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항주에서 기다린 사람들
호남성 악양, 일충현 본가.
호암상단의 총회합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운현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애초에 총군사 영호준과도 그렇게 이야기를 해 두었던 데다가, 이곳에서 운현이 해야 할 일은 다 끝났기 때문이다.
다만 처음 생각과는 달라진 것들이 있었다.
“준비는 다 되셨습니까? 능 여협.”
“다 됐네.”
능화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무복을 입고 보따리까지 등에 멘 그녀는 영락없는 유랑 무사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제 난 능 여협이 아니지 않는가?”
“아, 그렇군요. 금 여협.”
능화영은 금가장의 양녀가 되었다.
운현의 제안을 들은 장주 금사열은 크게 반겼고, 노년에 새로운 딸을 얻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 능화영을 언니라 부르던 금혜린 역시 기뻐했다.
그렇게 능화영은 금화영이 되어 새로운 가족을 얻게 되었다.
“저기, 여협보다 소저라고 불러 주면 좋겠네만…….”
금화영이 주저하며 말했다.
본인이 그렇게 불러 달라는데 못 부를 이유가 없다.
게다가 금화영 같은 고수의 부탁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네. 금 소저.”
운현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자 금화영의 표정은 밝아졌다.
“고맙네. 할망, 아니 스승께 꼭 보여 드리고 싶군. 나더러 선머슴이라며 그리도 구박을 하더니…….”
“선머슴이라니요. 어떻게 언니가 선머슴이겠어요?”
금혜린이 금화영에게 말했다.
“이렇게 예쁘고 멋진 아가씨가 선머슴이라면, 전 남자겠네요.”
화장을 거의 안 했어도 금화영의 여성스러움은 감출 수가 없었다.
오히려 꾸미지 않은 건강한 매력이 더욱 두드러지고 있었다.
금혜린은 사뭇 부럽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항주라니, 그 아름답다는 도시에 가는 건가요? 저도 꼭 가 보고 싶었는데…….”
금화영의 스승을 방문하는 건 뒤로 늦춰졌다.
운현이 먼저 항주 창룡맹 총단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금화영은 당분간 운현 일행과 동행하게 되었다.
“나중에 한번 오시지요.”
운현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좋은 곳에서 식사를 대접하도록 하지요.”
“고마워요. 운 공자님.”
금혜린은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비록 안색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녀는 여전히 회복이 필요했다.
다만 그녀의 독특한 능력은 거의 사라져서, 이제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감이 좋다고 할 정도에 불과했다.
“언니를 잘 부탁드려요.”
“크흠.”
금혜린의 말에 금화영은 헛기침을 했다.
금화영 정도의 고수를 부탁한다는 말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운현이 대답하던 그때였다.
“어이쿠, 이거 다들 나와 계셨군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제갈기호가 나타났다.
그는 거침없이 걸어오더니 운현과 객옹에게 예를 표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늦었습니다.”
운현도 그의 예에 답했다.
“아닙니다. 아직 출발 전인걸요.”
“그건 다행이군요. 하하하.”
제갈기호는 호탕하게 웃었다.
운현 일행이 항주로 먼저 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제갈기호가 전해 온 소식이었다.
계림에서 운현이 공손세가의 가주와 비무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된 제갈세가의 가주가 무조건 운현을 찾아오겠다고 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항주의 창룡맹 총단에 있던 진예림이 전해 온 서신에는 공손세가의 사신이 운현의 항주 귀환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총군사 영호준의 부재 탓에 진예림 혼자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다는 불평과 함께 말이다.
결국 운현은 금화영의 스승을 방문하기 전에 먼저 항주로 돌아가기로 했다.
맹주의 책무가 아무래도 우선인 데다, 제갈세가의 가주와 공손세가의 사자를 기다리게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이곳으로 오겠다는 제갈세가의 가주 역시 항주에서 만나기로 했다.
“흠, 자네가 또 다른 동행인가?”
금화영이 제갈기호를 보며 말했다.
