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7화. 길을 보는 자
금혜린의 몸이 옆으로 기우는 순간 운현은 즉시 손을 뻗었다.
사락.
금혜린은 운현의 팔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운현은 금혜린을 두 팔로 안아 들며 굳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르신.”
“오냐.”
객옹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운현은 금혜린을 안아 든 채 밖으로 나갔다.
능화영과 영호준, 일아영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덜컹.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운현을 뒤따랐다.
“무슨 일이야?”
“왜 그러지?”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몇몇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놀랄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사락.
북해일문의 문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운현 일행을 향해 몸을 돌렸다.
덜컹.
모용세가의 모용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주저 없이 운현 일행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북해의 삼궁주와 빙설, 빙혼이 일어나고 모용세가의 모용진과 남궁세가의 남궁비연, 제갈세가의 제갈기호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용상아까지 의자에서 폴짝 내려섰다.
“어…….”
앞에서 연설하던 이학붕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상석에 있던 귀빈들이 우르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당혹스러운 순간이었지만 이학붕의 대응은 노련했다.
“그러면 잠시 휴식을 갖도록 할까요?”
웃으면서 말한 이학붕은 실무자인 문사에게 재촉하듯 인상을 썼다.
문사는 잠시 당황했지만 곧 대기하던 하인들과 악사들을 들여보냈다.
소란스러워지는 연회장을 뒤로하고 이학붕은 빠른 걸음으로 연회장 바깥으로 향했다.
다른 귀빈도 문제지만 창룡맹 총군사가 어째서 갑자기 연회장을 나갔는지 반드시 알아야 했다.
운현은 금혜린을 안은 채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고, 공자님.”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숙였다.
창백한 얼굴의 금혜린이 무언가 말하려 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금 소저. 곧 어르신께서…….”
“……이, 이유걸을 조심, 하세요.”
운현의 표정이 굳었다.
금혜린은 숨을 가늘게 내쉬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는, 공자께 악의를…….”
“……어째서 능력을 쓰셨습니까?”
애써 억누른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운현의 눈빛은 분명히 화를 내고 있었다.
금혜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도 본래 능력을 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운현 일행을 향한 이유걸의 눈빛은 금혜린이 본 그 누구보다 더 노골적인 악의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 정도, 뿐이라서…….”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운현은 이를 악물었다.
슥.
어느새 다가온 객옹이 금혜린의 맥을 살폈다.
“감정이 격해진 데다 능력을 써서 기혈이 크게 충격을 받았다. 지금 당장 손을 써야 해.”
“저희 마차로 가요.”
문득 들려온 대궁주의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일단 환자를 눕힐 수 있을 거예요.”
대궁주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모용미와 남궁비연, 제갈기호 그리고 북해일문과 모용세가 일행들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운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차는 좋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운현이 무언가 말하려던 때였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헐레벌떡 뛰어온 이학붕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슥.
영호준이 그를 가로막듯 섰다.
“금 소저가 몸이 불편한 듯합니다. 잠시 쉴 곳이 있겠습니까?”
이학붕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빈들을 위한 숙소가 비어 있습니다. 얼마든지 쓰셔도 됩니다.”
그는 일아영을 향해 말했다.
“자네가 안내해 드리게. 내가 가고 싶지만 총회합 중이라…….”
“네, 그렇게 하지요.”
일아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운현에게 말했다.
“이쪽이에요.”
“저기, 내가…….”
능화영의 요청을 무시하고 운현은 금혜린을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객옹이 굳은 표정으로 운현을 뒤따르고, 대궁주와 모용미도 막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잠시만요.”
영호준이 말했다.
“사람이 많으면 어르신께서 좋아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 말에 대궁주가 멈칫했다.
모용미와 남궁비연도 마찬가지였다.
제갈기호는 아예 뒤로 한 걸음 물러서기까지 했다.
영호준은 정중하게 말했다.
“이후의 상황은 제가 반드시 알려드릴 테니, 지금은 연회장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어떨까요?”
대궁주는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용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네요.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서 그만……. 그럼 뒷일을 잘 부탁드려요.”
모용미는 영호준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동생 모용상아의 손을 잡고는 빙긋 웃었다.
“돌아갈까?”
“응.”
모용상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이 사라진 곳을 잠시 바라보던 모용미는 모용상아와 함께 연회장으로 향했다.
모용진 역시 영호준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동생들을 뒤따랐다.
제갈기호와 남궁비연도 영호준에게 예를 표했다.
“그럼 저도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도요.”
그들이 연회장으로 향하자 영호준은 이학붕을 향해 몸을 돌렸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호준이 정중하게 예를 표하니 이학붕은 오히려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할 따름입니다. 호암상단에서 이런 일을…….”
“혹시나 해서 말인데 약재를 구할 수 있습니까? 물론 비용은 정확히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약재라면 마침 비축해 놓은 것이 많습니다. 걱정 마시고 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총회합 중인데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아, 네.”
이학붕은 영호준에게 예를 표하고는 대연회장으로 돌아갔다.
난데없는 일이 벌어진 셈이었지만 이학붕의 표정은 밝았다.
창룡맹 총군사에게 감사를 두 번이나 받았으니 말이다.
슥.
영호준은 고개를 돌렸다.
대궁주는 아직도 운현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몸을 돌려야 했다.
사박.
“문주님.”
영호준의 목소리가 대궁주를 붙잡았다.
멈춰 선 대궁주는 영호준을 향한 불편한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영호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문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대궁주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어떤 도움을 말인가요?”
“문주님께는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맹주님께는 아주 중요하지요. 이 난리를 만든 장본인에 관한 일이니까요.”
