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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44화 (444/530)
  • 444화. 가주이거나, 무인이거나

    쏴아아.

    후원에 바람이 불었다.

    솟았던 흙먼지와 풀잎들이 밀려가고, 폭풍에 휘말린 듯 흔들리던 나무들도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운현은 자신의 검 미명을 거두었다.

    스릉.

    빛나던 칼날이 모습을 감추고 운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흰머리는 흐트러졌고 긴 수염은 흙먼지가 가득했다.

    그의 어검술이 운현의 중검을 버텨 내지 못한 것이다.

    운현은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슥.

    제갈명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군자검은 조금 떨어진 곳에 박혀 있었다.

    섬뜩하게 흘러나오던 푸른 검기가 지금은 흔적조차 없었다.

    “……부축은 필요 없소.”

    “아니, 필요하실 겁니다.”

    운현의 말에 제갈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모욕하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가주님의 절기는 단지 내력을 불어넣어 운용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니까요.”

    운현은 내력을 불어넣어 물체를 움직이는 수법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일은이 철전을 자유자재로 움직였던 방법이다.

    그러나 제갈명의 어검술은 그것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무엇이라 이름하셨습니까?”

    “……유검만리라 하오.”

    “흐르는 검이 만 리를 간다. 좋은 이름이군요.”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가주께서 검과 하나 되는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야 어찌 그러한 절기가 가능하겠습니까? 허나 이는 제 검을 온몸으로 받아 내신 것과 같으니 그 충격이 작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제 손을 거절치 말아 주십시오.”

    제갈명의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알고 있었소?”

    “아닙니다. 하지만 알 수 있었습니다. 유검만리는 천하의 그 무엇과도 같지 않았으니까요.”

    제갈명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는 패배의 참담함도, 자신의 절기가 깨어진 것에 대한 허탈함도 없었다.

    슥.

    제갈명은 운현의 손을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갈명이 일어서자 손을 놓은 운현이 한 발 뒤로 물러서고, 제갈명은 가볍게 옷매무새를 정돈한 후 자신의 검으로 향했다.

    스륵.

    제갈명은 땅에 박혀 있던 자신의 군자검을 뽑았다.

    그 엄청난 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군자검의 칼날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제갈명은 칼날을 살핀 후 군자검을 갈무리했다.

    탁.

    군자검이 모습을 감췄다.

    제갈명은 고개를 돌려 운현에게 물었다.

    “맹주의 그 검격은…… 무엇이라 이르오?”

    마치 태산이 무너지는 듯하던 운현의 검.

    그저 생각만으로도 다시금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백호실전검 제삼식, 중검이라 합니다.”

    “중검.”

    제갈명은 조용히 되뇌었다.

    참으로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검이었소. 그리고 보아하니…….”

    제갈명은 슬쩍 비검 공손월을 쳐다보았다.

    경악으로 물든 공손월의 표정은 아직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맹주의 절기는 그것만이 아닌 듯하오만.”

    운현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갈명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에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검성을 넘으리라 생각했으나 맹주의 일검조차 버텨 내지 못하다니, 참으로 부끄럽구려.”

    “그건 아닙니다.”

    제갈명의 눈썹이 꿈틀했다.

    운현은 말했다.

    “가주님의 어검술은 다수의 상대에게는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설령 검기발현의 고수라 할지라도 처음 접했다면 크게 당황하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제갈명이 재촉하듯 말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가주님의 첫 일검이, 제게는 더욱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제갈명은 잠시 말을 잊었다.

    그가 펼쳤던 첫 일검은 제갈세가의 ‘태산압정’이다.

    이름조차 흔한 그 검은 그저 첫 시작을 조금 바꾸었을 뿐인 간단한 초식이었다.

    허나 그렇기에 제갈명이 살아온 세월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검이었다.

    “그 일검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듯하지만 사실 그 검이야말로 가주님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검이었습니다.”

    운현의 눈동자는 더없이 진지했다.

