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귀빈과 거물
이학붕은 멍하니 미녀를 바라보았다.
살짝 차가운 분위기에 마치 눈꽃 같은 느낌마저 드는 그 여인은 조용히 이학붕 앞으로 걸어왔다.
사박, 사박.
온 사방이 조용한 가운데 그녀의 발소리가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이학붕 앞에서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실례합니다. 여기가 호암상단의 본가가 맞나요?”
낭랑한 그녀의 목소리마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이학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그렇습니다. 호암상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내정총관 이학붕입니다.”
이학붕은 정중한 태도로 예를 표했다.
그의 입가에는 오랜 습관이 되어 버린 미소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그렇군요. 저는 북해일문의 문주입니다.”
‘북해일문!’
이학붕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북해일문이라면 산서성 태원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문파다.
황하가 지나는 산서성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 창룡맹에 가맹하여 앞으로 황하의 물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되는 곳 이었다.
‘북해일문의 문주가 직접 여기까지 오다니!’
당연히 초청장을 보냈었고 참석하겠다는 답도 받았다.
부총관 급이나 실무자 정도나 올까 싶었지만 나타난 사람은 놀랍게도 문주였다.
이학붕은 그제야 북해일문의 문주가 어마어마한 미녀라는 소문을 떠올렸다.
그런 소문은 늘 과장되기 마련이라 들을 때는 쓴웃음을 지었는데, 막상 만나보니 오히려 소문이 한참이나 부족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쪽은 북해일문의 외청 부청주입니다.”
북해일문주의 말에 이학붕은 눈을 돌렸다.
그제야 또 다른 젊은 여인이 북해일문주 옆에 서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반갑습니다. 북해일문의 외청 부청주예요.”
그녀 역시 귀여운 느낌의 상당한 미녀였다.
이학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문주님과 외청 부청주님께서 오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북해일문주의 표정은 여전히 차가웠다.
이학붕은 북해일문 일행을 총회합 장소인 대연회장으로 안내했다.
저벅, 저벅.
“북해일문의 소문은 들었습니다. 태원에서는 이미 견줄 문파가 없다고 하더군요. 허허.”
이학붕은 상대에 대한 칭찬으로 대화를 시작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바람일 뿐, 북해일문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외청 부청주는 물론이고 옆에 선 호위무사와 시녀조차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덕분에 이학붕은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대연회장까지 말없이 걸어가야 했다.
“이곳입니다.”
이학붕이 안내한 자리는 꽤나 상석이었다.
문득 북해일문주가 물었다.
“창룡맹에서는 아직 아무도 안 오셨나요?”
이학붕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역시 창룡맹을 찾는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곧 오실 것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학붕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북해일문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이학붕은 자리를 떴다.
대연회장을 나오며 이학붕은 나지막이 감탄을 흘렸다.
비단 북해일문주의 미모가 아니더라도, 명성이 쟁쟁한 문파들과 함께 창룡맹에 그 이름을 올린 북해일문은 절대 허술히 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학붕은 정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린 건 또 다른 예상치 못한 귀빈이었다.
따각.
이학붕이 정문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그리고 훤칠한 청년과 아름다운 젊은 여인, 그리고 귀여운 소녀가 마차에서 내렸다.
특히 단아한 분위기의 젊은 여인은 주변 사람들이 돌아볼 만큼 상당한 미녀였다.
“여기야?”
어린 소녀가 젊은 여인을 올려다보며 재잘거리듯 말했다.
“그래. 얌전하게 있어야 해. 알았지?”
젊은 여인이 말했다.
귀여운 소녀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언니.”
젊은 여인은 미소를 머금었다.
이학붕 역시 자신도 모르게 훈훈한 웃음을 지었다.
자박, 자박.
훤칠한 청년과 젊은 여인, 그리고 여인의 손을 잡은 귀여운 소녀가 이학붕 앞으로 걸어왔다.
이학붕이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내정총관 이학붕입니다.”
“모용세가의 외당 당주 모용진입니다.”
청년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이학붕은 순간 의아했다. 모용세가의 외당 당주는 분명 모용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모용세가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 이 청년이 바로 청풍검 모용진…….’
모용진은 과거 무림맹 비무대회에서 검기를 드러낸 이후 청풍검이라는 명호를 얻으며 강호 무림의 주목을 받았다.
상대였던 공손세가의 대제자 역시 검기를 발현했으나 두 사람의 대결은 결과를 보지 못했다.
비무대회가 끝나기 전에 무림맹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모용세가의 신임 외당 당주이신 청풍검께서 찾아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청풍검 모용진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이쪽은 제 동생들입니다.”
“모용미예요.”
모용미라면 전임 외당 당주다.
이학붕은 그들이 함께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종의 인수인계 비슷한 것이리라.
“저는 모용상아예요.”
밑에서 들린 목소리에 이학붕은 시선을 내렸다.
작은 모용상아가 기특하게도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있었다.
이학붕은 다시금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이학붕은 모용세가 일행을 직접 대연회장으로 안내했다.
같은 창룡맹 소속이어서 북해일문의 일행 바로 옆자리로 안내했다.
모용세가와 북해일문이 서로 인사를 하는 것을 본 후 이학붕은 다시 정문으로 돌아왔다.
‘어쩐지 조금 지치는군.’
총회합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이학붕은 피곤함을 느꼈다.
그건 나이 탓이라기보다는 의외의 귀빈들이 연이어 나타난 때문이었다.
북해일문도 그렇지만 모용세가도 무시 못 할 신흥 세가가 아닌가?
이학붕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
운현 일행은 호암상단의 본가로 향했다.
함께 마차를 탄 금혜린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운현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정말 총회합에 가셔도 괜찮겠어요?”
