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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36화 (436/530)
  • 436화. 운현의 부탁

    금혜린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다른 귀빈들의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침묵을 지키던 금혜린이 조용히 말했다.

    “……역시 공자께는 아무것도 감출 수가 없네요.”

    금혜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아셨던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운현은 조용히 답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소저가 능 여협께 마두의 움직임을 경고하셨던 일입니다. 객옹 어르신보다 먼저 알아차린다는 건 우연이라도 있을 수 없으니까요.”

    차를 음미한 운현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첫 만남 때 소저의 반응도 마음에 걸리더군요. 그때도 소저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었지요.”

    “저도 설마 정신까지 잃을 줄은 몰랐어요. 아마도 제가 그만큼 약해져 있었다는 뜻이겠지요.”

    씁쓸한 미소를 짓던 금혜린이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맞아요. 저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어요. 아니, 볼 수 있다고 해야겠네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요.”

    금혜린은 나지막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에게는 사람들의 마음이 보였다.

    따뜻하고 밝은 양친의 마음도, 그리고 가끔 보이는 새카맣고 섬뜩한 마음을 가진 이들도 말이다.

    하지만 그 힘은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날, 그리고 자신의 병증에 대해 알게 된 그날, 눈물 흘리던 양친의 아픈 마음을 본 금혜린은 두 번 다시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 덕분일까? 비록 병약했지만 금혜린은 무사히 성년이 되었다.

    그러나 무너져 가는 금가장을 보고 금혜린은 결심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사랑하는 부모님과 가문을 위해 사용하기로 말이다.

    “그래서 알 수 있었어요. 전대의 은혜를 갚겠다며 찾아온 능 언니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도, 운 공자님께 다른 의도가 전혀 없다는 사실도 말예요.”

    말하는 금혜린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럼 오늘 회합을 보려 했던 건…….”

    “네. 호암상단의 새로운 주인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어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 나을 테니까요.”

    상대가 악한 자라면 백 가지 대책을 세운들 모두 헛되다.

    호암상단의 새로운 주인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가문의 명운이 걸린 금혜린에겐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공자께서 이렇게 해결해 주실 줄은 몰랐지만요. 정말로 감사드려요.”

    “아닙니다. 금가장을 구한 사람은 소저와 능 여협이지요.”

    운현의 말에 금혜린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이 반짝이고 있었다.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어떻습니까? 어르신.”

    “좋지 않다.”

    객옹이 나지막이 답했다.

    금혜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데 객옹이 무덤덤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네 병증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네 몸이니 네가 들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나, 혹 다른 사람들이 듣기를 원치 않는다면…….”

    “아니요.”

    살짝 표정이 굳었던 금혜린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분들이라면 괜찮아요. 말씀해주세요.”

    객옹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너와 같은 병증을 가진 이들 중에는 특출한 재능이나 신비한 능력을 가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네 능력 또한 그런 경우겠지.”

    “저, 금 소저의 병증이 무엇인가요?”

    일아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절맥이다.”

    객옹의 대답에 일아영의 표정이 굳었다.

    금혜린이 병약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절맥이라니, 약조차 없다는 불치의 병이 아닌가?

    “보통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죽는다. 너는 천운으로 성년을 지났으나 절맥은 오히려 더 심각해졌다. 설령 앞으로 네가 능력을 쓰지 않는다 해도.”

    객옹은 조용히 말했다.

    “오래 살 수는 없다.”

    사망 선고 같은 객옹의 말에도 금혜린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옆에 있는 능화영이 오히려 애써 입술을 깨물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치료는 가능합니까?”

    낮은 목소리로 영호준이 물었다.

    수군도독의 딸 역시 절맥이었으나 객옹은 그녀를 치료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운현과 영호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방법은 있다.”

    잠시 침묵하던 객옹이 말했다.

    일아영은 물론이고 금혜린과 능화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허나 대단히 어렵다. 치료 중에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크고, 악화된 절맥을 다스리기 위해서 막대한 공력을 이용할 터인데 그 과정에서 상당한 고통이 따라올 것이다.”

    금혜린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시한부 생명이라지만 죽을지도 모르는 치료를 받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엄청난 고통이라니.

    “그건…….”

    “제가 소저께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다고 했었지요?”