    “……진정 그러하오?”

    “네.”

    제갈명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지나치게 ‘검성과 다름’에 집착했었나 보군.”

    검신일체의 경지에 오른 제갈명은 검성의 절기 일검충천과 다른 무엇인가를 원했다.

    그것이 바로 어검술이었다.

    어검술이라면 능히 검성의 일검충천과 비견할 만하다고, 아니 그 이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제갈명의 어검술은 운현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제갈명이 씁쓸한 미소를 짓던 순간이었다.

    “비검승천과는 어떠하오?”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바로 공손세가의 가주, 비검 공손월이었다.

    무인의 어쩔 수 없는 호승심이 그의 눈동자에 가득했다.

    “맹주께서는 나의 비검승천과 제갈 가주의 유검만리를 모두 상대하셨소. 그러니 맹주께서 보시기에…….”

    “호오, 공손 가주께서 그것이 궁금하시군.”

    말한 사람은 제갈명이었다.

    그는 공손월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면 어찌하여 내게 직접 묻지 않소? 내 검은 아직도 멀쩡한데 말이오.”

    제갈명의 눈동자는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공손월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허허, 나도 그렇게 하고 싶소만 방금 패배하신 분께 그리 하는 건 어쩐지 심한 처사 같아서 말이오.”

    수염을 쓰다듬는 공손월의 어조는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는 제갈명과 똑같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쯧.”

    객옹이 혀를 찼다.

    “둘 다 졌잖아.”

    제갈명과 공손월이 움찔했다.

    자신도 모르게 호승심을 내세웠지만 사실 둘 다 운현에게 졌지 않은가?

    객옹은 먼지가 떠다니는 차를 버리고는 찻잔에 찻주전자를 기울였다.

    쪼르륵.

    “그보다 너희.”

    탁.

    찻주전자를 내려놓으며 객옹이 말했다.

    “무서운 사람이 검성뿐이냐?”

    제갈명과 공손월을 쳐다보는 객옹의 눈빛은 사뭇 날카로웠다.

    그 눈동자에 일렁이는 빛은 조금 전 제갈명이나 공손월과 똑같았다.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단히 공손한 어조로 공손월이 말했다.

    하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허나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낸다는 말도 있으니까요.”

    “흥.”

    객옹은 코웃음을 흘렸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그래. 정사대전이 끝난 후 시간이 많이 지나기는 했지.”

    찻잔을 들며 객옹은 말했다.

    “한 사람.”

    후륵.

    객옹은 공손월이나 제갈명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한 사람만 상대해 주마.”

    쿵.

    마치 커다란 돌이 후원에 떨어진 것 같았다.

    제갈명과 공손월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즉시 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객옹과 비무를 할 기회라니!

    만일 바깥에 알려진다면 말 그대로 천하가 들썩일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도 하겠네!”

    덜컹.

    금화영이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전부터 내가 한 수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나? 안 그런가? 객옹 어르신. ”

    “감히 어디를 나서는 겐가!”

    제갈명이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몇 십 년 전부터일세!”

    금화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건…….”

    “자네처럼 고운 아가씨에게 비무는 어울리지 않네.”

    짐짓 타이르듯 공손월이 말했다.

    옆자리에 있던 그는 점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차차기쯤을 노려보게. 내 좋은 남자 하나 소개시켜줄 테니까 당분간은 연애라도 하고.”

    두 사람은 짜기라도 한 것처럼 금화영을 말렸다.

    물론 나이가 어리다거나 여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금화영이 가세하면 경쟁이 치열해지기 때문이다.

    그녀의 경지가 범상치 않은 것은 첫 만남에서 느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차차기 따위는 필요없고.”

    금화영은 빙긋 웃으며 이를 악물었다.

    으득.

    “자신 있는 사람부터 덤비게.”

    그녀의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파라락.

    그녀의 옷자락이 펄럭이며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제갈명과 공손월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허허, 젊은 혈기는 참 보기 좋네만.”

    후우욱.

