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439화 (439/530)

439화. 호암상단의 새로운 주인

호암상단의 장로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갑자기 북해일문의 대궁주가 장로회에 난입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그 정적은 곧 불쾌함과 분노로 변했다.

“이 무슨 무례인가!”

장로 이헌성이 긴 수염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감히 장로회에 난입이라니! 아무리 북해일문이라 하나 어찌 이리 방자히……!”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한 모양이군요.”

낭랑한 대궁주의 목소리가 이헌성의 말을 끊었다.

“표결을 시작하면 다 죽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그리도 이해가 안 되나요?”

저벅, 저벅.

북해일문의 무사 십여 명이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빙혼이 대궁주의 뒤에 서고, 다른 무사들은 출입구를 막아서며 장로들을 에워쌌다.

그들의 살벌한 눈빛에 장로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오? 문주.”

내정총관 이학붕이 나섰다.

“이렇게 갑자기 난입함은 무슨 연유며 왜 우리를 해하겠다 하시는 것이오?”

“참으로 어리석군요.”

대궁주의 눈빛은 서늘했다.

“감히 창룡맹의 맹주에게 있지도 않은 혐의를 씌우고 공공연히 원수를 갚겠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를 씻을 수 없는데…….”

사락.

장로들을 바라보며 대궁주는 말했다.

“그런 자에게 표결을 하여 호암상단의 상단주가 될 기회를 준다니, 이건 호암상단 전체가 창룡맹의 적이 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대궁주의 눈빛이 싸늘하게 번득였다.

“그러니 전부 죽일 수밖에.”

‘헉.’

이학붕은 대궁주가 자신들의 말을 모두 들었음을 알았다.

그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이유걸은 이를 악물고 대궁주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 장로 중 한 명이 말했다.

“감히 우리를 엿들었단 말이냐!”

그 장로는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신의를 다해 맞이했거늘 염탐을 하다니! 이러고도 너희 말을 사람들이 믿을 것…….”

슥.

대궁주는 그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빙혼에게 눈짓했다.

빙혼이 손짓하자 북해일문의 무사가 즉시 한 사람을 끌고 왔다.

털썩.

장로들 앞에 던져진 사람은 정신을 잃은 호암상단의 경비 무사였다.

“신의가 있었다면.”

대궁주가 조용히 말했다.

“당신들도 우리를 엿보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손님으로 맞이해 놓고 숙소에 염탐이나 보내다니, 총회합에 온 손님들이 이 일을 들으면 참으로 기뻐하겠네요.”

장로의 눈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 그럴 리가…….”

“그리고 이 모든 문제를 떠나서.”

대궁주는 장로의 말을 끊었다.

“당신들이 창룡맹 맹주에게 보복을 모의한 건 분명한 사실이지요.”

“말도 안 된다!”

장로 몇 명이 즉시 반발했다.

“대체 무슨 증거가 있다고 그런 말을…….”

“증거는 필요 없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순간 정적이 내려앉았다.

저벅, 저벅.

문사 차림의 한 청년이 천천히 걸어왔다.

사락.

북해일문의 문주와 빙혼이 옆으로 비켜서며 예를 표했다.

그 청년은 장로들 앞에 멈춰 섰다.

“내가 직접 들었으니까요.”

그는 바로 운현이었다.

운현은 이학붕과 이유걸, 그리고 장로들을 담담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다, 당신은 누구…….”

“제가 말씀드리지요.”

그 목소리는 총군사 영호준이었다.

어느새 뒤따라온 영호준은 운현에게 예를 표한 후 말했다.

“이분이 창룡맹의 맹주이신 창룡검주십니다.”

혼란과 당혹이 장로들의 얼굴에 번져 갔다.

어째서 창룡맹의 맹주가 이 자리에 나타나는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슥.

운현은 이유걸을 내려다보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이유걸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운현의 시선은 이유걸에게 머무르지 않았다.

운현은 장로들을 돌아보았다.

“혈공자 문왕은 염중부와 함께 무림맹을 무너뜨린 자입니다.”

