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435화 (435/530)
  • 435화. 의도치 않은 주빈(主賓)

    운현 일행은 영호준을 남겨 두고 대연회장으로 향했다.

    금혜린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방금 창룡맹 총군사라고…….”

    내정총관 이학붕은 분명 창룡맹 총군사라고 말했다.

    심지어 영호준 본인이 시인했고 말이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영호준 대협은 참으로 유능한 분이라고요.”

    그래도 금혜린은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화산의 매화검인 데다가 창룡맹의 총군사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록 그녀가 아는 건 창룡맹의 맹주가 창룡검주라는, 장강에 파다한 소문으로 알게 된 사실뿐이었지만 총군사가 얼마나 중요한 지위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운 공자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분들을 알고 계시는군요.”

    금혜린은 새삼 운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객옹 같은 엄청난 기인에다가 화산의 매화검이자 창룡맹 총군사인 영호준, 그리고 부친 금사열이 인정하는 무인인 일충현까지.

    금혜린이 보기에 운현은 이야기에서나 나오는 사람 같았다.

    “어쩌다 인연이 닿았을 뿐입니다.”

    운현은 겸손하게 말했다.

    옆에서 일아영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금혜린은 미처 보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새 일행은 대연회장 앞에 도착했다.

    호암상단이 단단히 작심한 듯 넓은 대연회장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붉은빛의 비단 휘장이 드리운 가운데 전면에는 호암상단의 장로들을 위한 자리가 있었고, 좌우 측면에는 귀빈들을 위한 탁자와 의자가 여러 줄로 놓여 있었다.

    평소 벽 역할을 하는 커다란 창도 위로 활짝 열려서, 마치 날개를 들어 올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저기 걸려 있는 오색 휘장과 등불, 주위 경관을 이루는 나무와 기이한 돌 들은 대연회장의 정취를 한층 더 높여 주고 있었다.

    “……엄청 신경 썼네요.”

    일아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호암상단의 본가에 익숙한 그녀에게도 이런 모습은 놀라울 정도였다.

    이전 총회합 때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회장 안은 비교적 조용했다.

    먼저 온 손님들은 자리에 앉아 가벼운 음식과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호암상단이 신경 써서 초청한 귀빈들답게 그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자리는 어디예요?”

    일아영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영호준이 아직 정문에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현이 주위를 돌아보며 말했다.

    “누군가에게 물어볼까?”

    대연회장에는 당연히 호암상단의 시녀와 하인 들도 있었다.

    그들은 총회합의 시작을 기다리는 귀빈들을 위해 간단한 음식과 차를 대접하는 중이었다.

    운현이 막 그들 중 한 사람을 부르려 할 때였다.

    “이리로 오세요.”

    낭랑한 목소리가 넓은 대연회장에 울렸다.

    운현 일행은 물론 모든 귀빈들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눈을 돌렸다.

    연회장 앞쪽, 귀빈석에 앉아 있던 아름다운 여인이 일어났다.

    사락.

    사람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변이 환하게 보일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는 바로 북해일문의 문주인 대궁주였다.

    “대, 대궁주.”

    운현이 놀란 표정을 짓자 대궁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저 그것만으로도 여기저기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대궁주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마침 이곳이 비어 있네요.”

    그녀가 말한 자리는 바로 자신의 옆자리였다.

    갑작스러운 일에 운현이 당황해하던 때였다.

    “운 학사님!”

    또 다른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단아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여인은 운현을 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바로 모용미였다.

    “모용 소저!”

    운현 역시 놀랐다.

    그녀가 여기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모용상아와 모용진도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운 오빠!”

    “운 대인!”

    그들만이 아니었다.

    대궁주 옆에 있던 삼궁주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호위무사 빙혼과 시녀 차림의 빙설도 고개를 살짝 숙였다.

    운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금혜린과 일아영도 놀란 눈으로 운현을 돌아보았지만 능화영은 아예 무슨 일인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이쿠, 이거 벌써들 만나셨나요?”

    뒤에서 영호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성큼성큼 걸어온 영호준은 웃으며 말했다.

    “놀라게 해 드리려고 일부러 알리지 않았습니다. 괜찮았습니까?”

    웃는 영호준에게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총군사께서 오시라고 한…….”

    “아닙니다.”

    운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호준은 고개를 저었다.

    “북해일문이 오는 건 나중에 알았고, 모용세가도 어차피 참석하려 한다기에 슬쩍 운만 띄웠습니다. 적어도 기회는 공정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영호준이 말하는 ‘공정한 기회’라는 게 어차피 엉뚱한 이유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자, 가시지요. 저 자리입니다.”

    영호준이 말한 곳은 귀빈석 중에서는 가장 앞쪽에 있는 상석이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북해일문과 모용세가가 바로 옆에 있었다.

    운현은 모용진과 모용미, 모용상아와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대궁주와 삼궁주에게도 예를 표했다.

    물론 빙혼과 빙설도 짧은 눈인사를 나누었다.

    대궁주와 모용미는 객옹에게도 정중한 예를 올렸다.

    비록 객옹은 말없이 그녀들을 지나쳤지만 말이다.

    사락.

    그렇게 많은 인사를 나눈 후에야 운현 일행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오오, 이게 누구신가요?”

    활달한 목소리에 운현은 눈을 들었다.

    저벅, 저벅.

    운현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은 바로 제갈기호였다.

    “여기서 이렇게 뵙는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제갈기호는 웃는 얼굴로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운현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답례했다.

    “반갑습니다. 헌데 여긴 어떻게…….”

    “맹주님께서 하도 제갈세가를 찾지 않으시니 제가 올 수밖에요. 게다가 여기 온 사람이 저만은 아니거든요. 뒤처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네?”

    운현이 반문했을 때였다.

