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화. 맹주님이라고요?
금가장으로 들어간 운현은 재빨리 방문을 열었다.
금혜린을 안은 능화영이 안으로 들어서고, 객옹과 일아영이 뒤따라 들어왔다.
사락.
능화영은 정신을 잃은 금혜린을 조심스레 침상에 뉘였다.
객옹은 금혜린의 맥을 살펴보고는 몇 군데의 혈을 눌렀다.
타닥.
“으음.”
금혜린이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곧 긴 숨을 내쉬더니 표정이 편안해졌다.
그녀의 호흡과 맥을 확인한 객옹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지금은 괜찮다.”
금혜린은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다.
열이 오른 듯 붉던 안색도 지금은 한결 나아 보였다.
슥.
객옹은 고개를 돌려 능화영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이리된 이유가 뭐냐?”
그건 난데없는 물음이었다.
금혜린이 쓰러진 이유를 능화영이 알 리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능화영은 입을 다문 채 금혜린을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아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객옹에게 말했다.
“충격을 받은 것 아닐까요? 금 소저가 워낙 병약하니…….”
“아니다.”
객옹은 일아영의 말을 끊었다.
“이유가 있다. 분명히.”
“미안하네.”
능화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허나 다른 이에게 발설하지 않기로 약조했으니 지금은 밝힐 수 없네. 나중에 때가 되면……, 그때 말해 주겠네.”
“이 아이가 죽고 나서 말이냐?”
객옹의 말에 능화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객옹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쉬게 해라. 곧 깨어날 게다. 하지만 이럴 때마다 이 아이의 생명이 깎여 나간다는 걸 명심해라.”
그 말을 끝으로 객옹은 발을 옮겼다.
능화영은 당황한 표정으로 객옹에게 말했다.
“고, 고맙네!”
하지만 객옹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저벅, 저벅.
객옹이 방을 나가고, 운현은 능화영에게 말했다.
“잘 보살펴 주십시오. 오늘은 때가 아닌 듯하니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 그리고.”
운현은 웃으며 능화영에게 말했다.
“소저의 검은 대단했습니다.”
“그, 그래?”
능화영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래도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처럼 쉽게 해결되지는 못했을 것일세.”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두 마두를 해치운 사람은 능화영이며, 이후의 혼란을 아예 원천 봉쇄해 버린 사람은 객옹이다.
하지만 능화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자네가 없었다면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을 것일세. 틀림없이 내 성격대로 하려다가 일만 더 크게 만들었겠지.”
능화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번에도 운현에게 다짜고짜 검을 빼 든 것을 보면 확실히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자네가 나라는 검을 휘두른 셈이 되는군. 그렇지 않나? 하하하.”
호탕한 능화영의 웃음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잠든 금혜린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다시 와 주게. 자네들이라면 금 아가씨도 마음을 열 테니. 아, 그리고 객옹 어르신께도 고맙다고 꼭 전해 주고.”
“네. 그리하지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나오지 마시고 쉬십시오.”
“고맙네.”
능화영의 말에 운현은 일아영과 함께 방을 나섰다.
먼저 나간 객옹의 뒷모습이 사잇문 너머로 막 사라지고 있었다.
***
운현과 객옹, 일아영은 마차를 타고 악양의 일충현 본가로 돌아가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세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일아영은 금가장에서 있었던 일들을 가만히 되새겼다.
천일검 능화영의 무공은 아무것도 모르는 일아영이 보아도 놀라웠다.
게다가 그녀가 보여 준 검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마지막에 객옹이 모두를 삽시간에 잠재워 버린 것 역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어떻게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아영은 새삼 놀라운 눈으로 객옹을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네가 보기에는 무엇이 먼저였더냐?”
객옹이 문득 말했다.
“마두가 움직이는 것과 그 아이가 소리친 것 말이다.”
그건 일아영을 향해 한 말이 아니었다.
“금 소저가 먼저였습니다.”
운현이 조용히 답했다.
“그자가 움직이기도 전에 금 소저의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그래. 내게도 그렇게 보였다.”
일아영은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용이 아니라, 왜 이런 말이 나오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금 소저가 우연히 그자를 본 게 아니라는 건가요?”
