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화. 살려는 줬다
능화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 운현은 ‘뜻대로 하라’고 했는데, 객옹은 ‘정말로 죽이면 상심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운현을 보며 능화영이 말했다.
“자네도 심술궂은 데가 있군. 그냥 죽이지 말라고 하면 될 것 아닌가?”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살생을 꺼리긴 합니다만, 저들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소저의 뜻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무어라 할 것이 아니지요.”
“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던 능화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러면 상심하지도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건 제 마음이니까요.”
“으음.”
능화영은 신음을 흘렸다.
“뭔가 속는 느낌인데……. 뭐, 어쨌든 알아서 해도 된다는 것이지?”
“네, 그렇습니다.”
“좋아.”
사락.
능화영은 몸을 돌렸다.
후욱.
엄청난 기세가 그녀로부터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옷자락이 펄럭이고, 쌍검문 문도들과 호암상단의 호위는 물론 금가장의 제자들마저 안색이 변해 뒤로 물러섰다.
능화영은 웃으며 패도혈왕과 독안마제를 노려보았다.
“너희는 오늘 살았다.”
분명 젊고 아름다운 여인의 웃는 얼굴이건만, 독안마제는 물론 음담패설을 내뱉던 패도혈왕마저 섬뜩함을 느꼈다.
“그러니까 단단히 각오해야 할 것이다.”
능화영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으득.
외눈의 독안마제가 이를 갈았다.
“너 이년! 네가 감히 나를 우습게 여기느냐!”
그가 격하게 반응한 것은 조금 전 능화영의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기 때문이다.
코웃음을 치며 능화영은 말했다.
“우스운 짓을 하니 우습게 볼 수밖에. 신의라곤 개뿔도 없이 이리저리 붙어먹는 짓을 하면서 우습게 보이지 않을 줄 알았더냐? 그거참 어이없는 일이로다.”
“이, 이년이!”
능화영은 독안마제의 말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스릉.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능화영의 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둘 다 덤벼라. 한꺼번에 살려 주지.”
“클.”
패도혈왕이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를 동시에 상대하겠다고? 체면까지 구겨 가면서 본좌가 너를 상대할…….”
“헛소리 말고.”
슥.
능화영은 왼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까닥거렸다.
“오너라. 안 오면…….”
탓.
순간 능화영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녀의 옷자락이 바람에 펄럭이고 호리호리한 몸매가 공중으로 둥실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곧 벼락처럼 패도혈왕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파라락.
“내가 간다!”
콰과곽.
바람을 가르며 그녀의 검이 아래로 내리꽂혔다.
패도혈왕은 대경실색하며 자신의 도를 뽑았다.
카아앙.
날카로운 소리가 터지고 패도혈왕은 분노로 외쳤다.
“이 비겁한 년! 본좌가 아직 도도 빼지 않았거늘 암습을 해?”
정면에서 달려들었으니 암습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패도혈왕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능화영도 마찬가지였다.
“흥. 네 손은 이미 도에 가 있던데 뭘 그러나?”
패도혈왕은 이를 악물었다.
슬쩍 손을 움직이는 것조차 능화영은 보고 있었던 것이다.
빼앗긴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듯 패도혈왕은 기합을 내질렀다.
“하아아!”
우웅.
패도혈왕의 대도가 소리를 내며 능화영을 향해 내리꽂혔다.
하지만 능화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휘릭.
능화영이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그 대담한 행위는 바로 옆에서 날아오는 독안마제의 검을 상대하기 위함이었다.
어느새 독안마제가 능화영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던 것이다.
쉬릭.
능화영의 눈이 빛나고 그녀의 검이 바람을 찢었다.
카강, 콰앙.
폭음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큭.”
패도혈왕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독안마제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능화영의 일검을 두 마두가 당해 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독안마제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으득.
이를 악문 독안마제는 검을 내질렀다.
“하아!”
쉬쉬쉭.
날카로운 검격이 독안마제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능화영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카가강, 카강, 카가가강.
날카로운 쇳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공방은 숨 쉴 사이조차 없이 빠르고 정교했다.
장주 금사열이나 문주 담위걸도 그 공방을 제대로 보지 못할 정도였다.