담담한 표정으로 운현이 말했다.

“그 과정에서 이호암은 문왕을 도와 막대한 이득을 축적했고, 이서연은 저를 배신하고 제게 비수를 꽂았습니다.”

장로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호암상단이 혈공자 문왕의 거래로 천하삼대상단에 올라선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서연이 그런 짓까지 했다니, 장로들의 안색이 변한 것도 당연했다.

운현이 나지막이 물었다.

“그러니 내가 호암상단에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장로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운현의 말대로라면 그가 원한을 갚으려 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럴 리 없다!”

이유걸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증거를 대라! 우리가 어찌 네 말만을 듣고…….”

말하던 이유걸이 흠칫했다.

운현이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분노도 원한 어린 시선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내려다볼 뿐인 그 시선만으로, 이유걸은 등에 한기가 내달리는 것을 느꼈다.

“나, 나는……!”

이유걸이 더듬거리며 무언가 말하려 할 때였다.

퍽.

두터운 칼집이 이유걸을 후려쳤다.

장로들이 깜짝 놀라는 것과 동시에 이유걸은 입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커헉.”

“당장 이자를 끌고 가라!”

낯선 목소리에 장로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바로 관복을 입고 수춘도를 찬 감찰어사 조관이었다.

타닥.

어느새 관병 몇이 들어와 쓰러진 이유걸을 끌고 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장로들이 내다보니 바깥에 횃불이 환하다.

관병이 출동한 것이다.

“당장 이들을 투옥해야 합니다.”

감찰어사 조관이 운현에게 말했다.

“이들은 혈공자와 모종의 연관이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감히 조정의 특별 감찰어사이신 대인을 해하려 모의한 자들에게 어찌 관용을 베풀겠습니까? 그 죄를 낱낱이 파헤쳐 극형으로 다스림이 마땅합니다.”

조관의 서슬 퍼런 눈빛은 장로들을 사색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평생 상인으로 살아온 장로들에게 관복을 입은 감찰어사는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조관의 등장이 만들어 낸 변화는 확연했다.

“우, 우리는 죄가 없소!”

한 장로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은 저 이유걸이 한 말이외다!”

그 장로는 바로 이용홍이었다.

이유걸을 편들던 그가 태도를 바꿔 이유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있는 것이다.

“혈공자를 언급한 것도, 큰손과 접촉하겠다는 것도, 창룡맹주를 언급한 것도 모두 이유걸이 한 말이오!”

“으음, 그 모두가 이유걸의 소행이라니 믿기 힘들군요.”

총군사 영호준이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에게 호암상단의 주인이 될 기회를 주려던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 아닙니까?”

장로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그들은 이유걸을 상단주에 앉히려 하지 않았던가?

“그, 그렇지 않소이다. 이것은 본가의 관행으로서…….”

“무엄하다!”

조관이 소리를 쳤다.

“감히 관행이라는 말로 황법을 피해 가려느냐!”

이용홍의 안색은 새파랗다 못해 아예 사색이 되었다.

그때였다.

“맹주님!”

내정총관 이학붕이 운현의 발 앞에 엎드렸다.

“이분들은 연로하여 단지 힘없는 노인일 뿐입니다! 장로회라 하나 이미 오래전에 물러난지라 아무런 권한도 없고, 혈공자에 대해서도 그저 지나는 말로 들었을 뿐이니 어찌 그런 끔찍한 일에 연루될 수 있겠습니까?”

장로들은 놀란 눈으로 이학붕을 바라보았다.

설마 이학붕이 자신들을 위해 나서리라곤 생각도 못 한 것이다.

이학붕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다만 상단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황망한 중에 입에 담지 못할 실언을 하였으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쿵, 쿵.

그는 바닥에 자신의 이마를 찧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멈추십시오.”

이학붕이 즉시 움직임을 멈췄다.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장로들을 바라보았다.

“장로회가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물론입니다.”

장로 중 가장 나이 많은 이헌성이 말했다.

“장로회는 명목상의 기관일 뿐, 실제적인 권한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그렇습니다.”

다른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표결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건…….”