일아영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우연이라도 어르신보다 먼저 알아차릴 수는 없어.”
한순간이라도 금혜린이 객옹보다 먼저 알아차렸다면 그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자리의 누구도 객옹의 이목을 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아영은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게 중요한 일일까 싶었기 때문이다.
“아영아.”
운현의 목소리가 일아영의 생각을 끊었다.
“이번 일로 호암상단이 금가장에서 손을 뗄까?”
일아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는 없어요. 호암상단은 한번 일을 시작하면 무조건 끝을 보거든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일아영은 말을 이었다.
“무력행사가 수포로 돌아갔으니 다른 방법을 생각하겠지요. 예컨대 일전에 언급한 채무 증서라든가, 혹은 관을 통해 압박을 가한다든가 말예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하지만 그런 방법들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은데?”
“아무래도 그렇겠지요.”
호암상단이 금가장을 삼킬 방법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가장 빠르고 간단한, 힘으로 해결하는 방법은 실패했지만 말이다.
“흐음.”
운현은 생각에 잠겼다.
객옹도 더 이상 말이 없고, 마차 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 후, 일아영이 물었다.
“……그런데 운 숙부는 괜찮아요?”
“나?”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일아영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강호 무림이 이처럼 험한데, 운 숙부가 창룡맹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되어서요.”
밖을 보고 있던 객옹의 입가에 희미한 쓴웃음이 스쳤지만 일아영은 보지 못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괜찮아. 좋은 분들을 만나서 말이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일아영의 걱정 어린 표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오늘 보았던 두 마두 같은 자들이 강호 무림에는 허다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이 도와준다 해도, 조용한 성품의 운현이 어찌 헤쳐 나갈까 걱정이 되었다.
“항상 조심하세요. 오늘처럼 위험한 곳에는 가까이 가지 마시고요. 아셨지요?”
일아영의 말에 객옹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운현 역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일아영 역시 뒤로 물러나 조용히 있는 성격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운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일아영의 눈동자에는 자신을 걱정하는 그녀의 마음이 완연했으니까 말이다.
“그래, 고마워.”
운현은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일아영의 수심 어린 표정은 가실 줄을 몰랐다.
***
호남성 장사, 호암상단 본가.
내정총관 이학붕은 눈살을 찌푸렸다.
“실패했다고?”
앞에 서 있던 문사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문사는 내정 부총관을 보좌하는 실무자 중 한 명이었다.
“그, 그렇습니다. 게다가 부총관과 호위무사들까지 전부 관에 투옥되어…….”
쾅.
이학붕이 탁자를 내리쳤다.
“그렇게 호언장담을 해 놓고 이게 무슨 일이야!”
문사가 움찔하는데 이학붕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총회합이 바로 코앞인데 실패라고? 잘도 그딴 소리를!”
“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문사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금가장에 합류한 여고수가 워낙…….”
“그래서 우리도 고수를 데려갔잖아! 일을 어떻게 했기에 금가장 따위를 어쩌지 못하고 관아에 투옥까지 됐단 말이냐!”
이학붕에게 고수의 격차는 알 바 아니었다.
내정 부총관이 장담했던 일이 틀어지고 자신의 계획이 무너졌다는 사실이 그를 분노케 하고 있었다.
문사는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 그게 금가장을 접수하러 간 자리에서 공교롭게도 쌍검문을 만난 것 같습니다. 자세한 상황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적어도 쌍검문은 이제 금가장에 손을 쓸 수 없습니다.”
옥에 갇힌 내정 부총관을 직접 만났지만 그의 설명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검기니, 무슨 사술이니 하는 내정 부총관의 말은 설명이 아니라 횡설수설에 가까웠다.
“……정말인가? 쌍검문이 손을 쓸 수 없다고?”
인상을 찌푸린 이학붕이 말했다.
바로 그 쌍검문 탓에 일을 서둘렀던 것이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쌍검문의 문주와 정예 삼십여 명이 옥에 갇혔는데, 도무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내분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마구잡이로 세를 확장하던 쌍검문이다.