제갈기호는 빙긋 웃었다.
“그렇습니다. 저는 제갈기호라고 합니다.”
“나는 능화, 아니 금화영일세.”
금화영의 말투에 제갈기호는 살짝 당혹스러웠다.
성을 고쳐 말하는 것도, 젊은 아가씨가 노인 같은 어투로 말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제갈기호의 성에 별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혹시 제갈세가인가요?’라며 틀림없이 다시 물어볼 텐데 말이다.
그래도 제갈기호는 웃으며 말했다.
“금 소저시군요. 앞으로 잘 부탁…….”
“이상하군.”
“네?”
제갈기호가 반문하는데 금화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가 소저라 하니 어쩐지 기분이 나쁘군. 그냥 여협이라고 부르게.”
그 말에 제갈기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하하.”
애써 웃음을 지으며 제갈기호는 말했다.
“여협께서 잘 모르시는가 본데 저는 제갈세가의…….”
“금 소저는.”
운현이 조용히 말했다.
“객옹 어르신께서 인정하실 정도의 고수입니다.”
제갈기호의 말문이 막혔다.
그는 객옹이 독선이라는 사실을 안다.
천하의 독선이 인정할 정도의 고수라니, 제갈기호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정말입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특히 검기의 빛이 아주 완연하더군요.”
제갈기호의 안색이 변했다.
검기의 빛이 완연할 정도라면 검기발현의 초입 정도가 아니라 더 높은, 적어도 가주급의 경지라는 의미다.
제갈기호가 감히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다.
“크흠.”
제갈기호는 헛기침을 하고는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동행하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금 여협.”
그의 태도 전환은 미련조차 없이 확실했다.
문득 예전 북해 때가 생각난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가자.”
객옹이 말했다.
그 말에 일행은 준비한 큰 마차에 올라탔다.
감찰어사 조관과 항장익 역시 마차에 올랐다.
이곳에 남은 금혜린과 일아영, 영호준, 그리고 행복한 표정의 담소하가 배웅하는 가운데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따각, 따각.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운 숙부!”
일아영은 멀어져 가는 마차를 향해 소리쳤다.
“여기가 숙부 집이란 걸 잊지 마시고요!”
힘차게 손을 젓는 일아영에게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운현의 가슴에 얹혀 있던 답답한 무언가가 사라진 건, 일아영의 환한 표정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운현 일행은 항주의 창룡맹 총단으로 향했다.
***
운현 일행은 동정호에서 배를 타고 장강을 따라 내려갔다.
큰 배를 처음 타 보는 듯 금화영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이, 이게 배란 말인가? 지, 집보다 큰 것 같은데?”
금화영은 조심스럽게 배에 올랐다.
그녀는 바닥이 흔들리는 것에 대단히 충격을 받았다.
보통 사람은 느끼지도 못할 정도의 요동조차 금화영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그것도 첫날 뿐, 다음 날이 되자 금화영은 가벼운 걸음으로 배 안을 돌아다녔다.
일렁이는 장강의 물결을 보며 살짝 겁을 먹은 듯도 했지만 그조차 하루를 지나지 않아 익숙해졌다.
다만 뱃전에 몸을 기대는 건 여전히 주저하는 듯했다.
촤아아.
운현은 부서지는 장강의 물살을 바라보았다.
하얀 물살이 햇빛 아래 아름답게 반짝였다.
“왜?”
운현의 표정이 어딘가 어두워 보인 탓일까?
문득 객옹이 물었다.
“조금 걱정이 되어서요.”
“……일대상인 말이냐?”
객옹의 말은 운현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네. 비록 그가 천하패령을 거둔 것처럼 말하긴 했지만…….”
물살을 내려다보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어쩐지 너무 조용한 것 같습니다.”
객옹은 잠시 침묵했다.
일대상인은 분명 천하패령이 자신의 미련이라고 했다.
실제로 문왕이 죽은 이후, 일대상인은 영웅맹이 무너지는 것을 방관했다.
