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화. 천하제일상단
금혜린의 치료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일아영은 의자에 앉아 기다렸고 영호준 역시 그녀의 맞은편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능화영은 방문 앞에 버티고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후우.’
일아영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오후의 햇살이 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총회합이 오전에 시작한 것을 생각하면 반나절이 지난 셈이다.
능화영은 내내 움직이지 않았고 영호준도 가끔 부채를 저은 것이 전부였다.
일아영이 초조한 마음에 살짝 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슥.
능화영이 흠칫하고 영호준이 눈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방문이 열렸다.
덜컹.
나타난 사람은 객옹이었다.
그는 여느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되었다.”
“그, 금 아가씨는?”
능화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할 것 없다. 들어가 보거라.”
미동도 않던 능화영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즉시 방 안으로 들어섰다.
탁.
능화영이 막 들어설 때 운현은 금혜린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있었다.
사락.
금혜린은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능화영은 즉시 침상으로 다가갔다.
“어, 어떤가?”
“이제 괜찮습니다.”
운현이 금혜린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금혜린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지만 능화영은 여전히 불안했다.
“저기, 의식은…….”
“잠이 든 것뿐입니다. 푹 쉬게 하십시오.”
능화영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금혜린의 숨소리도 고르고 안색도 이전보다 한결 나아 보였다.
“……고맙네.”
능화영의 말에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는 어르신께 하시지요.”
“당연히 그리해야지. 허나 자네가 아니었다면 금 아가씨는…….”
능화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밖에 서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사실상 운현이 금혜린의 생명을 구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고하셨어요, 운 숙부.”
어느새 다가온 일아영이 운현에게 깨끗한 천을 건넸다.
운현은 가볍게 땀을 닦았다.
“좀 쉬세요. 옆방에 차를 준비해 두었어요. 어르신도 그곳에 계셔요.”
“고마워.”
미소를 지으며 말한 운현은 잠들어 있는 금혜린을 한번 돌아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고생하셨습니다. 맹주님.”
기다리고 있던 영호준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생은요. 아, 그리고 그 이유걸이라는 자는…….”
“이미 알아보는 중입니다.”
영호준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늘 밤이면 모든 것이 끝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옆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자리에 앉은 객옹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운현은 객옹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다.
부드러운 차향이 운현을 포근하게 감싸 주는 듯했다.
***
호암상단 본가.
총회합의 첫날이 끝나고 밤이 깊었지만 본가의 깊숙한 곳에서는 장로회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홉 장로들의 표정은 모두 굳어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전 상단주 이호암이 살아 있을 때는 명목상의 기관이던 장로회가 호암상단의 주인을 정하는 실세로 떠오르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내정총관 이학붕과 이호암의 아들 이유걸 역시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오늘 밤이 지나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호암상단의 새로운 주인이 될 테니까 말이다.
“수고했네. 학붕.”
긴 수염을 늘어뜨린 장로 이헌성이 말했다.
그의 좌우로 여덟 명의 다른 장로들이 이학붕과 이유걸을 둘러싸듯 앉아 있었다.
내정총관 이학붕은 공손히 예를 표했다.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어르신들의 도움 덕분이지요.”
“아니지, 아니야. 호암과 서연을 잃은 상황에서 무사히 총회합을 치를 수 있었던 건 모두 자네의 공일세.”
이헌성의 말에 다른 장로들은 짐짓 숙연한 듯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이호암을 잃은 것은 호암상단에 엄청난 타격이지만 그로 인해 장로회가 실권을 틀어쥘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유걸이 무사해서 천만다행일세.”
장로 이용홍이 문득 말했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이용홍은 짧은 수염을 매만지며 말했다.
“만일 유걸마저 잃었다면 호암상단은 그 명맥을 유지하지 못했을 테니까.”
과거 천하삼대상단에 손꼽히던 문중상단은 본가가 불타고 대를 이을 아들이 죽으며 사분오열되고 말았다.