    “운 공자님.”

    여인의 낭랑한 목소리가 운현의 귓가에 울렸다.

    화려한 옷을 입은 아름다운 그녀는 바로 총감찰 남궁비연이었다.

    “남궁 소저!”

    운현의 말에 남궁비연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녀는 공손하게 예를 표하고는 말했다.

    “잘 지내셨나요? 오라버니.”

    그녀와 운현의 의남매는 이미 끝났지만 남궁비연은 운현을 오라버니라고 불렀다.

    그 순간 남궁비연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들을 남궁비연은 담담하게 흘렸다.

    이 정도로 흔들려서야 남궁세가의 여인이라 할 수 없을 테니까.

    “아니, 비연 소저가 어떻게 여기에…….”

    운현의 말에 남궁비연은 미소를 머금었다.

    “남궁세가의 정보력을 가벼이 보시면 안 되지요. 어차피 와야 할 자리이고 해서 제가 직접 왔어요. 오라버니도 볼 겸 해서요.”

    남궁세가는 호암상단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무림맹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빙긋 웃은 남궁비연은 운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이에요. 총회합 후에 봬요.”

    남궁비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객옹에게 정중한 예를 표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의 자리는 의외로 가까웠다.

    제갈기호 역시 웃으며 말했다.

    “저도 나중에 뵙지요. 아,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며 제갈기호가 말을 이었다.

    “계림에서 하신 일은 전해 들었습니다. 과연 맹주님이시네요.”

    제갈세가의 정보력 역시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감탄하듯 빙긋 웃은 제갈기호는 객옹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제갈세가 역시 운현의 자리와 그리 멀지 않았다.

    슥.

    운현은 혹시 이것도 영호준이 준비한 것인가 싶어 돌아보았다.

    하지만 영호준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제갈세가와 남궁세가는 자체적으로 알아내서 온 것이라는 뜻이다.

    “후우.”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이미 대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운현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거대 세가의 사람들이 운현을 찾아와 예를 표하는 광경은 그들 모두가 똑똑히 보았다.

    대부분 상단 관계자인 그들은 대화를 제대로 듣지도 못했고, 운현을 부르는 호칭도 워낙 제각각이라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마운상단 같은 거대 상단 관계자들은 무언가 알아차린 듯도 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인사를 건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정중한 배첩이나 서찰도 보내지 않고 불쑥 다가갔다가는 호감은커녕 무례하다는 인상을 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창룡맹의 맹주는 결코 함부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크흠.”

    의도치 않게 주빈(主賓)이 되어 버린 운현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찻잔을 들었다.

    하지만 모든 대화를 똑똑히 들은 사람도 있었다.

    “……맹주님이라고요?”

    묻는 금혜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당혹스러웠다.

    “아, 그게…….”

    운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일아영의 ‘진작 말하라고 했잖아요!’라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운현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렸다.

    “다른 분들께는 비밀입니다.”

    운현의 말은 자신이 맹주임을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른 분들요?”

    금혜린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보아하니 일아영도 이미 아는 눈치인 데다, 북해일문과 모용세가는 물론 남궁세가와 제갈세가까지 예를 표하고 가지 않았던가?

    “그야 물론 호암상단 사람들이지요.”

    운현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여전히 혼란스러워 하는 금혜린 옆에서 불쑥 능화영이 말했다.

    “자네가 맹주라고?”

    능화영은 눈을 반짝였다.

    “그런데 왜 내가 몰랐지? 소문으로 듣던 창룡검주라면…….”

    “너는 알았다.”

    문득 객옹이 말했다.

    능화영이 돌아보자 객옹은 찻잔을 들며 말했다.

    “다만 현이가 워낙 이질적인 존재라 깨닫지 못한 것뿐이겠지.”

    “이질적?”

    이해가 되지 않는지 능화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듣고 있던 금혜린은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 그럼 그게…….’

    운현을 처음 본 날 능화영은 말했다.

    이상하게 운현만 쳐다보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이 된다고.

    자신은 그걸 이성에 대한 호감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운현이 문득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보다 내정총관과 이야기한 건 어찌 되었습니까? 총군사님.”

    애써 화제를 돌리는 것이 분명했지만 영호준은 순순히 답했다.

    “네, 다 끝났습니다. 금가장에 한 호암상단의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이상한 조건은 모두 없어질 겁니다.”

    금혜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영호준은 말을 이었다.

    “내정총관이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더군요. 애초에 금가장에 거금을 제안했다고 들었을 때부터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돈 한 푼 안 주고 날로 먹어 버리려는 나쁜 놈들도 이 바닥에는 많거든요.”

    금혜린은 혼란스러웠다.

    영호준의 말대로라면 이미 금가장의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잘됐군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금혜린을 향해 말했다.

    “들으셨지요? 이제 내정총관 때문에 금가장이 어려움에 처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웃음을 머금으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소저께서 목숨을 깎아 가며 능력을 쓰실 이유는 없습니다.”

    금혜린의 안색이 단번에 굳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진 수많은 일들에 당황해하고 있던 그녀였지만 운현의 말은 절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무, 무슨 말씀인지 잘…….”

    금혜린은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운현은 진지했다.

    “소저께서 목숨을 깎아 가며 능력을 쓰실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운현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 저희의 무고함을 확신하거나, 쓰러진 마두가 움직이기도 전에 알아차릴 때처럼 말입니다.”

    어두운 숲속에서 갑자기 마주쳤을 때 능화영은 다짜고짜 운현에게 검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금혜린은 운현 일행의 무고함을 확신했다.

    그녀의 입장에선 운현을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는데도 말이다.

    쌍검문과 호암상단이 금가장에 쳐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금혜린은 누구보다 먼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두가 움직이기도 전에 그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렇지 않습니까?”

    운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분명한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