딱히 검에 집착하는 것 같지도 않으니 결국은 독선 아니겠나?”

즉, 단순한 소거법이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객옹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능세영은 찻잔을 쥔 채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신승은 잘 있나?”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능세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운현이 조용히 말했다.

“신승께서는 입적하셨습니다.”

“신승이?”

능세영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아니, 어떻게…….”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그가 목숨을 버려 자신을 살렸다고 어찌 말할 수 있을까?

운현이 말이 없자 능세영은 탄식을 흘렸다.

“허어, 저런…….”

그녀는 눈을 감았다.

“비록 그와 만난 적은 없으나 그의 뜻은 참으로 고귀했었네. 그런 그가 벌써 떠나다니……. 아미타불.”

능세영은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그 모습에 운현의 가슴이 뭉클해졌다.

문득 객옹이 물었다.

“너는 불가의 사람인가?”

“아닐세. 그저 사문의 시조께서 아미와 작은 인연이 있으셨을 뿐이네.”

대답한 능세영은 운현에게 물었다.

“그러면 무림맹은 어찌 되었나?”

“무너졌습니다. 허나…….”

“무림맹이 무너졌다고?”

능세영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허면 지금 세상은…….”

“걱정할 것 없다.”

객옹이 능세영의 말을 끊었다.

“정사대전 같은 건 더 이상 없으니까.”

그건 능세영의 염려를 정확히 짚어 낸 말이었다.

“지금은 창룡맹이 무림맹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그 창룡맹의 맹주가.”

객옹이 운현을 슬쩍 쳐다보았다.

“바로 현이지.”

“뭐?”

능세영은 자신도 모르게 운현을 돌아보았다.

놀라는 그녀에게 객옹이 담담히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불영의 사제이기도 하고. 와불이 막무가내로 만든 것이긴 하지만.”

“허어.”

능세영은 감탄을 흘렸다.

“그렇군. 자네가 신승의 뜻을…….”

그녀는 눈을 감고 나지막이 불호를 외웠다.

잠시 후 눈을 뜬 능세영은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자네는 그가 기다리던 이가 분명하군. 설마 화영이가 이렇듯 덥석 물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말이네.”

“‘그’라니?”

객옹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설마…….”

능세영의 말은 이 초청에 연관된 사람이 더 있다는 뜻이었다.

객옹으로서는 당연히 경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그’가 일대상인이라면 능세영은 적이라는 뜻이니까.

“그리 경계할 것 없네.”

능세영이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객옹의 시선 앞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자네도 잘 아는 사람이니까. 아니, 잘 알지는 못하나? 그는 바로…….”

“혹시 일은이십니까?”

그건 운현의 목소리였다.

그 말에 객옹도, 능세영도 크게 놀랐다.

“뭐라고?”

“자네가 그걸 어떻게……?”

놀라는 능세영에게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어르신께서는 환우오천존 중 의도적으로 일은을 제외하시더군요. 강호 무림의 정세에 밝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깊은 산속에 은거하신 분이 그 가능성을 제외하시는 건 부자연스럽지요.”

일은이 현재까지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능세영은 그녀가 은거하는 사이 일은이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무림맹이 무너진 사실조차 몰랐던 그녀이니 말이다.

“이런, 내가 말실수를 했었군.”

능세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내가 말한 사람은 바로 일은일세. 그리고 나와는 작지 않은 인연이 있는 사람이고.”

“인연이라니? 어떤 인연 말이냐?”

객옹이 물었다.

능세영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사대전의 또 다른 이면에 얽힌 인연일세.”

객옹의 눈빛이 변했다.

“……정사대전의 이면?”

“바로 혈교와 마교일세.”

그 말에 객옹의 안색이 단번에 굳었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혈교와 마교라고요?”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천마나, 세상을 피로 씻는다는 혈마에 대해서는 운현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이야기꾼들을 통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그들은 언제나 절대적인 악으로 그려졌다.

허나 천마나 혈마는 오래된 전설에서나 언급되는 인물이고, 혈교나 마교는 존재조차 의심스러운 집단이다.

그런 혈교와 마교가 갑자기 능세영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정말 그런 집단이 존재한단 말입니까?”

“존재한다.”

객옹이 짧게 답했다.

그는 능세영에게 물었다.

“……설마 그들이 정사대전의 배후였단 말이냐?”

“그렇지 않네.”

능세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뿌리가 뽑혔던 그들에게 어찌 정사대전을 일으킬 힘이 있겠나? 허나 정사대전에 휘말려 온 무림이 둘로 나뉘어 싸우는 동안 혈교와 마교는 착실히 힘을 기르고 있었네. 아니, 정사대전에서 흐르는 피가 그들에게 힘을 더해 주고 있었지.”

심각한 눈빛으로 능세영은 말했다.

“만일 혈교와 마교가 정사대전에 뛰어들었다면 어찌 되었을 것 같은가?”

객옹은 이를 악물었다.

능세영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마도 훨씬 더 많은 피가 흘렀을 것일세. 단지 무림인들만이 아닌,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의 피가 말일세.”

“무고한 사람들이라니요?”

운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혈교와 마교는 천하가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원한다.”

객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들은 사람들의 불안한 마음을 틈타 백성들을 미혹하고 분노와 갈등을 부추기지. 그렇게 힘을 얻은 혈교와 마교는 사람들을 민란으로 내몰아 간다.”

“민란!”

운현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가혹한 압제에 시달린 백성이 민란을 일으키는 일은 역사상 수없이 많았다.

그것은 조정의 학정에 대한 백성들의 유일한 저항 수단이었고 때로는 세상을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의도적으로 민란을 조장한다는 것은 결코 용납받을 수 없는 일이다.

“설마 정사대전이 민란으로까지 번졌을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적어도 민란을 촉발시키는 계기는 충분히 되었겠지. 혈교와 마교가 움직였다면.”

“하지만 어째서요? 민란이 일어나면 그들도 조정의 탄압을 받게 될 텐데요?”

무림의 정사대전과 민란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조정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사대전은, 비록 온 무림이 둘로 갈라져 피를 흘렸다 해도 일부의 소란일 뿐이다.

하지만 민란은 조정의 권위에 거역하는 심각한 중죄다.

당연히 혈교와 마교 역시 탄압받을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그런 일을 자초한다는 것일까?

“천하를 피로 뒤덮는 것이 그들의 원하는 바니까.”

객옹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혈마와 천마의 재래를 앞당기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그것뿐이다.”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세상을 피로 뒤덮는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객옹도 굳은 표정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나지막이 되뇌는 능세영의 불호만이, 차향과 함께 조용히 방 안을 떠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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