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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40화 (440/530)
  • 440화. 능화영의 부탁

    호암상단 본가, 귀빈 숙소.

    새벽에 일어난 운현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앞에 놓인 찻주전자에서 은은한 향이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찻잔은 포개 놓인 채였다.

    달칵.

    문이 열리고 객옹이 나왔다.

    금혜린이 누워 있는 방이었다.

    닫히는 문 틈으로 능화영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일어났냐?”

    운현을 발견한 객옹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금 소저는 어떻습니까?”

    “좋다.”

    객옹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운현 역시 당연하다는 듯 찻잔과 찻주전자를 챙겼다.

    “아, 잠깐.”

    문득 들린 능화영의 목소리에 운현이 고개를 돌렸다.

    “혹시 나가려는 건가?”

    능화영이 방에서 나오며 물었다.

    운현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산책 겸 해서 잠시 수련을 하려고 합니다.”

    “수련? 객옹 어르신이?”

    능화영은 단번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아닙니다. 제가 합니다.”

    “그래? 나도 가겠네.”

    거침없이 말하던 그녀가 멈칫했다.

    “아, 가도…… 되겠는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는 능화에게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네. 오시지요.”

    “고맙네.”

    능화영은 얼른 객옹을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운현은 빈 찻잔 하나를 더 챙긴 후 문을 나섰다.

    그러다 문득, 탁자 옆에 동경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슥.

    운현은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았다.

    무척이나 익숙했지만 꼼꼼히 살펴보니 어딘지 낯선 느낌도 들었다.

    ‘……뭐가 변한 거지?’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냐?”

    밖에서 객옹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니다.”

    운현은 얼른 밖으로 나섰다.

    혹시 찬바람이 들까 봐 운현은 꼼꼼히 문을 닫았다.

    숙소에는 잠든 금혜린과 일아영, 그리고 영호준까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그리 오래 걷지 않았다.

    바로 가까이에 정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귀빈들의 산책과 휴식을 위한 것이라 짐작되는 그곳에는, 사람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달칵.

    운현은 작은 정자에 차반(茶盤)을 놓았다.

    “어제 그 옷은 안 입나?”

    자리에 앉은 능화영이 운현에게 물었다.

    그녀가 말하는 건 운현이 잠깐 입었던 화려한 외투를 말하는 것이다.

    영호준이 준비해 온 그 새 옷은 자기 주장이 대단히 강해서 누가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아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좋다고 칭찬했지만 운현이 생각하기엔 너무 화려했다.

    요란하지 않은 건 마음에 들었지만 말이다.

    “평소에 입고 다닐 만한 건 아니라서요.”

    그렇게 말하며 운현은 객옹과 능화영의 잔에 차를 채웠다.

    또르르륵.

    “자네 차는?”

    능화영이 운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대답은 객옹이 했다.

    “나중에.”

    달칵.

    찻잔을 들며 객옹은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똑똑히 봐 두는 것이 좋을 게다.”

    객옹은 능화영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를 음미하며 말했다.

    능화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객옹과 운현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사락.

    북해의 검 미명을 손에 들고 운현은 정자를 나섰다.

    사박.

    새벽의 차가운 기운이 코끝을 간질이고 부드러운 바람이 풀잎을 스쳤다.

    운현은 발을 멈췄다.

    주변은 아직 어슴푸레했다.

    하지만 천천히 변해 가는 하늘빛은 아침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운현은 조용히 숨을 가다듬었다.

    웅.

    미명이 나지막이 소리를 냈다.

    운현은 천천히 검을 빼 들었다.

    아직 밝지 않은[未明] 하늘 아래 미명의 칼날이 부드러운 빛을 반짝였다.

    ***

    “후우.”

    운현은 가만히 숨을 내쉬며 미명을 거둬들였다.

    스릉.

    빛나던 미명의 칼날이 모습을 감추고, 운현은 잠시 여운을 느끼다가 몸을 돌렸다.

    사락.

    객옹은 담담히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그러나 능화영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 저벅.

    운현이 다가갔지만 능화영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괜찮습니까?”

    운현이 물었다.

    그제야 능화영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아니, 그, 나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던 능화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차 식는다.”

    객옹의 말에 운현과 능화영은 고개를 돌렸다.

    능화영은 털썩 자리에 앉더니 식어 버린 찻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운현은 찻주전자에서 자신의 차를 따랐다.

    또르르륵.

