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428화 (428/530)

428화. 각자의 사정

호남성 장사, 쌍검문.

집무실에 앉아 있던 노년의 문주 적혈쌍검 담위걸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공손세가가 철수했다니?”

쌍검문의 행동대장 격인 등범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계림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문주님.”

“그래?”

문주 담위걸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우리 일에 지장은 없겠지?”

공손세가의 본가가 있는 강서성은 이곳 호남성과 접하고 있었다.

하지만 등범유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문제 없습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건 당분간 공손세가는 다른 일에 신경 쓸 틈이 없을 테니까요.”

담위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다행이고. 그보다 금가장에 호암상단이 찾아갔다면서?”

문주인 담위걸은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왔다.

쌍검문에 공손세가는 어차피 구름 위의 존재나 마찬가지니까.

“그렇습니다. 이학붕이 금가장을 삼키고 자신의 업적으로 삼으려는 모양입니다. 지금 호암상단의 주인 자리를 두고 경쟁이 치열하지 않습니까?”

이학붕은 죽은 이호암의 사촌이자 호암상단의 내정을 총괄하는 내정총관이다.

평소에도 야심을 숨기지 않던 그는 이 기회에 호암상단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설마 금가장이 호암상단에 넘어가지는 않겠지? 지금은 허울뿐이라지만 그래도 금가장 아닌가?”

대대로 덕을 베풀어 온 금가장의 명성과 인망은 제법 두터웠다.

비록 그 명성과 인망이 현실적인 어려움 앞에서는 별 도움이 되지 못했어도 말이다.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호암상단이 본격적으로 손을 쓰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합니다.”

등범유의 말에 담위걸이 인상을 썼다.

그건 결국 과감한 무력행사를 하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제 보냈던 제자들이 박살이 나서 돌아왔잖나? 사문을 알 수 없는 여고수가 금가장에 합류했다고…….”

적당히 윽박지르려고 보냈던 쌍검문의 제자들은 능화영의 검 앞에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등범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여고수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독안마제를 이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문주 담위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독안마제라니?”

독안마제는 광서성에서 손꼽히는 마두 중 한 명이었다.

사파들이 득시글거리는 광서성에서 살아남아 입지를 다진 만큼 실력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런 독안마제를 어떻게 끌어들인단 말인가?

“지금 그가 이곳 장사에 있습니다. 태평맹의 강남 공략으로 근거지를 잃었기 때문이지요.”

담위걸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태평맹이 본격적으로 나서자 광서성의 마두들은 근거지를 잃고 주변 지역으로 흩어졌다.

이곳 호남성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부유한 지역이라 마두들이 한 번쯤 노려볼 만한 곳이었다.

비록 관의 위세가 강해서 광서성처럼은 안 되겠지만 말이다.

“……만나 봤나?”

“이미 사람을 통해 의향을 떠보았습니다. 은자만 충분히 쥐어 준다면 얼마든지 움직이겠다고 합니다.”

“그래?”

문주 담위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독안마제는 쌍검문이나 금가장이 감당하기 벅찰 정도의 상대다.

행여 딴마음을 먹지 않을까 불안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확실하기도 하다.

“정말 은자면 된다던가?”

“네. 이곳은 관의 위세가 너무 강해서 싫다고 하더군요.”

담위걸은 납득했다.

지세가 험준한 광서성이니 마두들이 마음껏 날뛰었지, 이곳 호남성은 절대 만만한 곳이 아니다.

“알았네. 얼마가 들든 상관없으니 무조건 끌어들이게. 은자야 넘쳐나지 않나?”

등범유의 얼굴이 환해졌다.

독안마제라면 금가장 문제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알겠습니다.”

등범유는 고개를 숙여 문주의 뜻을 받들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갔다.

독안마제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그를 붙들어야 했다.

탁.

등범유가 집무실을 나가고 홀로 남은 문주 담위걸은 조소를 흘렸다.

“흐흐, 이거 웃기는군.”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담위걸이 중얼거렸다.

“태평맹 탓에 쫓겨난 독안마제가 태평맹의 돈 앞에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다니 말이야. 흐흐흐.”

생각할수록 웃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담위걸의 조소는 곧 득의의 미소로 변해 갔다.

하늘이 자신을 돕는 것 같았다.

***

장사, 호암상단 내정총관 집무실.

상단의 내정을 총괄하는 내정총관 이학붕은 눈살을 찌푸렸다.

