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5화. 먼 여정
항주 외곽, 창룡맹 임시 총단 맹주 집무실.
집무실이라기보다는 서재 같은 분위기의 방 안에 긴장이 흘렀다.
펄럭.
화려한 옷소매를 펄럭이며 공손세가의 가주 비검 공손월은 두 손을 마주하고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공손세가의 가주로서, 창룡맹의 가맹을 청하오.”
운현 역시 그 예에 답했다.
사락.
손을 마주하고 들어 올리며 운현이 말했다.
“창룡맹의 맹주로서, 공손세가의 가맹을 허락합니다.”
“감사하오, 맹주.”
비검 공손월은 빙긋 웃었다.
이로서 공손세가가 창룡맹에 정식으로 가맹하게 된 것이다.
“축하하오. 공손 가주.”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 축하를 건넸다.
옆에 있던 금화영 역시 공손명을 축하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반긴 사람은 바로 총군사 영호준이었다.
“환영합니다. 가주님.”
바로 어제 항주로 돌아온 영호준은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이제 창룡맹과 함께 공손세가가 다시 날개를 펼칠 날만 남았군요.”
공손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총군사 영호준이 공손세가에 내민 조건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러나 공손세가가 다시 날개를 펼칠 수 있다면 결코 비싸다 할 수 없었다.
“고맙소, 총군사. 앞으로 잘 부탁하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자, 자리에 앉으시지요. 마침 좋은 술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집무실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운현과 객옹, 금화영, 그리고 두 사람의 가주들이 앉기엔 충분했다.
총군사 영호준은 객옹에겐 차를,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겐 향긋한 술을 내었다.
“향이 좋은 술이로군.”
제갈명이 말했다.
제갈세가의 가주로서 온갖 명주는 다 마셔 본 그였기에, 이 술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첫 잔은 마치 의례를 치르듯 다 함께 마셨지만, 그 이후로는 가벼운 담소가 이어졌다.
그리고 화제는 자연스럽게 며칠 전 있었던 후원의 비무로 이어졌다.
금화영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래서, 마음은 정했나?”
그녀가 질문한 대상은 제갈명과 공손월이었다.
젊은 금화영이 평대를 하고 있었지만 제갈명도 공손월도 문제 삼지 않았다.
“으음, 글쎄? 그게…….”
공손월이 살짝 신음을 흘리며 제갈명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지.”
제갈명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탁.
“아무리 그래도 가주의 지위를 내려놓는 건 무리네.”
세가의 가주 자리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아무리 상대가 객옹이라지만 비무를 위해 가주 자리를 내려놓는 건 확실히 비상식적인 요구였다.
“대체 누가 단 한 번의 비무를 위해…….”
“한 번이라고는 안 했다.”
객옹이 묵직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울렸다.
그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한 명이라고 했을 뿐이지.”
후룩.
객옹은 담담한 표정으로 차를 마셨다.
“당장 하라 하지도 않았다. 평생 가주 자리를 붙들고 살다가 세상에 아무런 미련이 없게 될 때라도 상관없지.”
나이로 따지면 가주들보다 객옹이 더 많았지만 그가 먼저 세상을 떠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객옹은 바로 ‘삶과 죽음의 주관자’이니까.
“그, 그럼…….”
제갈명의 표정이 밝아지려던 때였다.
“하지만 그때도 너희의 차례가 있을까?”
객옹의 말에 공손월과 제갈명의 안색이 변했다.
금화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싱글벙글했다.
“역시 객옹 어르신께 한 수 배울 사람은 내가…….”
“요즘 각 문파에 재미있는 움직임이 있더군요.”
그건 총군사 영호준의 목소리였다.
싱긋 웃으며 영호준은 말했다.
“창룡맹으로 인해 상황이 안정되었으니 더 이상 장문인의 자리를 공석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움직임 말입니다.”
창룡맹이 설립되며 각 문파의 내부 혼란은 점차로 안정되기 시작했다.
외부의 위기가 해소되자 여유를 되찾은 것이다.
그 결과, 사실상 부재 상태가 된 장문인들의 자리를 이대로 둘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새로운 장문인은 과거의 책임에서 비교적 자유로우니까요. 말하자면 정치적 목적을 위한 인위적인 세대교체지요.”