문주 담위걸과 행동대장 격인 등범유의 부재가 기약도 없이 길어지자 남아 있던 자들이 각자도생을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쌍검문은 사분오열되어 이권들을 가져가기 위한 싸움으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흐음.”
이학붕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비록 금가장을 차지하는 것에는 실패했다지만 쌍검문을 배제했다면 나쁜 결과는 아니다.
적어도 금가장을 빼앗길 염려는 사라졌으니 말이다.
‘어차피 총회합 때 장로들에게 보일 결과만 있으면 되는 것이니…….’
사실 금가장을 장악하는 건 나중이라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결과였다. 총회합에서 보일 결과 말이다.
이학붕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쳤다.
‘쯧, 아무래도 금가장 장주와 거래를 해야 할 때가 된 것 같군.’
“저, 저기…….”
문사의 목소리에 이학붕이 인상을 쓰며 눈을 들었다.
“부총관을 옥에서 꺼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평소라면 호암상단이 힘을 쓰기도 전에 알아서 해결되었을 일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관에서는 이번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엄히 조사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관에 뇌물을 많이 썼을 쌍검문도 마찬가지였다.
“놔둬.”
이학붕은 툭 던지듯 말했다.
“자업자득이니 이 기회에 고생 좀 하라고 해.”
문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호암상단, 아니 이학붕의 명을 실행하다 옥고를 겪고 있는데 자업자득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하지만 문사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옥에서 놓이기를 오매불망 기다릴 내정 부총관이나, 감히 따지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여야 하는 자신의 처지나 어차피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
호남성 악양, 일충현 본가.
한 대의 마차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내려선 사람은 멋들어진 옷을 입은 영호준과 담소하였다.
기다리던 총관이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는 두 사람을 후원으로 안내했다.
“맹주님!”
잘생긴 영호준이 환한 표정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아, 총군사. 담 제.”
마침 후원에서 차를 마시던 운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호준과 담소하는 운현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운현이 그들의 예에 답하자 영호준은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에 맹주님을 뵈니 정말 반갑군요. 어르신도요.”
영호준이 정중하게 예를 표했지만 객옹은 찻잔을 든 채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운현은 영호준과 담소하에게 자리를 권했다.
“우선 앉으시지요.”
“감사합니다.”
영호준과 담소하가 자리에 앉자 운현이 그들에게 차를 건넸다.
부드러운 차향을 음미하며 영호준은 만족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곧 눈을 빛내며 운현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계림에선 어떻게 하신 겁니까? 태평맹이 아주 뒤집어졌던데요?”
“별것 아닙니다. 그저 비무를 했을 뿐이지요.”
영호준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비무요? 이야, 맹주님께서 직접 검을 뽑으시다니 계림이 들썩들썩했겠군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계림이 들썩인 건 오히려 태평맹의 대연회 때문이었다.
“그보다 총회합에 대한 준비는 끝났습니까?”
“물론입니다.”
바스락.
영호준은 품에서 얄팍한 서찰을 꺼냈다.
붉은 문양과 금빛 글씨가 햇빛 아래 선명했다.
“가장 좋은 자리로 보냈더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천만에요.”
부드럽게 웃으며 말하던 영호준은 문득 일아영을 발견했다.
“아, 일 소저. 오랜만……. 표정이 왜 그렇소?”
영호준이 물은 것도 당연했다.
일아영이 입을 딱 벌린 채 놀란 눈으로 영호준과 운현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운 숙부를 ‘맹주님’이라고 하셨나요?”
“당연하지 않소?”
영호준은 도리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맹주님이시니 맹주님이라 부를 수밖에. 안 그렇소?”
슥.
일아영은 시선을 돌려 운현을 향했다.
“……맹주님이라고요?”
강호 무림에 대해 잘 모르는 일아영이라도 맹주라는 칭호가 가지는 의미만은 알고 있었다.
말 그대로 맹의 주인이 아닌가?
“음, 저기 그게…….”
운현은 일아영의 시선을 피하며 찻잔을 들었다.
“말하자면 이야기가 좀 긴데 말이야.”
“그래요? 다행이네요.”
일아영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저 오늘 시간 많거든요. 아주, 많아요.”
일아영의 단호한 눈동자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가득했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머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긴 이야기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