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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30화 (430/530)

430화. 야합(野合)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는 축객령이었다.

‘당장 떠나라’는 단호한 말도, ‘청하지도 않았는데 남의 집 앞에서 무슨 소란이냐’는 명분도 그러했다.

누가 들었다면 집 앞의 불한당이라도 쫓아내는 것 같은 말투였다.

“흐흐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호암상단과 함께 온 패도혈왕이었다.

그는 운현이 아니라 그 뒤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 좋군. 다들 훌륭하잖아? 이 기회에 처첩을 한꺼번에 들이는 것도 괜찮겠어.”

패도혈왕의 음흉한 시선은 능화영과 일아영, 그리고 금혜린을 향해 있었다.

일아영은 흠칫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패도혈왕이 긴 수염을 어루만지며 비릿하게 웃는 모습은 혐오감이 들 정도였다.

그때, 호암상단의 내정 부총관이 능화영을 지목하며 말했다.

“저, 저 여인이 바로 그 고수요!”

“쯧.”

패도혈왕은 혀를 찼다.

그는 이미 능화영을 내심 경계하고 있었다.

모른 척하고 상대를 도발할 작정이었는데 내정 부총관이 대놓고 말을 해 버린 것이다.

뭘 모르는 건 쌍검문의 문주 담위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애들을 두드려 팬 고수가 저 여자냐?”

그는 행동대장 격인 등범유에게 물었다.

쌍검문의 문도들과 함께 서 있던 등범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담위걸은 독안마제를 돌아보았다.

“들으셨소? 저 여자가…….”

“저자는 누구냐?”

독안마제가 깡마른 손을 들어 누군가를 지목했다.

담위걸은 독안마제가 가리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맨 뒤에서 한 노인이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한눈에도 그 분위기가 제법 범상치 않아 보이는 노인이었다.

담위걸은 눈살을 찌푸리며 등범유에게 물었다.

“저 노인은 누구지?”

“……잘 모르겠습니다. 허나 따로 금가장에 고수가 합류했다는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등범유의 대답에 독안마제는 혀를 찼다.

기본적인 것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쌍검문의 처사가 몹시 못마땅했다.

“은자를 더 드리겠소.”

담위걸이 얼른 말했다.

독안마제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의 불편한 기색은 확실히 누그러졌다.

이때다 싶은 담위걸이 얼른 외쳤다.

“너 이노옴, 금가야아!”

내력을 실은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담위걸은 금가장 장주 금사열에게 말했다.

“네가 내 호의를 짓밟고 감히 쌍검문의 제자들을 상하게 하였으니, 이 큰 죄를 어찌 감당하려 하느냐! 당장 무릎을 꿇고 엎드리지 못할까!”

금사열의 눈동자에 분노가 서렸다.

“금가장을 바치라는 말이 어찌 호의란 말이냐! 차라리 서서 죽을지언정 결단코 쌍검문에는 무릎 꿇지 않겠다!”

수염까지 푸들푸들 떨며 금사열이 외쳤다.

그때였다.

“장주의 말이 참으로 옳소. 어찌 금가장이 쌍검문의 아래로 들어가겠소이까?”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바로 호암상단의 내정 부총관이었다.

“금 장주, 그래도 우리는 한때 같은 배를 탔던 사이 아니오? 야박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 호암상단으로 오시오. 마침 우리 상단 사람인 일 소저도 함께 있는 것을 보니 이야기가 어렵지는 않을 듯하오.”

내정 부총관은 일아영을 알고 있었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일아영과 금사열이 함께 있으니 던져 본 말이었지만 쌍검문 문주 담위걸은 화들짝 놀랐다.

‘이런 제길! 호암상단이 벌써!’

호암상단 사람이 이미 금가장에 있다니,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담위걸은 즉시 내정 부총관에게 외쳤다.

“이것은 무림의 일이니 호암상단은 이 일에서 손을 떼시오!”

그 순간 내정 부총관 옆에 있던 패도혈왕이 담위걸을 쏘아보았다.

‘헉!’

그 강렬한 눈빛에 담위걸은 흠칫했다.

흰머리가 완연한 패도혈왕이건만 그 눈빛은 마치 호랑이를 마주하는 듯 위압적이었다.