공손월과 제갈명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총군사 영호준이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당장 화산과 무당도 그러하고, 아미도 고려 중이라고 하더군요. 혹시 제갈세가나 공손세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크흠.”
공손월은 헛기침을 했다.
사실 창룡맹 개파대전 때 그는 공손세가의 새로운 가주를 소개하려 했기 때문이다.
바로 총군사 영호준이 말한 이유로 인해서 말이다.
“천천히 생각하시지요.”
운현이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급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 그렇소. 급할 필요가 어디 있겠소? 하하하.”
제갈명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역시 제갈세가에서 세대교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마찬가지였다.
즉 제갈명이든 공손월이든 어차피 가주의 지위를 내려놓으려 했다는 의미다.
후룩.
제갈명은 목이 타는지 옆에 놓아 둔 차를 마셨다.
조용해진 집무실 안에 두 사람이 차를 마시는 소리가 흐르고, 객옹은 영호준을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시선은 분명 만족의 표현이었다.
영호준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예를 표했다.
***
감숙은 역사적으로 많은 이민족들이 모여 살던 드넓은 지역이다.
동서 비단 교역의 관문이자 장성의 서쪽 끝인 가욕관이 위치해 있어 감숙성은 한때 경제적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황량한 산지와 고원, 사막 지형과 들끓는 마적들로 인해 가히 변방 중에서도 변방이라 이를 만한 지역이었다.
물론 가욕관 너머의 신강에 비교하면 한결 나았지만 말이다.
따각, 따각.
커다란 마차 한 대가 관도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서쪽의 가욕관을 향해 달리는 그 마차에는 운현과 객옹, 금화영, 그리고 감찰어사 조관과 항장익이 타고 있었다.
객옹과 운현, 금화영의 안색은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지만 조관과 항장익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항주에서 이곳까지는 천하를 횡단하는 대단히 긴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관에서 준비한 쾌속선과 역참의 말들이 아니었다면 몇 달은 더 걸렸을 것이 분명했다.
슥.
운현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보이는 기련산맥의 장엄한 모습은 이곳이 감숙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금 소저.”
운현이 금화영을 불렀다.
기련산맥의 풍광에 젖어 있던 금화영은 눈을 깜빡이며 운현을 돌아보았다.
“소저의 스승께서 계신 곳은 어디쯤입니까?”
“음, 그게. 길은 아는데 설명하긴 곤란하네. 일단 내가 가욕관을 통해 나왔으니 그쪽으로 가야 할 걸세.”
기련산맥은 대단히 넓고 깊다.
사람의 발길이 닿기는커녕 이름조차 없는 곳도 많아서 누구라도 말로 설명하긴 어려울 것이다.
“가욕관이라, 장성의 서쪽 끝이군요.”
감찰어사 조관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는 운현을 향해 말했다.
“변방은 중앙의 통제가 먹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대인의 뜻을 그 누가 거스르려 하겠습니까만, 그래도 각별히 조심해 주십시오.”
“그건 걱정 말게.”
운현이 대답하기도 전에 금화영이 말했다.
“누구도 자네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할 테니까.”
그녀는 자신 있다는 듯 가슴을 내밀었다.
하지만 일행 중에 가장 시선을 끄는 사람은 바로 젊고 아름다운 금화영이었다.
여태껏 들른 객잔에서도 사람들은 그녀를 돌아보기 바빴다.
물론 말썽의 여지는 객옹이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렸고 말이다.
“고맙습니다. 소저.”
운현이 빙긋 웃자 금화영은 슬쩍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운 대인. 이곳에는 큰 문파가 없습니까?”
감찰어사 조관이 물었다.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저도 잘 아는 것은 아니라서…….”
강호 무림에 대한 것이라면 총군사 영호준이 잘 안다.
하지만 그는 함께 오지 못했다.
금화영도 알 것 같지 않아서, 운현은 객옹을 쳐다보았다.
“공동파가 있다.”
객옹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사는 오래되었으나 폐쇄적이라 다른 문파와 교류가 별로 없지. 정사대전 당시에도 중원 무림과 철저히 거리를 두었다.”
사천당문은 끊임없이 중원 무림으로 나가려 했으나 공동파는 오히려 중원 무림을 멀리했다.
