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호암상단의 총감찰
호남성 장사, 호암상단 본가.
호암상단의 총회합 둘째 날 아침에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본래 가벼운 조찬 자리였을 곳에서 장로회가 새로운 상단주를 전격적으로 추대한 것이다.
“호암상단의 장로들을 대표하여…….”
긴 수염을 기른 장로 이헌성은 단에 올라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른 장로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호암상단의 중직자들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따라 현 내정총관 이학붕을 호암상단의 상단주로 추대하는 바입니다.”
이헌성은 조용히 말을 맺었다.
대연회장이 조용해지고 사람들의 시선은 내정총관 이학붕에게 향했다.
이학붕은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으로 나갔다.
그는 담담히 자신이 호암상단에서 걸어온 길을 말했다.
“……제게는 참으로 과분한 직책입니다. 허나 호암상단이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만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감히 상단주의 중책을 맡도록 하겠습니다.”
대연회장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오오!”
“축하하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오.”
이학붕의 수락 연설에는 정작 자신을 추대한 장로회에 대한 감사의 말이 없었으나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상단주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학붕은 일일이 대연회장을 돌아다니며 귀빈들과 중직자들에게 인사를 했다.
몇몇 중직자나 귀빈 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강력한 경쟁자이던 이유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도, 장로회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연회장을 빠져나가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밤사이 무언가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비록 이유걸의 파문이라든가, 연회장을 나간 장로들이 안찰사사로 향했다는 것까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감사하오, 참으로 감사하오.”
새로운 상단주가 된 이학붕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경쟁자가 사라지고 견제할 장로회마저 없어진 지금, 호암상단은 이학붕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완전히는 아니었다.
인사를 나누고 단 위에 올라선 이학붕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부터 호암상단은 새로워질 것입니다. 단지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호암상단에 총감찰 직위를 신설합니다.”
“총감찰?”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이학붕은 이미 준비한 듯, 총감찰의 책무와 권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듣고 있던 중직자들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총감찰은 상단의 모든 부서들을 언제든지 감찰하고 상단주에게 직접 처분을 건의할 수 있는 파격적인 지위였다.
상단주의 신뢰만 있다면, 적어도 호암상단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였다.
“……이러한 총감찰의 직위에, 호암상단의 상단주로서 저는 일아영을 지명합니다.”
귀빈들은 수군거렸다.
일아영이라는 이름은 외부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박, 사박.
화려한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단상으로 걸어갔다.
젊고 활기찬 그녀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했다.
중직자들 중에서는 그녀가 예전 사무총관 이서연과 함께 있었던 것을 기억해 낸 사람들도 있었다.
“일아영입니다.”
단상에 선 일아영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
다른 중직자들에 비하면 확실히 젊었지만, 단호한 그녀의 눈빛은 총감찰에 더없이 어울렸다.
“새로운 호암상단을 위해, 전심전력을 다하겠습니다.”
짧은 인사를 마친 후 그녀는 가볍게 예를 표했다.
사람들은 일어서서 그녀에게 축하를 보냈다.
가장 먼저 축하를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새로운 상단주 이학붕이었다.
“잘 부탁하네.”
이학붕이 말했다.
의례적인 인사였지만 그 의미는 컸다.
일아영을 임명한 사람은 이학붕 자신이지만 그녀의 뒤에는 창룡맹 총군사, 그리고 맹주가 있으니까.
사실상 호암상단의 목줄을 쥔 사람들 말이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일아영이 가볍게 예를 표하며 말했다.
그녀의 눈빛은 상단주 이학붕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며칠 전, 총군사 영호준은 이미 그녀에게 호암상단의 총감찰 자리를 부탁했었기 때문이다.
“네? 제가요?”
“그렇습니다.”
총군사 영호준이 일아영에게 말했다.
“맹주님께서도 같은 생각이십니다. 아영 소저라면 잘 해낼 것이라고요.”
“하지만 저는 나이도 젊고…….”
“호암상단에 대해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영호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사무총관 이서연과 함께 있었으니 상단 업무가 어찌 흘러가는지 잘 알고 계시겠지요. 최근에는 다양한 보고서들도 읽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일아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상식적인 정도예요. 전문적으로는…….”
“그래서 좋은 겁니다.”
영호준이 말했다.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합니다. 관행이나 특수성을 내세워 비상식적인 일을 당연시한다면 그것이 어찌 옳겠습니까? 물론 적정한 선은 있겠습니다만, 이상한 걸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조직에는 반드시 필요하지요.”
웃음을 머금은 채 영호준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맹주님은 일아영 소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계시니까요. 사실 제 입장에선 이게 가장 핵심적이지만요.”
영호준의 미소는 그림처럼 멋졌다.
하지만 일아영의 눈빛은 더없이 진지해지고 있었다.
일아영은 영호준의 부탁 아닌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상단주 이학붕의 발표로 총감찰의 지위에 정식으로 임명된 것이다.
새로운 상단주의 발표로 대연회장의 분위기는 단번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상단주의 부재라는, 호암상단의 가장 큰 불확정 요소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중직자와 귀빈 들은 새로운 상단주와 총감찰에게 인사를 하고 향후의 일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호암상단에 새로운 거래를 제안하거나 사업을 논의하는 상단 관계자들도 있었다.
그렇게 호암상단의 총회합은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총회합이 열리고 있는 그 시간, 운현과 객옹은 호암상단의 본가를 떠나려 하고 있었다.
커다란 마차에는 이미 금혜린과 능화영이 타고 있었다.
금혜린의 표정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눈동자에 넘치는 생기는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을 배웅하는 사람은 총군사 영호준이었다.
