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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29화 (429/530)

429화. 금가장의 이변

호남성 장사, 금가장 저택.

금가장을 찾은 운현과 객옹, 그리고 일아영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장주인 금사열이 직접 문 앞까지 나와 일행을 맞이했고 딸 금혜린과 천일검 능화영 역시 일행을 반겼다.

시간이 낮이라 연회 같은 것은 없었지만, 가볍게 식사를 하자며 내온 음식들은 하나같이 정성이 가득 들어간 것이었다.

노년의 장주 금사열은 과거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무척이나 환한 웃음을 머금었고, 운현 역시 오랜만에 일충현을 떠올리며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나누며 일충현의 이야기를 이어 가던 무렵이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장주 금사열이 물었다.

“그러면 황궁을 나온 이후에는 어떻게 지냈는가?”

운현은 찻잔을 매만지며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림맹에 잠시 몸을 담았었습니다.”

“무림맹?”

“운 숙부는 무림맹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었어요.”

일아영이 옆에서 말을 보탰다.

금사열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혹시 무림맹이 무너질 때도……?”

“네. 그렇습니다.”

“허어.”

금사열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랬군. 고생 많았네.”

그는 물론 노부인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지금은 창룡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맹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일아영은 물론 일충현의 부인도 운현이 창룡맹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정도만 알 뿐이니까.

“그렇군. 다행일세.”

금사열은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혹시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는지 물어도 되겠나?”

“아직 없습니다.”

운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마음에 끌리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 말에 일아영은 물론 금혜린과 능화영의 눈이 빛났다.

금사열은 살짝 실망한 듯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노년의 금사열은 찻잔을 매만지며 잠시 말이 없었다.

노부인 역시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운현은 나지막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금사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결심한 듯 운현을 바라보았다.

“내가 운 공자에게 무엇을 숨기겠나? 우리 금가장은 지금 대단히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다네.”

금사열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난데없이 쌍검문이 우리를 핍박하더니, 호암상단까지 금가장을 넘기라 하고 있네.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둘이 동시에 달려드니, 참으로 앞날이 캄캄할 따름이네.”

“능 여협의 무공이 매우 고강하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운현의 말에 금사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네. 허나 검만으로 어찌 호암상단을 상대할 수 있겠나? 호암상단의 눈 밖에 나면 장사, 아니 호남성에 아예 발을 붙일 수 없을 텐데 말일세.”

선조 대대로 뿌리를 내렸던 장사를 떠나는 것은 금가장의 실질적인 끝을 의미했다.

노년의 금사열에게는 생면부지의 타지에서 새로 시작할 만한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간 베풀어 온 선행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이 된 것에 대한 짙은 회의도 있었고 말이다.

“그래서 내 운 공자에게 무리한 부탁을 하려고 하네.”

“아버지!”

금혜린이 놀란 얼굴로 말했지만 금사열은 멈추지 않았다.

“내 딸 혜린이와 능 여협을 당분간 운 공자께 의탁할 수 있겠나?”

“제게 말입니까?”

운현의 반문에 금사열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악양의 일 대협 본가로 데리고 가도 좋고, 아예 다른 성으로 가도 좋네. 아니, 가능하면 이곳에서 멀리 떠나게 해 주게.”

“아버지! 저는 그럴 수…….”

“나도 그리할 수 없네.”

능화영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전대의 은혜를 갚기까지는 절대 이곳을 떠나지 않겠네.”

“은혜는 이미 갚았소이다, 능 여협.”

금사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외면하던 때에 불원천리 찾아와 준 여협의 의기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소이다. 참으로 감사하오, 능 여협.”

말하는 금사열의 표정에는 짙은 회한이 배어 있었다.

“허나 우리 때문에 능 여협에게 또 다른 은원을 지울 수는 없소. 능 여협은 더 큰 곳으로 나가 이름을 떨쳐야 하오. 운 공자라면 능히 믿을 만하니, 부디 내 뜻을 따라 주시오.”

“안 됩니다.”

그건 운현의 목소리였다.