    제갈명이 기세를 쏟아 내기 시작했다.

    “가끔은 혼도 나야 사람이 되는 법이지.”

    “그럼. 젊은 사람이든, 나이든 사람이든 말이야.”

    자리에서 일어나며 공손월이 말했다.

    제갈명을 향하는 그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콰과과곽.

    세 사람의 기운이 사방을 휩쓸었다.

    조용하던 후원은 갑자기 폭풍이라도 부는 듯 풀잎과 흙먼지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누구도 양보하지 않았다.

    제갈명과 공손월, 그리고 금화영의 눈빛은 기어이 결판을 내려는 듯했다.

    “……잠시 진정하시지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후원을 휘감았던 기운이 삽시간에 잦아들었다.

    훅.

    “아, 저기, 그게 운 공자. 나는…….”

    “맹주. 그런 것이 아니라…….”

    금화영과 공손월이 말하는데 운현은 고개를 돌려 객옹을 바라보았다.

    “어르신. 그러면…….”

    “넌 빼고.”

    객옹이 찻잔을 내렸다.

    달칵.

    “너하곤 안 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운현은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러시군요. 저는 그저 어르신의 새로운 천향접이 참으로 아름다워 보이기에…….”

    순간 제갈명과 공손월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새로운 천향접’이라니?

    이건 절대로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제갈명이 급히 말했다.

    “그러면……!”

    “우선은.”

    운현이 제갈명의 말을 끊었다.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제갈명은 운현을 돌아보았다.

    “이야기라 하셨소?”

    “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만 기회를 얻는다는 건 나중에라도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제갈명이나 공손월의 마음은 달랐다.

    나중에야 무슨 문제가 되건 남에게 양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일이 알려지면 당장 남궁세가나 모용세가는 물론이고 소림, 화산, 무당, 아미까지, 창룡맹에 속한 모든 문파와 세가의 장문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이 뻔했으니까.

    “허, 허나…….”

    “그리고 비록 비공식이라고는 하나, 가주들께서 비무를 하신다는 건 세가 간의 문제로 번질 여지도 있고요.”

    운현의 말은 옳았다.

    제갈세가와 공손세가의 가주가 검을 맞댄다는 건 사실 비현실적인 일이다.

    가주는 곧 세가의 자존심이자 상징이며 때로는 세가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주들 간의 비무라는 건, 두 세가가 전면전을 벌여 한쪽이 멸문이라도 하지 않는 한 성립될 수 없는 일이었다.

    “끄응.”

    공손월이 신음을 흘렸다.

    새삼 생각해 보니 보통 일이 아니다.

    아무리 객옹과의 비무가 걸려 있다 해도 제갈세가와 공손세가의 가주가 비무를 하여 승패를 정한다니?

    만의 하나라도 밖으로 새어 나가면 엄청난 일이 벌어질 터였다.

    “그, 그렇지만…….”

    “아니면 되지.”

    객옹이 무심하게 말했다.

    운현은 물론 제갈명과 공손월, 금화영의 시선이 일제히 객옹에게 말했다.

    객옹은 피식 웃었다.

    “내려놓으면 된다. 가주 자리를 말이다.”

    두 가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가주의 직위를 내려놓으라니?

    “허, 허나…….”

    “싫으면 말고.”

    객옹의 말은 간단했다.

    “그깟 것도 못 하면서 어찌 나와 비무를 하겠다는 말이냐?”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다.

    객옹이야말로 당문의 문주 자리를 내려놓은 사람이니 말이다.

    하지만 제갈명과 공손월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덜컹.

    객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해지면 말해라. 그리고…….”

    희미하게 웃으며 객옹은 말했다.

    “가주 자리라는 게, 내려놓고 나니 생각보다 별거 아니더군.”

    그 말을 끝으로 객옹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제갈명과 공손월은 복잡한 생각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그들에게 선택의 순간이 온 것이다.

    세가의 가주이거나, 혹은 한 사람의 무인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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