아직 총회합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고생하셨습니다, 맹주님.”
“천만에요. 수고는 총군사님이 하셨지요.”
마차 앞에 선 운현이 영호준에게 말했다.
“아영 소저의 일은 잘 부탁합니다. 나중에 형님 댁에서 뵙지요.”
운현은 일단 금가장으로 갔다가 의형 일충현의 집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네, 맹주님.”
영호준이 가볍게 예를 표했다.
그때였다.
사박.
“맹주님.”
그녀는 바로 북해일문의 대궁주였다.
뒤에는 삼궁주와 빙혼, 그리고 빙설 역시 걸어오고 있었다.
운현은 살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나오실 줄은 몰랐는데, 감사합니다. 대궁주님.”
대궁주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운현은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저도요.”
대궁주는 짧게 말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운현을 쳐다보았다.
“다음에는 항주의 총단인가요?”
“네.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창룡맹의 총단 건설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다른 문파들의 요청도 있는 터라 주요 건물이 완성되는 대로 개파식 비슷한 것을 열 예정이었다.
“저도 갈 거예요!”
삼궁주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대궁주, 삼궁주와 차례로 예를 나눈 운현은 빙혼과 빙설에게도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객옹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이랴!”
따각, 따각.
운현이 탄 마차는 금방 멀어졌다.
그때까지 대궁주는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운현의 마차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금가장에 간 운현은 장주 부부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미 서찰을 통해 딸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던 장주 금사열과 그 부인은 눈물까지 흘렸다.
장주 금사열이 깊이 낙심한 이유는 사람들의 얄팍한 인심만이 아니라 딸의 비참한 운명 탓이기도 했다.
금혜린의 치유에 노년의 금사열은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 모습에 능화영도 덩달아 눈물을 흘렸고 운현마저 콧잔등이 시큰해질 정도였다.
능화영과 금가장에 대한 이야기는 천천히 나누기로 하고, 운현은 객옹과 함께 금가장을 떠났다.
이대로 보낼 수 없다며 장주가 만류했지만 금혜린의 안정을 핑계로 운현과 객옹은 악양 일충현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하지 않은 손님과 마주쳤다.
“모용 소저!”
운현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일충현의 부인과 이야기하던 모용미 역시 놀랐다.
그녀는 운현이 아직 호암상단 본가에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운 학사님!”
“오빠!”
모용미는 물론 모용상아도 있었다.
모용진은 호암상단 총회합에 남아 있었지만, 모용미는 일충현의 부인께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왔던 것이다.
일충현에 대해서는 이미 운현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운현은 모용미와 함께 잠시 후원을 거닐었다.
사박.
금혜린을 치료한 이야기를 들은 모용미는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말하던 모용미는 물끄러미 운현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쑥스러워진 운현이 말했다.
“아, 저기, 제가 한 것이 아니라 객옹 어르신께서…….”
“운 학사님은 참 좋은 분 같아요.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도, 모용진 오라버니도 운 학사님께 큰 도움을 얻었지요.”
모용세가가 운현에게 입은 은혜는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처음에는 모용미도 운현의 정체에 대해 경계했으나, 지금은 운현을 알게 된 것을 그 무엇보다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돕는다 해도 좋은 보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 세상이지요.”
모용미는 나지막이 말했다.
세상은 완벽하지 않아서 좋은 사람이 좋은 보답을 받는다는 보장은 없다.
“저는.”
사박.
모용미는 걸음을 멈췄다.
“운 학사님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신 것만큼요.”
그것은 아마도 모용미의 진심이리라.
운현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감사합니다.”
웃으며 운현은 말했다.
“모용 소저의 마음만으로도 이미 과분할 정도입니다.”
그 말에 모용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운현은 퍼뜩 깨닫고는 급히 말했다.
“아니, 저기 이상한 뜻은 아니고…….”
더듬거리며 운현이 말했다.
그 모습에 문득 모용미는 웃음을 흘렸다.
허둥거리는 운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멀게 느껴졌던 어제의 느낌도 사라져 버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여전히 예전 그대로의 ‘운 학사’였으니까.
사락.
바람에 고운 머리카락을 일렁이며 모용미는 미소 지었다.
그것은 참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
저벅, 저벅.
낮은 발소리에 일대상인은 눈을 떴다.
화려한 대전의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일대상인은 자신 앞에 다가오는 건장한 체격의 무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바로 암천무제였다.
스륵.
암천무제는 한쪽 무릎을 꿇고 일대상인에게 예를 표했다.
“지금 돌아왔습니다.”
건조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감숙성은 주군께서 명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음.”
낮은 목소리가 일대상인의 반응 전부였다.
잠시 암천무제를 내려다보던 일대상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나의 ‘진혼령’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암천무제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일대상인이 스스로의 결정에 대해 다른 사람의 뜻을 물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천하패령’을 내릴 때 그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았듯이 말이다.
슥.
암천무제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주군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그렇구나.”
크고 화려한 의자에 앉은 일대상인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스쳤다.
이 또한 일대상인이 운현을 만나고 난 이후 생긴 변화였다.
스륵.
일대상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우우욱.
그저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기세가 대전 안에 소용돌이쳤다.
“이제 곧 머지않았다.”
일대상인의 목소리가 대전 사방으로 웅웅거리듯 퍼져 나갔다.
암천무제를 내려다보며 일대상인이 말했다.
“지고의 좌(座)가 내 것이 되는 순간이.”
훅.
순간 일대상인의 눈동자가 빛을 뿜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정신을 잃고 쓰러질 듯 강렬한 시선이었지만 암천무제는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슥.
암천무제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