문주 담위걸이 등범유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저, 저자는 누구냐?”

“모, 모르겠습니다. 기세를 보아하니 아마도 사파의 고수 같은데…….”

등범유와 담위걸은 독안마제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독안마제는 대답 대신 가볍게 코웃음을 흘렸다.

그 반응에 담위걸의 표정이 밝아졌다.

담위걸은 다시 위세등등한 얼굴로 호암상단의 내정 부총관을 노려보았다.

내정 부총관 역시 패도혈왕에게 나지막이 물었다.

“쌍검문이 고수를 데려온 것 같은데, 누구인지 아시오?”

“신경 쓸 것 없다.”

패도혈왕은 툭 던지듯 말했다.

“네가 약조만 지키면 모든 건 다 잘될 테니까.”

문득 내정 부총관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가다듬고 쌍검문을 노려보았다.

“쌍검문이야말로 당장 손을 떼시오! 이것은 호암상단과 금가장의 일이오!”

“뭐라고! 네가 감히 쌍검문을 모욕하겠다는 것이냐!”

쌍검문 문주 담위걸이 날카롭게 노려보았지만, 패도혈왕과 십여 명의 호위를 힘입은 내정 부총관은 침만 꿀꺽 삼켰을 뿐 물러서지 않았다.

“지랄들 하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의 주인에게 향했다.

말을 내뱉은 사람은 바로 능화영이었다.

“떡 줄 놈은 생각도 않는데 왜 자기들끼리 난리야? 미친놈들.”

옆에 있던 금혜린이 당황한 표정으로 능화영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우셨어요?”

“왜? 내가 이상한 말을 했나?”

능화영은 의아한 눈빛으로 금혜린을 쳐다보았다.

“바, 방금 지, 지랄이라고…….”

입 밖에도 내기 부끄러운지 금혜린은 말을 흐렸다.

하지만 능화영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내가 좀 틀리면 스승님이 나보고 항상 그랬는데? 지랄한다고.”

“그, 그런…….”

금혜린은 당혹했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내뱉을 말은 아니었지만, 스승님이 했다고 하니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크흐흐흐. 고년 맹한 것이 제법 귀엽구나. 네 사문이 어디냐?”

패도혈왕이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능화영의 눈썹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이상하군.”

그녀는 패도혈왕은 노려보며 말했다.

“네가 귀엽다는 말을 하니까 왜 이렇게 짜증이 나지? 이 못생긴 노인네야.”

금혜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노인네’라는 단어가 무례하다는 걸 능화영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걸로 패도혈왕의 막말에 상대가 될 리가 없었지만 패도혈왕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감히 내가 누구인 줄 알고 그따위……!”

“모른다.”

능화영은 패도혈왕의 말을 끊었다.

“대체 왜 다들 자기를 알 거라 생각하는 거냐? 정작 내가 유일하게 인정할 만한 사람은 그런 말을 안 했는데 말이야.”

패도혈왕의 눈이 빛났다.

“그게 누구냐?”

“객옹 어르신. 바로 이 사람이다.”

능화영이 턱짓으로 가리킨 사람은 뒤에 서 있던 객옹이었다.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고, 패도혈왕과 독안마제의 눈동자가 빛났다.

상대를 격분시켜 정체를 캐내려는 패도혈왕의 수법이 조금이마나 먹혀든 것이다.

‘객옹?’

‘누구지?’

패도혈왕과 독안마제는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객옹이라는 별호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폐쇄적인 광서성에서 활동하던 독안마제는 물론, 무림맹 초창기의 공백을 틈타 악행을 저질러 온 패도혈왕도 짚이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능화영이 인정할 만한 사람이라면 고수가 틀림없었다.

그사이, 장주 금사열이 운현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운 공자. 아무래도 저자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듯하니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 좋겠소.”

이리 같은 쌍검문과 호랑이 같은 호암상단은 누가 금가장을 차지할 것인가를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셋이 서로 균형을 이룬 셈이니, 호랑이와 이리를 싸우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안 돼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금사열에게 답했다.

그녀는 바로 금혜린이었다.

“저 둘은, 아니 두 사람은 서로 싸우지 않아요.”

순간 운현의 눈동자가 빛났다.

“어째서입니까?”