    운현의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금혜린을 쳐다보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힘들고 어려운 결정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치료를 받으세요. 그게 제 부탁입니다.”

    그녀를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은 더없이 맑았다.

    금혜린의 가슴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솟아올랐다.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했는데, 운현이 바란 것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의 치료라니 말이다.

    “저는…….”

    떨리는 목소리로 금혜린이 무언가 말하려 할 때였다.

    사락.

    “빙정을 드리지요.”

    그 목소리는 북해일문의 문주인 대궁주였다.

    이미 객옹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던 대궁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운현 일행의 자리로 다가왔다.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해의 빙정은 극한의 기운을 담고 있어요. 그것이라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운현은 놀란 표정으로 대궁주를 보았다.

    빙정이라면 분명 북해의 빙제를 살릴 때 사용되었던 조각들이자, 백 년에 하나 얻을 수 있다는 북해의 기물이었다.

    “저희도 돕겠어요.”

    바스락.

    모용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객옹에게 다가와 공손히 예를 표하고는 말을 이었다.

    “얼마 전 세가가 입수한 귀한 약재들이 있어요. 반드시 도움이 될 거예요.”

    일아영도, 능화영도 놀랐다.

    하지만 제일 당황한 사람은 금혜린이었다.

    “어, 어째서 제게 그런 호의를…….”

    “환자는.”

    금혜린을 내려다보며 대궁주가 말했다.

    “딴생각 말고 어서 낫기나 하면 돼요. 그래야 소저도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지 않겠어요?”

    따뜻한 말과 달리 대궁주의 눈빛은 어쩐지 불편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래요. 객옹 어르신께서 반드시 소저를 살려 주실 거예요.”

    모용미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금혜린에게 말했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남궁비연이 벌떡 일어났다.

    “저, 저기…….”

    “필요 없다.”

    객옹이 말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대궁주와 모용미를 흘깃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그 눈빛에 담긴 뜻을 감히 거역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일어났던 남궁비연도 조용히 앉았다.

    사락.

    대궁주와 모용미, 남궁비연이 자리에 앉자 이곳을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도 사라졌다.

    연회장에 다시 대화 소리가 차오르고, 객옹은 운현을 돌아보았다.

    “현이 너만 있으면 된다.”

    “알겠습니다.”

    운현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그 순간 대궁주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지고 모용미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러면 언제…….”

    저벅, 저벅.

    대연회장이 갑자기 조용해지며 한 사람이 들어섰다.

    운현과 일행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바로 내정총관 이학붕이었다.

    호암상단의 총회합이 시작된 것이다.

    ***

    이유걸은 굳은 표정으로 대연회장에 앉아 있었다.

    그가 앉은 자리는 장로들과 중직자들 사이였다.

    지금 이유걸의 위치를 보여 주는 애매한 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우득.

    이유걸은 이를 악물었다.

    한때 부친 이호암이 서 있던, 그리고 지금은 당연히 자신의 것이어야 할 자리에는 내정총관 이학붕이 서 있었다.

    친척이기도 한 이학붕을 바라보는 이유걸의 눈빛은 살기마저 번득였다.

    응당 자신의 것이어야 할 자리를 빼앗겼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까?

    ‘간신히 서연이가 사라졌다 싶더니 이제는 저 노인네가…….’

    이학붕은 대연회장에 가득한 귀빈들을 향해 호암상단의 실적을, 주로 자신의 공적을 자랑스레 말하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호암상단이 변해야 한다며 ‘상생’이라는 단어를 힘차게 강조했다.

    “그러므로 이제는 상생의 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호암상단은 이러한 시대정신을 받아들여…….”

    열변을 토하는 이학붕을 보며 이유걸은 코웃음을 흘렸다.

    ‘상생? 흥, 자기가 잡아먹은 상단이 몇인데…….’

    이학붕이 갑작스레 내세운 ‘상생’은 분명 계획에 없던 말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이학붕이 계속 주목하고 있는, 멋진 옷을 입은 귀공자가 바로 창룡맹 총군사이기 때문이다.

    ‘창룡맹.’

    이유걸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상단의 주인이던 이호암이 사망하고 사무총관 이서연이 행방불명되자 이서연의 반대 파벌이었던 이유걸은 즉시 두 사람의 집무실을 점거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누구도 알지 못하던 비밀을 발견했다.