영호준은 금혜린이 운현에게 한 말을 똑똑히 들었다.
“훗.”
영호준을 바라보던 대궁주가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어쩌면 비웃음 같기도 했지만 그것이 승낙의 의미라는 것을 영호준은 알 수 있었다.
“좋아요. 뭐죠?”
대궁주의 눈빛은 어느새 싸늘한 냉기마저 감돌고 있었다.
***
“여기예요.”
덜컹.
앞서 걸어가던 일아영이 고풍스러운 건물의 문을 열었다.
운현은 금혜린을 안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이학붕이 말한 숙소는 생각보다 컸다.
방도 셋이나 되었고 차나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곳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총회합에 온 귀빈들을 생각하면 비어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일아영이 제일 큰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운현은 방으로 들어가 커다란 침상에 금혜린을 눕혔다.
사락.
그사이, 객옹과 능화영이 안으로 들어왔다.
일아영은 객옹에게 물었다.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나요?”
“뜨거운 물, 그리고 깨끗한 천을 가져와라.”
“네.”
고개를 끄덕인 일아영은 즉시 밖으로 나갔다.
“내, 내게는 시킬 일이 없는가?”
능화영이 안절부절 못하며 말했다.
“너는.”
슥.
객옹이 방구석에 있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조용히 앉아 있어라.”
“그, 그래. 알았네.”
능화영은 한달음에 방구석으로 갔다.
그녀는 객옹이 가리킨 의자에 앉아 몸을 세우고 무릎에 두 손을 가지런히 놓았다.
그 모습이 마치 서당에 처음 온 어린아이 같았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스륵, 슥.
객옹은 금혜린의 옷을 풀어 느슨하게 했다.
그리고 몇 곳의 혈도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떻습니까?”
운현이 조용히 물었다.
귀를 쫑긋 세운 능화영의 시선이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로 느껴졌다.
“아무래도 지금 시작해야겠다.”
“의식을 회복한 후에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어차피 마찬가지다. 평소 약도 꾸준히 복용한 것 같고.”
방구석에 앉아 있던 능화영이 얼른 말했다.
“금 아가씨는 계속 탕약을 먹어왔다네. 의원이 실력이 좋아서…….”
객옹이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능화영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객옹은 운현에게 말했다.
“아령이를 치료한 때를 기억하느냐?”
수군도독 진림의 딸이자 절맥증을 앓던 진아령을 운현이 모를 리 없었다.
“네.”
“내가 보라고 한 것도?”
그때 객옹은 진아령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분명히 보아두라고 말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좋다.”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아이의 절맥은 그보다 더욱 심각한 상태다. 주요 대맥이 막혔을 뿐만 아니라 아예 끊어져 있는 곳도 있다. 이를 치료한다는 것은 마치 억지로 길을 만드는 것과 같아서 막대한 공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큰 충격이 뒤따른다.”
굳은 표정으로 객옹은 말을 이었다.
“심지어 고수들조차 대맥을 뚫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걸리니, 이 아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무엇이라고? 그럼……!”
능화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객옹의 말은 금혜린이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능화영은 얼른 앉아야만 했다.
객옹이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았기 때문이다.
슥.
능화영이 조용히 앉자 객옹이 운현을 돌아보았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내가 알려 주마. 허나 막힌 길을 뚫는 것도, 끊어진 길을 잇는 것도 네가 해야 한다.”
기혼단에 중독된 이들을 치료할 때 운현은 독기의 중심을 꿰뚫어 보고 흩어 버렸다.
하지만 끊어진 길을 잇는다는 건 해 본 적도 없다.
게다가 조금만 잘못하면 쇠약해진 금혜린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객옹이 말했다.
그는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너는 내 천향접의 길을 본 심안의 소유자가 아니더냐? 너라면 반드시 할 수 있다.”
운현이라면 금혜린의 기맥이 마땅히 흘러야 할 길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객옹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군요.”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이 답했다.
그 눈동자에 염려나 주저함은 더 이상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래. 그래야 너지.”
그때였다.
“가져왔어요!”
밖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일아영이 뜨거운 물과 깨끗한 천을 한 아름 가지고 왔다.
능화영은 얼른 일어나 도우려다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일아영이 객옹에게 물었다.
“더 필요하신 것이 있나요?”
“이제부터 치료를 시작할 것이다.”
객옹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누구도 방해하게 해선 안 된다. 알겠느냐?”
“네, 알겠어요. 어르신.”
일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슥.
객옹은 고개를 돌려 능화영을 보았다.
“나가서 이곳을 지켜라. 그 누구도 범접치 못하게 하되, 내가 되었다고 할 때까지 결코 방심해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알았네.”
능화영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일아영과 함께 방을 나갔다.
“그, 저기…….”
나가던 능화영이 멈춰 섰다.
그녀는 시선을 맞추지 못하면서도 운현에게 말했다.
“고맙네. 자네가 있어서 참으로 다행일세.”
“천만에요.”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능화영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혔다.
객옹은 손가락 둘을 모아 검결지를 취했다.
후웅.
그의 손끝에서 창백한 붉은빛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마치 불꽃 같은 형태를 갖춘 그것은 바로 유형화된 독기공이었다.
이전보다 더욱 완숙해진 객옹의 독기공을 보며 운현도 가만히 숨을 골랐다.
아니 어쩌면 그럴 필요조차도 없었는지 모른다.
후우욱.
거대한 흐름이 기다렸다는 듯 운현을 감싸 안았다.
눈앞에서 명멸하며 흐르는 수많은 빛의 흐름들.
그 앞에 선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