금사열은 물론 금혜린과 능화영 그리고 일아영의 시선이 일제히 운현을 향했다.

“장주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저 역시 형님의 친우이신 장주님을 기꺼이 도울 마음이 있습니다. 허나 이런 식으로는 아닙니다.”

“그건…….”

운현은 금사열의 말을 듣지 않고 객옹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 방법이 없습니까?”

“없지는 않다.”

툭 던지듯 객옹이 답했다.

“이곳엔 저 아이가 있다. 상단이건 뭐건, 절대로 무시할 수 없지.”

객옹이 턱짓으로 가리킨 사람은 바로 천일검 능화영이었다.

그의 말처럼 검기발현의 고수를 무시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 상황을 타개하는 건 별개 문제다. 수틀리다고 무조건 다 죽일 수는 없으니까. 상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끈질긴 인내와 노련한 협상력이 필요하지. 때로는 엄포를 놓을 만한 배포도 있어야 하고.”

슥.

객옹은 장주 금사열을 바라보았다.

“문제는 그럴 의지가 있는가 하는 것이겠지만.”

금사열은 쓴웃음을 지었다.

객옹의 말은 금사열의 속내를 정확히 짚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노년의 장주 금사열에게 아무런 열정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미 금가장과 마지막을 함께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운현에게 딸과 능화영의 안전을 의탁한 것이 그의 마지막 미련이었던 것이다.

“그렇군요.”

운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찻잔을 매만지던 운현은 문득 눈을 들어 금혜린을 바라보았다.

“소저께서는 저를 믿을 수 있습니까?”

난데없는 말이었지만 금혜린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믿어요. 하지만 이 문제는…….”

“어째서요? 저를 알지도 못하시잖습니까?”

의아한 표정을 짓던 금혜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제가 진심으로 드릴 수 있는 대답은 이것이겠네요.”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금혜린이 말했다.

“공자님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거든요.”

그녀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금혜린은 속으로 아차 싶었다.

금혜린은 급히 능화영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능화영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가요?”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꽃같이 아름다운 아가씨가 믿는다고 말했는데도 운현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살짝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운현은 장주 금사열에게 말했다.

“장주님. 제게 생각이 있으니 이 상황을 맡겨 주시지 않겠습니까?”

금사열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운현은 더 이상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알았네.”

한숨을 쉬며 금사열은 말했다.

“금가장에 대한 전권을 자네에게 주겠네.”

그의 말은 파격적이었다.

금혜린이 놀라는데 금사열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다만 일이 여의치 않을 경우, 혜린이와 능 여협의 신변은 자네가 맡아 주게.”

“알겠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금사열과 노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맙네.”

금사열의 주름진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일아영에게도 말했다.

“소저에겐 불편한 이야기였을 텐데, 끝까지 들어 줘서 고맙네.”

일아영이 호암상단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은 금사열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아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혹시 저도 도울 것이 있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금사열은 미소를 지었다.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후원으로 자리를 옮기세. 운 공자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만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탁탁탁.

“장주님!”

늙은 총관이 급히 달려왔다.

새파랗게 질린 그의 표정은 심상치 않은 일이 터졌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싸, 쌍검문이 쳐들어왔습니다!”

“뭐?”

덜컹.

금사열이 벌떡 일어섰다.

“아니, 대답을 달라고 한 날짜는 아직 보름도 더 넘게 남아 있지 않았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총관이 다급하게 말했다.

“호암상단에서도 찾아왔습니다. 칼을 든 무인들이 십여 명이나…….”

금사열의 안색이 변했다.

“대체 이게 무슨…….”

같은 날에 쌍검문과 호암상단이 동시에 찾아오다니,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공교로운 일이었다.

“가지요.”

운현의 목소리가 당혹해하는 금사열의 귀에 들렸다.

덜컹.

자리에서 일어나며 운현은 총관에게 말했다.

“안내해 주십시오. 장주께서 조금 전 제게 금가장의 전권을 맡기셨으니 이제 이건 제 일입니다.”

늙은 총관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은 표정으로 장주 금사열과 운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금사열은 한숨을 쉬었다.