죽은 이호암의 아들인 이유걸이 남아 있다는 건, 적어도 이들 장로들에겐 큰 위안이 아닐 수 없었다.
“자, 그럼.”
처음 말을 꺼냈던 장로 이헌성이 다른 장로들을 돌아보았다.
“상황은 다들 알고 있을 테니 길게 말하지 않겠네. 학붕이 상단주의 직을 맡고, 유걸이 학붕의 뒤를 잇는 것이 어떻겠나?”
이학붕은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이유걸의 얼굴은 구겨졌다.
언뜻 들어서는 합리적인 것 같지만 상단주의 자리에 오른 이학붕이 순순히 이유걸에게 자리를 넘겨줄 리 없었다.
이학붕이 얼마나 오래 상단주의 자리에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데다가, 상단주의 막강한 권한을 이용하면 이유걸 따윈 순식간에 매장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유걸이 구겨진 표정으로 말했다.
장로들의 눈살이 일제히 일그러졌지만 이유걸은 말을 이었다.
“내정총관께서 선친의 부재를 훌륭히 감당하셨음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내정총관께서 상단주가 되시면 호암상단은 두 가지를 잃게 됩니다.”
“두 가지라고?”
날카로운 눈매의 장로 이용홍이 물었다.
이유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암상단을 천하삼대상단으로 발돋움하게 한 혈공자 문왕의 큰손을 잃음이 첫 번째요, 선친을 해한 창룡검주에게 원한을 갚지 못함이 두 번째입니다. 아니, 원한을 갚지 못하는 것만 아니라…….”
으득.
이를 갈며 이유걸은 말했다.
“그자의 개 노릇이나 하게 되겠지요.”
장로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창룡검주가 호암을 해하였다고?”
“혈공자 문왕은 이미 죽지 않았나?”
웅성거리는 장로들 사이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혈공자 문왕이 죽었다고 그의 돈이 다 사라졌겠나?”
날카로운 눈매의 장로 이용홍은 조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아는 사람도 있겠으나 진짜 큰손은 따로 있네. 영웅맹을 부리던 이도 그 큰손이었고, 암천무제 역시 그의 하수인일 뿐이지.”
장로들은 침묵했다.
이용홍이 말하는 ‘큰손’의 존재에 대한 것은 그들도 이미 생각하던 바였다.
혈공자 문왕과 영웅맹 그리고 암천무제가 서로 관계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져 있으니, 그들에게 배후가 있음을 짐작하는 것도 억측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혈공자 문왕이 죽음으로써 그와 하던 거래가 모두 끊어졌다는 것에 있었다.
“……그, 그럼 혈공자 문왕의 배후와 접촉할 방법은 있나?”
누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혈공자 문왕의 배후와 연결될 수만 있다면 거래 중단으로 인한 막대한 손해를 회복함은 물론, 또 다른 큰 거래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었다.
“안 됩니다!”
내정총관 이학붕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창룡맹을 적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이 일이 창룡맹에 알려졌다가는…….”
“이래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유걸이 비웃음을 지으며 이학붕의 말을 끊었다.
“상단의 주인이 되겠다는 자가 창룡맹의 충실한 주구 노릇을 할 생각밖에 없으니 어찌 호암상단이 커 나갈 수 있겠습니까?”
이학붕은 와락 인상을 썼다.
“네가 상황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지금 창룡맹을 적대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상단이 있을 줄 아느냐! 저 거만하던 마운상단이 사무총관을 보낸 것이 정녕 우리에게 예를 표하려 그런 것이라 생각하느냔 말이다!”
답답한 마음에 이학붕이 소리를 쳤다.
그러나 이유걸의 조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내정총관께서는 무척이나 안목이 좁으시군요.”
이유걸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누가 창룡맹을 적대한다고 했습니까? 겉으로는 창룡맹과 가까이 지내되, 은밀히 혈공자 문왕의 큰손과 거래를 재개한다면 다른 상단보다 큰 이득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충분한 힘을 갖게 되면.”