금혜린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패도혈왕과 독안마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적의가 전혀 없어요. 아니, 오히려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한 가운데 똑똑히 울려 퍼졌다.

쌍검문의 문주 담위걸이 대번에 인상을 썼다.

“무슨 개소리냐! 주제에 내분을 유도하려는가 본데……!”

“흐흐.”

독안마제의 조소가 담위걸의 말을 끊었다.

“대단히 영악한 계집이군.”

자신의 입술을 핥으며 독안마제가 말을 이었다.

“형님. 저년은 내게 주시오. 내가 직접 죽이고 싶소.”

“그건 안 되지.”

패도혈왕은 인상을 썼다.

“저년이 있어야 내가 금가장을 삼킬 명분이 서지 않겠나? 하지만 금가장이 내 것이 되고 나면 기꺼이 자네에게 주겠네. 클클클.”

두 사람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제일 크게 당황한 사람은 쌍검문의 담위걸과 등범유였다.

“이, 이게 무슨 소리요? 독안마제! 설마 당신이…….”

스릉.

독안마제가 검을 뽑았다.

그 칼날이 담위걸의 턱 아래에서 날카롭게 빛났다.

‘윽!’

담위걸은 움찔했다.

“선택해라.”

독안마제가 말했다.

그의 외눈은 문주인 담위걸이 아니라 등범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놈 밑에서 구차하게 살지, 아니면 나와 함께 금가장과 쌍검문을 차지하고 부귀영화를 누릴지 말이다.”

등범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함께 온 삼십여 명의 문도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사람은 호암상단의 내정 부총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패도혈왕을 돌아보며 물었다.

“서, 설마 계약을 어기고…….”

패도혈왕은 피식 웃었다.

“걱정할 것 없다. 계약은 변한 것이 없으니까.”

그 말에 내정 부총관은 안심했다.

하지만 패도혈왕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더 좋은 방법이 생긴 것뿐이지. 금가장을 삼키려고 쌍검문과 싸우는 것보다 둘 다 먹는 게 훨씬 좋지 않겠나? 안 그래? 크흐흐흐.”

노련한 패도혈왕은 쌍검문에 대해 알아보다가 독안마제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다.

두 마두가 야합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쌍검문과 금가장을 차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합법적으로 신분을 위장할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호암상단과 본좌의 긴밀한 관계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아, 내게 만들어 주기로 했던 신분은 하나 더 준비하고. 알겠나?”

패도혈왕은 내정 부총관을 은근히 노려보며 말했다.

내정 부총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상황은 금가장을 차지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문제였다.

금가장과 쌍검문이 사실상 하나로 통합되고, 패도혈왕뿐 아니라 독안마제 같은 마두가 둘이나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이곳 장사는 물론 호남의 무림이 크게 요동칠 것이 뻔했다.

하지만 내정 부총관 자신만 입을 다문다면 표면적으로 변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호암상단에는 말이다.

“대답이 왜 없을까?”

패도혈왕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가족이 어찌 되든 상관없나 보지?”

‘헉.’

내정 부총관은 화들짝 놀랐다.

“아, 알았소. 어쨌든 금가장만 확실히 접수해 주시오.”

“그야 물론이지.”

웃음을 머금으며 패도혈왕이 말했다.

“중요한 고객의 청을 내 어찌 외면하겠나? 으하하하하.”

패도혈왕은 호탕하게 웃었다.

독안마제 역시 비릿한 미소가 짙어지고 있었지만, 쌍검문의 문주 담위걸의 표정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지랄하고 있네.”

낭랑한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천일검 능화영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빛났다.

“너희는 오늘 죽……. 아, 참.”

말하던 능화영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았다.

“자, 자네가 전권을 가졌지. 그렇지 않은가?”

능화영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애써 운현과 눈을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덕분에 능화영의 시선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내가 본래 기억은 잘해서……. 저기, 그, 내가 저놈들을 죽이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지만 말하는 능화영의 태도는 영락없이 수줍은 아가씨였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뜻대로 하십시오.”

“그래?”

능화영은 눈을 들어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생기로 넘쳐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진짜 죽이면 현이가 상심할 거다.”

문득 객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건 경험에서 우러나온 객옹의 진솔한 충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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