    차는 아직 따뜻했다.

    운현은 찻잔을 두 손으로 쥐고 향을 음미했다.

    그때 문득 능화영이 말했다.

    “자네가, 아니 귀하가……. 으, 뭐라 해야 하지?”

    운현이 창룡맹의 맹주라 하니 호칭이 헷갈린 모양이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운현이 말했다.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슥.

    능화영은 눈을 들어 운현을 쳐다보았다.

    “자네, 내게 부탁할 것이 있다고 했지?”

    이번에는 그녀의 시선이 헤매지 않았다.

    말투는 나이 든 사람 같지만 본래 젊은 여인인 능화영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네. 있습니다.”

    “무엇인가?”

    “조금 딴 이야기입니다만…….”

    운현은 찻주전자를 들어 능화영의 찻잔을 채웠다.

    또르륵.

    “능 여협께서는 금가장의 일이 해결되면 다시 돌아가실 예정입니까?”

    “아니.”

    능화영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우리 할망……, 아 고맙네.”

    운현이 건넨 찻잔을 쥔 능화영이 말을 이었다.

    “……스승께서는 내게 산을 아예 내려가라 하셨네. 한 가지 조건을 달아서 말이네.”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금가장에 은혜를 갚으라는 것인가요?”

    “아니네. 그건 다시 말하겠네만, 어쨌든 나는 산에 돌아갈 생각이 없네.”

    조금 의아했지만 운현은 말을 이었다.

    “만일 능 여협께 다른 계획이 없다면 금가장의 사람이 되시는 건 어떨까요?”

    “금가장의 사람?”

    “네.”

    달칵.

    찻잔을 놓으며 운현이 말했다.

    “금가장이 당면한 어려움을 넘겼다고는 하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로 가주께서 이미 연로하신데 금가장의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제넘은 말씀입니다만.”

    잠시 말을 멈췄던 운현이 말을 이었다.

    “능 여협께서 괜찮으시다면 장주님의 양녀가 되어 금가장을 이어 주십시오. 능 여협과 금 소저라면 금가장을 훌륭히 일으키실 수 있을 것입니다.”

    능화영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양녀라는 난데없는 말에도 능화영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물은 것은 다른 문제였다.

    “……그리하면 정말로 금가장을 일으킬 수 있겠나?”

    “당연하다.”

    객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금가장이 너를 얻으면 이곳 하남성의 강자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네 출신이나 사문에 대해 토를 달 자도 없을 것이고.”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출신과 사문은 여전히 중요했다.

    객옹이 말하자 능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하겠네.”

    그녀는 서슴없이 결정을 내렸다.

    운현이 오히려 당황했다.

    “저기, 양녀가 된다는 건…….”

    “상관없네.”

    능화영은 운현의 말을 끊었다.

    “나는 본래 고아일세. 장주님 부부를 부모님으로 모시는 거라면 오히려 내게 과분한 일이네. 금 아가씨가 동생이 된다니 더더욱 좋고.”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능화영이 주저하지 않은 건 그만큼 금가장의 분위기가 좋게 보였다는 뜻이리라.

    평소에도 금혜린을 ‘금 아가씨’라 부르며 애지중지했으니 말이다.

    “다행이군요. 그러면 제가 장주님께 조용히 여쭤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그런데…….”

    능화영이 주저하며 물었다.

    “그럼 자네는 우리 중에 누구와 혼인하게 되나?”

    객옹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운현도 마시던 차를 뿜을 뻔했다.

    “……네?”

    “그, 그러니까 금 아가씨와 내가 금가장 사람이 되면 자네가 누구를 택할 것인지……. 아, 혹시 둘 다?”

    “아닙니다.”

    운현은 얼른 답했다.

    그녀의 오해가 깊어지기 전에 제대로 알려 줘야 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걸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 하지만 장주께선 자네에게 금가장을 맡기고 싶다고 말씀하시던데…….”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금가장을 일으키실 분은 이제 능 여협과 금 소저입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하긴 창룡맹의 맹주는 할 일도 많겠지.”

    능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금가장도 사양하고, 나나 금 아가씨와 혼인도 안 할 거라면 자네에게 이득이 되는 건 아무것도 없지 않나?”

    혼인을 이득이라고 말하는 건 조금 이상했지만 운현은 따지지 못했다.

    괜히 혼인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서였다.