아득.
이유걸이 이를 악물었다.
“그때는 선친의 죽음에 대한 진실도 밝혀낼 수 있겠지요.”
이학붕은 어이가 없었다.
말로는 진실이라지만 이미 이유걸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유걸아! 창룡맹이 그리 만만한 줄 아느냐? 그들의 이목을 숨기고 혈공자의 배후와 손을 잡는다고? 세상이 네 뜻대로 놀아나리라 생각하면 이는 큰 착각이니라!”
외치던 이학붕은 장로들에게 말했다.
“어르신들! 이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산 창룡맹과 죽은 혈공자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니요! 애초에 비교 대상조차 되지 않을뿐더러 자칫 이 일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이학붕은 차마 ‘멸문’이라는 말을 뱉지 못했다.
이유걸은 조소를 흘렸다.
“왜요? 호암상단이 망할 것 같습니까? 문중상단처럼요?”
비웃던 이유걸이 장로들에게 말했다.
“보셨습니까? 이것이 제가 말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이런 자가 어찌 선친의 원한을 풀 수 있겠습니까?”
장로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내정총관 이학붕이 확실하게 창룡맹의 줄을 타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대연회장에서 이학붕이 창룡맹 총군사에게 보여 준 호의를 모두가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장로들도 당연하다 여겼다.
그러나 이유걸의 말을 들은 지금은, 이학붕이 지나치게 한쪽에만 몰려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호암의 죽음에 얽힌 진실이야 때가 되면 밝혀질 것이네만.”
날카로운 눈매의 장로, 이용홍이 말했다.
아까부터 그는 이유걸의 편을 들고 있었다.
“다른 상단들과 경쟁하려면 창룡맹만으로는 부족하지 않겠나? 우리가 천하제일상단의 자리에 오르려면 말일세.”
장로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천하제일상단.’
천하제일상단은 그저 제일 큰 상단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다.
천하의 모든 부와 거래를 독점하고, 그저 이름을 걸어 두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는 자리.
풍년이 들면 돈을 벌고 흉년이 들면 더더욱 큰돈을 버는, 그 어느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대한 황금의 성.
그것이 바로 천하제일상단의 의미였다.
그러므로 지금은 천하삼대상단 중 그 누구도 진정한 천하제일이라 할 수 없었다.
상대를 죽이기 전에는 말이다.
장로 이헌성이 긴 수염을 쓰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크흠, 두 사람의 뜻은 잘 알겠네.”
“안 됩니다! 어르신! 지금 상황에서는…….”
“조용히 하게!”
이헌성은 눈살을 찌푸리며 이학붕에게 말했다.
“우리에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
‘허어어.’
이학붕은 속으로 탄식했다.
중도적인 이헌성마저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면 이미 장로들 대부분이 이유걸의 말에 넘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천하제일상단’이라는 그 달콤한 울림에 말이다.
이헌성은 장로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학붕과 유걸의 말이 이러하니 우리가 어찌해야겠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표결을 합시다. 우리가 정한 방식대로.”
누군가 다른 장로가 말했다.
이유걸을 편들던 이용홍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헌성도 나지막이 한숨을 흘렸다.
“알았소. 그러면 표결을…….”
덜컹.
“멈춰요.”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장로들은 일제히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돌렸다.
다른 곳도 아닌 호암상단의 장로회에 난입이라니, 제정신으로 할 짓이 아니었다.
이곳을 호위하던 무사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화를 내려던 순간, 장로들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오오.”
누군가 탄식을 흘렸다.
사박, 사박.
마치 눈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장로들조차 단번에 시선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답고 기품이 넘치는 그 여인은 바로 낮에 보았던 북해일문의 문주였다.
사박.
“이대로 당신들이 표결을 시작한다면.”
멈춰 선 북해일문의 문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로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마치 얼음처럼 싸늘했다.
“전부 다 죽여야 하니까.”
대궁주의 붉은 입술이 살벌하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