이헌성의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을때였다.

“그건 장로회의 해체를 결정하려던 것이었습니다!”

이학붕이 외치듯 말했다.

이헌성은 물론 다른 장로들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그러나 이학붕은 조금 전 들은 ‘전음’을 되새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호암상단과 이학붕이 살길은 그 ‘전음’을 따르는 것뿐이었다.

“장로회가 상단주를 결정한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문주! 그렇지 않소?”

이학붕이 대궁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대궁주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은 없었군요.”

장로들은 ‘이학붕과 이유걸의 뜻을 들었으니 이제 우리가 어찌해야겠는가’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무엇에 대해 표결하는지 명시적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이학붕의 표정이 마치 생명줄이라도 잡은 듯 밝아졌다.

“장로회는 즉시 해체할 것입니다! 상단의 일에 두 번 다시 나서지 못할 터이니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맹주님.”

다급한 마음에 통촉해 달라는 말까지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쿵.

이학붕은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장로들의 얼굴은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서 이학붕의 말을 부인했다가는 꼼짝없이 죄를 덮어쓸 판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운현이 장로들에게 물었다.

장로 이헌성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렇습니다. 장로회는……, 오늘 이 시간으로 해체할 것입니다.”

이헌성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운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러면 나는 누구에게 호암상단의 잘못을 따져야 합니까?”

그 순간 장로들의 시선은 모두 이학붕을 향했다.

이학붕은 이를 악물고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장로들께서는 제가 상단주의 직을 맡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이미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책임은 모두 제가 지겠습니다.”

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학붕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유걸은 죄를 물어 가문에서 파문할 것이며, 이 일에 연관된 자는 즉시 상단에서 쫓아내고 응분의 처벌을 받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제게 모든 잘못을 물어 주십시오!”

침묵이 흘렀다.

장로들은 운현의 입만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운현은 눈을 들었다.

“여러분은.”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이 장로들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까지 스스로 안찰사로 출두하여 조사를 받으십시오. 만일 한 사람이라도 빠진다면 여러분 모두에게 책임을 묻겠습니다.”

장로들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이 영호준에게 말했다.

“총군사님.”

“네, 맹주님.”

영호준이 즉시 예를 표하며 답했다.

“이후의 일은 총군사님께서 처리하시되 어사대인, 그리고 호암상단의 새로운 상단주님과 긴밀히 협의하시기 바랍니다.”

그건 호암상단의 새로운 상단주가 이학붕임을 선언하는 말과도 같았다.

영호준은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학붕이 외쳤다.

“감사합니다! 맹주님!”

그의 외침은 아마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운현은 더 이상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저벅, 저벅.

얼마나 걸었을까?

관병의 횃불도 보이지 않게 되자 운현은 발을 멈췄다.

“기쁘지 않은가요?”

낭랑한 목소리는 대궁주였다.

그녀가 운현을 뒤따라온 것이다.

“천하삼대상단중 하나인 호암상단을 손에 쥐셨잖아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저 애매히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없기를 원했을 뿐입니다. 상단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죄가 없으니까요.”

대궁주는 희미하게 웃었다.

운현은 그녀에게 예를 표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궁주님.”

대궁주는 공손한 예로 답했다.

“천만에요. 푸른 늑대를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이지요. 게다가 제가 한 일은 거의 없으니까요.”

북해일문의 설영대에게 장로회를 주시하도록 부탁하고, 감찰어사 조관과 관병을 불러왔으며, 이학붕에게 전음으로 살길을 알려 준 사람은 모두 영호준이었다.

어찌 보면 호암상단이 영호준 한 사람의 손에 놀아난 셈이다.

“그래도 대궁주께서…….”

“……조금 변했네요.”

문득 대궁주가 말했다.

그녀는 운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가 마치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아요.”

희미하게 웃으며 대궁주는 말했다.

사락.

그녀는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또 봐요.”

“아…….”

운현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대궁주는 몸을 돌렸다.

사박, 사박.

조용히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올려다본 밤하늘은 언제나처럼 달이 밝았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