“가세.”

“나도 가겠네!”

능화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그녀의 손은 이미 검 손잡이에 얹혀 있었다.

“좋습니다. 다만 어떠한 경우라도 제 말을 따라 주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운현의 말에 능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그리하지.”

“저도 갈게요.”

일어선 사람은 일아영이었다.

“호암상단이라면 제 말이 통할지도 몰라요.”

운현이 보기엔 그럴 것 같지 않았지만 일아영의 고집을 꺾을 자신은 없었다.

“저도요.”

이번엔 금혜린이었다.

“저희의 일을 공자께 떠넘기고 어찌 나 몰라라 할 수 있겠어요? 금가장이 책임져야 할 일이 있다면 마땅히 제가 지겠어요.”

그녀의 말은 지극히 정당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가시지요.”

아직도 주저하던 총관은 장주 금사열이 고개를 끄덕이자 얼른 일행을 안내했다.

운현과 능화영이 총관을 뒤따르고, 일아영과 금사열 부부가 그들을 따라 발을 옮겼다.

차를 음미하고 있던 객옹은 그제야 찻잔을 내려놓았다.

탁.

객옹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금가장의 정문에서는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갑작스레 쳐들어온 불청객을 막아선 금가장 제자들과 삼십여 명의 쌍검문 문도들은 물론, 호암상단의 호위로 함께 온 십여 명의 무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쌍검문의 문주, 담위걸은 금가장 제자들이 아닌 호암상단 내정 부총관을 쳐다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

‘저 개자식들이 왜 하필 오늘…….’

그렇지 않아도 호암상단이 손을 쓰기 전에 일을 끝내려고 서둘렀는데, 하필 금가장 정문 앞에서 맞닥뜨릴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젠장, 독안마제에게 돈까지 더 얹어 주며 날짜를 당겼건만…….’

은자를 더 쓴 보람도 없이 호암상단을 마주치고 말았다.

어찌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지만 먹이를 눈앞에 두고 호랑이를 마주친 셈이니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이건 말이 다른데?”

옆에 선 독안마제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호처럼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독안마제는 담위걸을 노려보았다.

“호암상단이 있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잖은가?”

담위걸의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독안마제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보상은 결코 섭섭지 않게 해 드리겠소. 절대 저들에게 금가장을 넘겨선 안 되오.”

“흥.”

독안마제는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면야 상관없고.”

거만한 그 모습에 담위걸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추가로 나가게 될 은자를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그것은 호암상단의 내정 부총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끙, 쌍검문이 벌써 움직일 줄이야. 간신히 패도혈왕을 설득했건만…….’

패도혈왕을 움직이는 건 쉽지 않았다.

장주 자리를 약속했는데도 패도혈왕이 느물거리며 시일을 끌었기 때문이다.

아쉬운 쪽이 호암상단이라는 걸 산전수전 다 겪은 마두인 패도혈왕이 단박에 간파한 것이다.

“벌써 쌍검문이 나선 건가? 저들은 나중이라더니?”

패도혈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그러게 말이오. 허나 어차피 상대해야 할 자들이니…….”

“금가장의 여식은 어디 있나? 내 안사람이 될 여자 말이야.”

이미 나이 많은 패도혈왕이건만, 그의 눈에는 노골적인 탐욕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부총관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야 금가장을 차지하면 자연히…….”

“예쁘다는 건 정말이겠지? 거짓말이면 가만히 있지 않아.”

패도혈왕은 은근슬쩍 협박까지 했다.

부총관의 안색이 변했지만 패도혈왕의 기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분명 패도혈왕을 고용한 사람은 부총관 자신인데도 말이다.

“그, 그건…….”

덜컹.

그때 금가장의 정문이 열렸다.

십여 명의 금가장 제자들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노년의 장주 금사열이 아니었다.

문 안에서 나온 사람은 바로 단정한 차림의 문사였다.

살기등등한 수십여 명의 무사들 앞에서도 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청하지도 않았거늘 남의 집 앞에서 이 무슨 소란입니까?”

운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당장 떠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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