쌍검문과 금가장의 제자들, 호암상단의 호위들은 놀란 얼굴로 능화영과 독안마제의 공방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패도혈왕은 그럴 수 없었다.
저 뒤에서 지켜보는 노인, 객옹이 나서기 전에 능화영을 처리해야만 했다.
“받아라!”
패도혈왕은 크게 소리치며 대도를 휘둘렀다.
굳이 알려 주는 듯 외친 것은 능화영의 주의를 흐트러뜨리려는 의도였다.
부우욱.
의도야 어떻든 패도혈왕의 대도에 실린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그의 대도가 바람을 가르며 능화영의 가녀린 허리를 노리고 짓쳐 들었다.
독안마제 역시 이때다 싶어 눈을 빛냈다.
“하아!”
쐐애액.
내력을 실은 쾌검이 능화영을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능화영은 당황하지 않았다.
사락.
능화영이 그대로 눕나 싶더니 그녀의 호리호리한 몸이 허공에 떴다.
그녀가 손도 짚지 않은 채 제자리에서 공중제비를 돈 것이다.
후우욱.
독안마제의 검이 그녀의 눈앞을, 패도혈왕의 대도가 그녀의 등과 허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능화영은 그 상태 그대로 허공에서 두 발을 내질렀다.
퍼벅.
“컥!”
“크윽!”
능화영의 발에 얼굴을 강타당한 독안마제와 패도혈왕은 신음을 내뱉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독안마제와 패도혈왕은 능화영의 발에 실린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뒤로 주욱 밀려났다.
탁.
능화영은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마치 기예와 같은 놀라운 모습에 사람들은 그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흠.”
능화영은 허공에 가볍게 검을 뿌렸다.
“초식은 별것 없구나. 그럼 이제부터 내력을 한번 겨뤄 볼까?”
호암상단의 내정 부총관과 쌍검문 문주 담위걸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 이제까지 한 건 뭐란 말인가?
무시무시한 내력이 실렸던 지금까지의 공방을, 능화영은 그저 초식 대결로 치부하고 있었다.
“너희, 내력은 좀 쓰냐? 자고로 남자는 힘이 좋아야 한다고 우리 할망, 아니 스승님이 그러시던데.”
독안마제와 패도혈왕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망신을 당한 셈이라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패도혈왕은 살기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조소를 흘렸다.
“크흐흐, 네가 자초한 일이니 본좌를 원망 마라.”
독안마제 역시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반드시 네년의 목에 칼을 박아 주겠다.”
살벌한 그들의 말에도 능화영은 피식 웃었다.
“말로?”
패도혈왕과 독안마제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더 이상 말은 필요 없었다.
그들은 천천히 내력을 끌어 올렸다.
우웅.
패도혈왕의 대도와 독안마제의 검이 울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지금까지와는 사뭇 달라서 능화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아아아아!”
“우우우웃!”
패도혈왕과 독안마제의 눈동자가 붉게 변하고 온몸의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그들의 검과 도에서 검붉은 기운이 스물스물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거, 검기다!”
누군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능화영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호오. 흉내는 낼 줄 아는구나. 하지만 그걸로 검기라기엔 한참 부족하지.”
피식 웃으며 능화영은 검을 들었다.
웅.
나지막한 울음과 함께 짙은 초록빛 기운이 그녀의 검에 일렁였다.
귀를 찢는 기합도, 핏줄이 터질 것처럼 내력을 모으는 것도 없었다.
“검기는 이런 거다.”
비릿하게 웃으며 능화영이 말했다.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쌍검문의 담위걸과 등범유도 마찬가지였다.
“……거, 검기발현이라고?”
담위걸은 믿을 수가 없었다.
능화영이 검기를 발현했다는 건 그녀의 무위가 거대 세가의 가주에 필적한다는 의미다.
고수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였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으득.
패도혈왕과 독안마제는 누구랄 것도 없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키기는 늦었다.
“하아!”
후욱.
패도혈왕의 기합과 함께 그들은 능화영을 향해 몸을 날렸다.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검과 대도가 허공에 잔상을 흩뿌리며 능화영의 눈앞으로 짓쳐 들어갔다.