그저 자신에게 무릎 꿇었던 염중부를 거두어 갔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대상인이 물러갔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일대상인은 더 심각하고 큰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바스락.
운현이 품에서 얄팍한 서찰 하나를 꺼냈다.
“그게 뭐냐?”
“북해일문의 대궁주가 전해 온 것입니다.”
그것은 일행이 배에 오르기 직전 찾아왔던 호암상단의 사람이 전한 서찰들 중 하나였다.
슥.
운현은 서찰을 객옹에게 건넸다.
“섬서성에서 암천무제가 움직이고 있는 듯합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바스락.
객옹이 서찰을 열어 보았다.
내용은 운현이 말한 그대로였다.
날카로운 느낌마저 들 정도로 정확하게 쓰인 필체가 마치 대궁주를 보는 듯했다.
“공교롭지 않습니까?”
운현이 객옹을 돌아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금 소저의 스승께서 계신다는 기련산이 바로 섬서성에 있으니 말입니다.”
금화영이 운현과 객옹에게만 밝힌, 그녀의 스승이 있는 곳은 바로 섬서성의 기련산이었다.
산이라고는 하나 수많은 산들이 이어져 산맥을 이루는 험한 곳이다.
“흐음.”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놈이 말한 인연이라 생각하는 것이냐?”
객옹이 말하는 ‘그놈’은 바로 일은이었다.
일은은 운현에게 ‘인연의 원은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글쎄요, 아직은 모르지요. 그저 우연일지도요.”
운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밝지 않았다.
우연이든, 인연이든 일대상인과 맞부딪혀야 한다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니 말이다.
“그럼 항주가 아니라 기련산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일은께서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한 발 물러서서 주위를 돌아보라고요.”
“쯧.”
객옹은 혀를 찼다.
운현이 일은의 말을 그렇게까지 되새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객옹 역시 그 말이 옳다 생각하는지라 딱히 불평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촤아아.
장강의 물살이 부서지며 소리를 냈다.
운현과 객옹, 조관과 항장익, 그리고 제갈기호와 금화영을 실은 채 커다란 배는 거침없이 장강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
남경에서 배를 내린 일행은 마차를 타고 항주로 향했다.
잘 정비된 관도 덕에 운현 일행은 곧 항주 창룡맹 총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총단 앞에 나와서 일행을 맞이한 사람은 진예림이었다.
그녀는 빙긋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정작 기대하던 총군사 영호준과 담소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어서 오세요, 맹주님. 그리고 어르신.”
마차에서 내리는 운현과 객옹을 향해 진예림은 차분하게 예를 표했다.
“조 어사대인도, 항 오라버니도 반가워요. 담소하는 왜 안 데려오셨나요? 제갈기호 님도, 처음 뵙는 소저도 환영하고요.”
진예림은 차례대로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제 옆에 계신 이분들은.”
마중 나온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진예림 옆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두 사람이 서 있었다.
한숨을 쉬고 진예림은 말했다.
“……제갈세가와 공손세가의 가주님들이세요.”
말하면서도 진예림은 믿을 수가 없었다.
제갈세가와 공손세가의 가주가 마중을 나오다니, 항주 중소 무관의 딸인 진예림에게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제갈기호의 표정은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맹주.”
계림에서 보았던 공손세가의 가주가 웃으며 말했다.
그는 객옹을 향해서도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어르신도 오랜만입니다.”
“얼마 되지도 않았다.”
객옹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고는 긴 수염을 기른 제갈세가의 가주, 군자검 제갈명에게 말했다.
“왜?”
군자검 제갈명은 그제야 문득 깨어난 듯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눈이 의심되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정사대전 당시 죽음의 대명사이던 그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다니, 이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아닙니다.”
제갈명은 천천히 예를 표했다.
“반갑습니다. 어르신.”
그저 고개를 끄덕인 것이 객옹이 한 대답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제갈명은 운현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오. 맹주.”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제갈명은 말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그것은 가슴 뛰는 비무를 눈앞에 둔 무인의 눈빛, 바로 그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