    “금가장은 이곳에 오랫동안 덕을 베풀어 온 무가였습니다.”

    사락.

    찻잔을 쥐며 운현은 말했다.

    “그런 곳이 사라지는 건 아쉬운 일이지요. 그러니 능 여협과 금 소저께서 금가장을 일으켜 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게는 충분합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제 의형의 집을 보살펴 주시면 더 좋고요.”

    “그건 내게 맡기게!”

    능화영은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운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능화영의 뺨이 살짝 붉어졌으나 그건 곧 사라졌다.

    “아쉽군.”

    찻잔을 들며 능화영이 말했다.

    “내 자네의 호위라도 자처할까 생각하고 있었거늘…….”

    차를 마시며 운현의 시선을 피하는 걸 보면 부끄러워하는 듯했다.

    아까 혼인 이야기는 당당하게 하더니 호위에 대해서는 또 쑥스러워한다.

    “저를 지켜 주시는 분은 이미 제 옆에 계십니다.”

    운현은 객옹을 돌아보았다.

    객옹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지만 능화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르신은 대체 언제 내게 한 수 가르쳐 줄 건가? 닳는 것도 아닐 텐데 어르신이 아주 속이 좁구먼. 우리 할망도…….”

    객옹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현은 놀랐다.

    천하의 객옹에게 속 좁다는 말을 하고도 멀쩡한 사람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보다 능 여협.”

    운현이 능화영의 말을 끊었다.

    “아까 능 여협의 스승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능화영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내 그 말을 할 참이었네.”

    운현을 돌아보며 능화영이 말했다.

    “자네, 나와 함께 내 스승을 만나 주지 않겠나?”

    “네?”

    자신도 모르게 운현은 반문했다.

    ‘설마 또 혼인 이야기 같은 건가?’ 하고 생각하는데 능화영의 말이 이어졌다.

    “내 스승이 내게 말했다네. 나 같은 실력을 가진 사람은 천하에 무수하고, 내가 한 수 배울 만한 사람도 아주 많다고 말일세. 그래서 어디 가서 함부로 까불지 말라고 하셨지.”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객옹조차 인정할 정도의 고수인 능화영에게 그렇게 말한 것은 제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스승의 마음일 것이다.

    실제로 강호 무림은 드러나지 않은 기인이사가 허다하고 말이다.

    “그러곤 이렇게 말하더군. 한 수 배울 만한 사람을 만나거든 절대로 쉽게 놓아주지 마라. 내가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하니 결코 혼자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그 말에 운현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더군다나 무의 길[武道]을 이끌어 주는 자가 없이 홀로 가기란 지극히 난망한 길이다.

    “하지만 만일 내가 한 수 배우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경지에 이른 자를 만나거든 즉시 돌아와 스승께 알리라고 했네. 이유도 알려 주지 않은 채로 말이네.”

    능화영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맹세컨대 나는 태어나 단 한 번도 자네와 같은 검을 본 적이 없네. 자네는 나를 검으로 경악케 만든 유일한 사람이야. 그러니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결연한 눈빛으로 능화영은 말했다.

    “부디 나와 함께 스승을 뵈러 가 줄 수 있겠나?”

    운현을 바라보는 능화영의 눈동자는 애절하기까지 했다.

    말로는 스승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지만, 능화영의 속마음이 어떤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그렇군요.”

    운현의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음으로 결정을 내린 운현은 객옹을 돌아보았다.

    객옹 역시 마찬가지 심정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능 여협의 스승께 저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함께 가도록 하지요.”

    능화영과 같은 고수를 길러 낸 스승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운현으로선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고, 고맙네!”

    능화영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말했다.

    “고마워.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오히려 저야말로…….”

    “우리 할망이 성격은 좀 못됐어도 착한 사람일세. 얼굴도 젊었을 땐 아주 예뻤다고 하고. 산에 오래 살아서 맛있는 약초도 아주 잘 안다네. 눈썰미도 좋아서…….”

    능화영은 자신의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운현은 그 모습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신의 엄마에 대해 자랑하는 것 같은 능화영의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운현은 조용히 찻잔을 들어올렸다.

    “한번은 말일세. 내가 뱀을 잡아 왔거든. 그랬더니 ‘꺅!’ 하면서 놀라는데 얼마나 귀엽던지…….”

    운현과 객옹은 느긋한 표정으로 차를 음미했다.

    이른 아침의 정원에는 능화영의 낭랑한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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