    그것은 ‘혈공자 문왕’과의 거래가 호암상단을 천하삼대상단으로 올라서게 했다는 것과, ‘창룡검주’가 이호암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워낙 은밀하게 진행된 일이라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혈공자 문왕, 그리고 창룡검주.’

    이유걸은 창룡맹의 총군사 영호준을 노려보았다.

    ‘내 반드시 진상을 밝혀내고야 말겠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호암상단의 다음 주인은 자신이 되어야 했다.

    지금은 이학붕이 마치 주인처럼 굴고 있지만, 오늘 밤 장로회의에서 새로운 주인으로 추대되는 사람은 바로 이유걸 자신이 될 것이다.

    죽은 이호암에 대한 복수와, 지금까지 이어 온 상단의 성장을 원하는 사람은 이유걸 자신만이 아니니까 말이다.

    으득.

    이유걸은 이를 악물었다.

    영호준을 향한 그의 시선은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었다.

    ***

    “혹시 이유걸과 친합니까?”

    문득 영호준이 일아영에게 물었다.

    “네?”

    일아영은 무슨 소리인가 싶은 표정으로 영호준을 바라보았다.

    이유걸이라면 죽은 이호암의 아들이자 바로 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

    “아뇨. 저분은 사무총관님과 반대 파벌이라 전혀…….”

    “개인적으로 친밀감을 표시한 적은요? 예를 들어 식사에 초대했다거나…….”

    “그런 일 없어요.”

    단호한 일아영의 말에 영호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요? 그런데 왜 날 노려보는 걸까요? 이런 시선은 여자를 빼앗겼을 때나 날리는 건데…….”

    일아영은 힐끗 이유걸을 바라보았다.

    굳은 표정의 이유걸이 일아영의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모르겠네요. 근데 남의 여자를 빼앗은 적이 있어요?”

    “어허, 빼앗다니요. 여자가 물건인가요? 어디까지나 성인으로서 스스로…….”

    영호준의 말을 자르며 일아영이 물었다.

    “그보다 내정총관이 총군사님을 엄청 신경 쓰는 것 같은데, 혹시 호암상단의 다음 주인이 누가 되느냐도 창룡맹의 선택에 달려 있는 건가요?”

    어깨를 으쓱하고는 영호준이 답했다.

    “그럴 수 있지만, 하지 않습니다. 본래 우리 맹주님의 방침이 어지간한 건 그냥 놔두는 것이니까요. 이것저것 다 간섭해 봤자 귀찮은 일만 늘어나지 않습니까?”

    고개까지 저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지난번에 부탁드린 것만 일 소저께서 잘해 주시면 누가 주인이 되건 투자자로서는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일아영은 살짝 신음을 흘렸다.

    그때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지금이 되고 보니 매우 진지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투자요?”

    “돈을 좀 넣었거든요.”

    영호준이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돈’이 철전일 리는 없으리라.

    “……그래도 돼요? 창룡맹은…….”

    “됩니다. 그런 걸 금지하는 법이 없으니까요.”

    일아영도 그간 호암상단에서 일했기에 영호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파맹이라는 창룡맹이 그래도 되나 싶기도 하다.

    “걱정 마십시오. 맹의 자금이 아니라 맹주님 개인 재산이니까요. 지난번 무림맹 사태를 겪으면서 창룡맹 자체적으로 장강 물류를 확보하는 게 아주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어쩌다 기회도 되고 해서 이참에 손을 좀 써 놨죠.”

    일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도 상단에서 일하고 나서야 실감할 수 있다.

    물류가 가지는 중요성과 얼마나 큰돈이 오가는지도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기분이 좋지 않군요.”

    영호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금 소저가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니, 마치 제가 속이 시커매서 금 소저가 절 경계하는 것 같잖습니까?”

    일아영은 ‘너무 잘생겨서가 아닐까요?’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렇게 말하면 영호준이 정말로 좋아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게 부탁하신 건…….”

    일아영이 영호준에게 무어라 하려던 때였다.

    “소저!”

    문득 운현의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일아영은 물론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운현에게 향했다.

    “앗!”

    깜짝 놀란 일아영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륵.

    운현 곁에 앉아 있던 금혜린이 힘없이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안색은 이미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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