금혜린의 걱정은 운현을 향한 것이었다.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가면 안 되는 이유가 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금가장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 호암상단에 알려지면 운 공자님께 좋을 것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일 소저도…….”
금혜린은 말끝을 흐렸다.
마차 안에는 일아영도 타고 있었다.
그녀가 금가장의 편에 선 것을 호암상단이 알게 되면 불이익을 받을 것이 뻔했다.
운현 역시 천하삼대상단에 꼽히는 호암상단에 밉보여서 좋을 것이 없을 테고 말이다.
하지만 운현은 빙긋 웃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호암상단은 우리에 대해 알고 있을 테니까요.”
옥에 갇힌 내정 부총관의 말이 무시되었다는 것을 운현 일행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래도 운현과 일아영의 존재가 알려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런가요.”
금혜린의 근심 어린 표정은 그리 밝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놀랍네요. 총회합이 열리는 대연회장에 자리를 잡으시다니요. 본가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대연회장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상단의 장로들과 중직들, 그리고 초청장을 가진 귀빈들뿐이다.
본래 금혜린은 본가에 들어가 대연회장 바깥에서 총회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정작 오늘 아침에 운현이 대연회장 안에 자리를 잡았다고 말한 것이다.
“매화검께서 유능하신 덕분이지요.”
운현이 말하자 매화검 영호준이 빙긋 웃었다.
금혜린은 여전히 영호준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따각, 따각.
마차는 어느새 호암상단의 본가에 도착하고 있었다.
금혜린의 표정이 더욱 굳어지고 능화영 역시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들이 탄 마차는 곧 정문 앞에 멈춰 섰다.
“내릴까요?”
운현이 금혜린에게 말했다.
금혜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칵.
문이 열리고 운현이 먼저 마차를 내렸다.
금혜린은 마음을 다지고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정문에서 귀빈을 맞이하던 내정총관 이학붕의 표정엔 피로감이 가득했다.
생각지도 못한 귀빈이자 거물들이 연이어 나타난 탓이었다.
그리고 막 마차에서 내리는 한 여인을 발견한 순간 이학붕은 눈살을 찌푸렸다.
‘……금가장의 여식이군.’
금가장의 장주 금사열과 함께 호암상단에 찾아왔던 금혜린의 모습을 이학붕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호암상단의 총회합에 나타난 것이다.
‘결과를 보고 판단하겠다 이거지?’
이학붕은 피식 웃었다.
금가장은 오늘까지 이학붕에게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결국 이학붕이 내민 손을 거절한 것이다.
‘상관없지. 마음대로 하라고 해. 하지만 나를 저울질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주마.’
그의 입가에 조소가 떠올랐다.
사박.
금혜린이 이학붕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내정총관님.”
금혜린이 정중하게 말했다.
이학붕은 코웃음을 흘렸다.
“흥, 청하지도 않은 사람이 어째서…….”
하지만 이학붕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초, 총관님!”
옆에 서 있던 상단의 실무자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학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에 실무자의 말이 이어졌다.
“창룡맹 총군사님이 오셨습니다!”
이학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창룡맹 총군사라면 단연 귀빈 중의 귀빈이다.
“어, 어디 계시냐!”
이학붕이 다급하게 말하던 때였다.
“여기 있습니다.”
멋진 옷을 입은 귀공자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바로 금혜린 뒤에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학붕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암상단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그보다.”
창룡맹 총군사 영호준은 이학붕의 말을 끊었다.
“방금 전 금 소저께 ‘청하지도 않았으니 돌아가라’고 말하려던 것 같던데, 맞습니까?”
멋진 미소를 지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이학붕은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답은 금방 나왔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학붕은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금가장은 호암상단의 아주 오랜 벗입니다. 금 소저의 방문은 언제라도 환영할 일이지요. 허허허.”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그렇군요. 제가 오해했나 봅니다.”
이학붕에겐 천만다행스럽게도 영호준은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그는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정총관께서 이리도 반갑게 맞아 주시는군요. 다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금혜린은 물론 운현과 객옹, 일아영, 능화영까지 우르르 이학붕 앞을 지나갔다.
그래도 운현과 일아영은 가볍게 고개라도 숙였지만 다른 사람은 아예 인사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학붕은 그걸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제, 제가 안내를…….”
“잠시 만요.”
영호준의 목소리가 이학붕을 세웠다.
이학붕이 돌아보자 영호준이 얼굴을 가까이 했다.
“이건 비밀인데, 맹주님께서 이 총회합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헉!’
이학붕은 화들짝 놀랐다.
창룡맹의 맹주가 호암상단의 총회합에 관심을 가지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상단주 이호암이 사망하고 사무총관 이서연이 행방불명된 이후 위기를 겪고 있던 호암상단이다.
창룡맹 맹주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위기를 단번에 돌파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저, 저희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이학붕은 자신도 모르게 극존칭을 사용했다.
“……글쎄요.”
영호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학붕의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우리 맹주님께선 힘 있는 자들이 약한 이들을 괴롭히는 걸 아주 싫어하셔서…….”
“즉시 시정하겠습니다.”
이학붕의 대답은 주저함이 없었다.
무엇을 말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금가장의 여식이 총군사 일행과 함께 들어가지 않았던가?
“또 무엇이 필요할까요?”
영호준은 그제야 빙긋 웃었다.
“호암상단의 일에 제가 어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잘되시길 바랍니다.”
이학붕은 안달이 났다.
“그, 그러지 마시고…….”
체면조차 잊고 이학붕은 말했다.
거물 중의 거물인 창룡맹 맹주의 의향을 어떻게 하든 들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맹주님’이 이미 안으로 들어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