하지만 능화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콰과과곽.
‘됐다!’
패도혈왕의 눈동자에 득의의 빛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쉭.
바람이 스치는 듯 작은 소리가 패도혈왕의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
그 결과는 즉시 패도혈왕과 독안마제의 눈앞에 나타났다.
훅.
그들의 검과 대도에 일렁이던 검붉은 기운이 사라졌다.
그리고 끔찍한 충격이 두 사람을 덮쳤다.
“컥!”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능화영을 향한 공격 같은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검과 대도에 쏟아부었던 자신들의 내력이 역류하며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텅, 카강.
반으로 잘린 검과 대도가 땅에 떨어지고 패도혈왕과 독안마제는 그제야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으으으윽!”
절규하던 패도혈왕과 독안마제는 갑자기 울컥 피를 토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패도혈왕과 독안마제는 눈이 뒤집힌 채 자신들이 토한 피 웅덩이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털썩.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쓰러진 패도혈왕과 독안마제를 바라보았다.
스릉.
능화영은 검을 거두었다.
두 마두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살려는 줬다.”
슥.
능화영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득, 자신을 쳐다보는 수많은 시선들을 마주했다.
흠칫 놀라며 능화영이 말했다.
“왜, 왜들 그러는가? 내가 뭐 이상한 행동이라도 했나?”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자신이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는 것을 제법 신경 쓰는 듯했다.
“아닙니다. 수고하셨…….”
운현이 능화영에게 말하려던 때였다.
“능 언니! 뒤요!”
금혜린이 다급하게 말했다.
능화영은 즉시 뒤를 돌아보았다.
쓰러져 있던 독안마제가 고개를 들고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흥!”
능화영은 바로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때였다.
딱.
작은 소리와 함께 독안마제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힘없이 피 웅덩이에 다시 고개를 박았다.
철벅.
그리고 사방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털썩, 턱.
삼십여 명의 쌍검문 문도도, 십여 명의 호암상단의 호위도, 심지어 금가장의 제자들까지 슬며시 눈을 감더니 스르륵 쓰러졌다.
쌍검문 문주 담위걸과 등범유, 그리고 호암상단의 내정 부총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우와.”
능화영이 혀를 내두르며 객옹을 쳐다보았다.
“놀라운 솜씨네. 객옹 어르신.”
감탄하던 능화영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장 센 놈들은 내가 처리했군.”
객옹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의기양양한 능화영을 바라보며 객옹이 조용히 말했다.
“수는 내가 더 많다.”
운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객옹이 대꾸를 했다는 건 능화영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하지만 능화영은 객옹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런 게 어디 있나? 이들을 다 합쳐도 저 둘에는 안될 텐데. 게다가 애초부터 사람 수로 한다는 말도…….”
“하나 놓쳤잖아.”
객옹의 말에 능화영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그런 놈 정도는 어차피…….”
하지만 능화영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금 소저!”
일아영이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운현은 즉시 손을 뻗어 쓰러지는 금혜린을 받았다.
사락.
금혜린의 가냘픈 몸이 운현의 팔에 안겼다.
그녀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게다가 열이 오르는지 얼굴이 온통 붉었다.
“어르신!”
“옮겨라.”
객옹이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하겠네!”
얼른 다가온 능화영에게 운현은 금혜린을 넘겼다.
조심스레 금혜린을 안은 능화영이 객옹을 뒤따랐다.
운현도 발을 옮기려는데 일아영이 물었다.
“운 숙부. 이들은 어떻게 해야…….”
그녀의 곤란한 표정 뒤로 쓰러진 사람들이 보였다.
운현은 장주 금사열에게 말했다.
“장주님, 이자들을 묶어서 관아에 넘겨주시겠습니까? 뒷일은 관이 알아서 할 테니까요.”
“알겠네. 그보다 내 딸아이를 부탁하네.”
마음 같아서는 딸에게 가 보고 싶었지만 장주의 책임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 마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운현은 객옹의 뒤를 따라 급히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금가장의 문 앞에는 잠든 사람들의 나지막한 숨소리만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