“그렇군요.”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객옹이 말을 이었다.
“복마검법으로 유명한 검파(劍派)기도 하지.”
‘검파’라는 말에 운현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객옹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따각, 따각.
그러는 중에도 일행이 탄 마차는 관도를 따라 내달렸다.
짙푸른 녹음이 서서히 사라져 가고 황량한 고원 지대가 점차 두드러졌다.
장성의 서쪽 끝이자 비단 교역의 관문, 가욕관이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욕관과 인접한 중소 도시에 도착한 일행은 그곳에 숙소를 정했다.
그곳에서 며칠 머무르며 여독을 씻어 낸 후, 운현과 객옹 그리고 금화영은 말을 타고 기련산으로 들어갔다.
조관과 항장익은 유사시 연락을 위해 숙소에 남아 있기로 했다.
딸랑, 딸랑.
세 사람이 탄 말은 그리 크지 않은 짐말이었다.
짐말의 방울 소리를 들으며 일행은 산행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평범한 산길이었지만 길은 금방 험해졌다.
나중에는 길마저 없어졌고, 깊은 계곡과 높은 봉우리 그리고 천 길 낭떠러지도 나타났다.
오색의 천을 매어 놓은 암벽 사당도 시선을 끌었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세 사람은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저벅, 저벅.
거칠고 험한 산길을 객옹은 뒷짐까지 지고 산책하듯 올라갔다.
운현은 가벼운 보따리를 짊어진 정도였지만 금화영이 진 짐은 대단히 컸다.
성인의 키 높이 정도 되는 큰 짐이라 운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볼 정도였다.
“무겁지 않습니까?”
“아, 괜찮네. 오랜만에 할망을 보려니 이것저것 챙기고 싶은 게 많아서…….”
대답하는 금화영의 표정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가 진 짐의 대부분은 아랫마을에서 산 것들이었다.
스승을 생각하는 그녀의 모습이 보기 좋아서 운현 역시 미소를 지었다.
“길은 험하지만 참으로 멋진 곳이군요.”
“그렇지? 눈이 많아서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풍경은 꽤나 좋다네.”
눈을 귀찮다고 표현하는 걸 보면 이곳에 눈이 많긴 한 것 같았다.
“그래도 여름엔 제법 덥지. 철이 되면 계곡마다 꽃도 화사하게 피고…….”
금화영은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기련산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를 얼마나 했을까?
“저곳일세.”
문득 금화영이 말했다.
운현은 눈을 들었다.
낭떠러지 아래 세워진 제법 큰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초막 같은 걸 예상하고 있던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저곳이라고요?”
확실히 깊은 산속이기는 하지만 건물은 사뭇 화려했다.
색은 바랬어도 누런 지붕과 붉은 기둥을 확실히 분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응. 본래 무슨 사찰이었다더군. 하지만 누가 찾아온 적은 없었다네.”
금화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위 ‘기운이 좋은 곳’에 사찰을 지어 자신의 영달을 기원하는 사람은 어느 때고 있기 마련이다.
아마 그런 이유로 지어진 듯한데, 이렇게 깊고 험한 곳에 자주 찾아올 수 없으니 세월이 지나며 자연히 버려진 것일 터였다.
“그렇군요. 그럼…….”
말하던 운현은 문득 건물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분은…….”
“할망!”
금화영이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커다란 짐을 지고도 가볍게 몸을 날렸다.
탁, 탁.
금화영은 금방 건물 앞에 이르렀다.
그리고 거침없이 누군가에게 안겼다.
팍.
“할망!”
“후후후.”
흰머리가 성성한 노년의 부인이 온화한 웃음을 지었다.
곱게 나이 들었다는 말이 저절로 생각나는 노부인은 금화영을 감싸 안았다.
“오랜만이로구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부인이 말했다.
그녀가 바로 금화영의 스승이자, 한때 천일검이라는 명호를 가졌던 여인임이 분명했다.
슥.
노부인은 금화영을 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리고 운현과 객옹을 바라보았다.
“호오.”
노부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이거, 이런 곳에서 독선을 뵐 줄은 몰랐소이다.”
객옹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노부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객옹이 물었다.
“너는 누구냐?”
“후후.”
노부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객옹 앞에서도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