“금사열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부총관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네. 채무 증서를 들고 찾아갔으나 하인들을 때리고 내쫓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 호암상단이 빚을 갚아야 한다고…….”

“흥!”

이학붕의 코웃음에 부총관이 움찔했다.

“금사열이 미쳤군. 능력도 안 되면서 돈을 내놓으라니. 게다가 감히 호암상단의 사람을 때리고 내쫓아?”

먼저 행패를 부린 건 호암상단의 하인들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금사열이 자신의 말에 불복했다는 사실이다.

“능력이 안 되면 조용히 하라는 대로나 할 것이지, 제 분수조차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 금가장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지.”

“허나 새로 합류한 고수가 심상치 않습니다. 사문이 밝혀지지 않은 여고수인데…….”

이학붕의 눈썹이 꿈틀했다.

“고수라고? 아직 금가장에 의리를 지킬 만한 자들이 남아 있었나?”

“그게, 전대의 인연이라고 합니다.”

이학붕은 혀를 찼다.

대대로 덕을 베풀어 온 금가장의 저력은 만만치 않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금가장을 노리는 것이지만 말이다.

“금가장은 무조건 우리 것이 되어야 하네. 이유걸을 제치려면 말일세.”

이학붕은 눈을 빛냈다.

호암상단의 주인인 이호암이 죽고, 이학붕은 자신이 상단의 다음 주인이 되리라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호암의 아들이자 젊은 이유걸이 갑작스레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학붕이 금가장을 탐내는 것은 바로 이유걸에 대항하기 위한 중요한 패이기 때문이다.

“허나 금가장이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이제는 과거의 명성만 남은 셈인데…….”

“모르는 소리 말게. 과거의 명성이라 더 좋은 걸세.”

본래 호암상단은 남궁세가와 손을 잡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다행히 봉문을 풀었으나 당장은 자신들의 일만으로도 바빴다.

이 시점에 이학붕이 금가장을 흡수하고 앞으로 자체적인 무력을 갖추겠다고 하면 장로들로부터 호응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장로들은 아직도 예전 금가장의 명성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쯧, 쌍검문도 금가장을 노린다고 하더니 갑자기 금가장에 고수라…….”

이학붕은 손가락으로 고급스러운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무난히 끝날 줄 알았던 일이 난데없이 난관을 둘이나 만난 셈이다.

침묵하던 부총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말끝을 흐린 건 무언가 걸리는 점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학붕이 고개를 들었다.

“말해 보게.”

이학붕의 말에 부총관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패도혈왕이라는 자가 있습니다. 본래 은거하던 사파의 고수인데 영웅맹이 무너진 이후 우연히 이곳까지 흘러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학붕은 알아차렸다.

영웅맹이 득세할 때 세상에 나왔다가 오갈 데 없이 되어 버린 전대 마두들 중 한 명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실력은 확실합니다. 과거 무림맹에서 추살령을 내렸을 정도니까요. 다만 원하는 것이 그…….”

“돈인가?”

“그게 아니라 금가장의 장주 자리를 달라고 합니다.”

이학붕이 인상을 썼다.

부총관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금가장을 삼키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장주 자리를 주면 호암상단의 충실한 수족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정확히는 ‘긴밀한 협력 관계’라고 말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호암상단 아래로 들어오겠다는 의미는 마찬가지니까.

‘금가장의 장주 자리라…….’

패도혈왕이 금가장을 원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이곳 장사에서 합법적인 기반을 잡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신임 장주가 패도혈왕이라면 보기가 좋지 않을 텐데?”

“당연히 별호는 바꿀 것입니다. 이름은 물론 신분도 위장을 해야지요.”

부총관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금가장에 미혼의 여식이 있으니 데릴사위로 들이면 명분도 확실합니다. 게다가 그렇게 되면 우리도 패도혈왕의 약점을 쥐는 셈이 아닙니까?”

이학붕의 눈동자가 빛났다.

금가장의 신임 장주가 전대 마두라는 건 확실히 치명적인 약점이다.

“어차피 누군가는 장주로 세워야 합니다. 패도혈왕이라면 쌍검문도 감히 넘볼 생각을 못 할 것입니다.”

부총관의 계획은 이학붕의 마음에 들었다.

특히 금가장에 따른 여러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된다는 점이 말이다.

“좋아. 그렇게 하게.”

결정은 빨랐다.

부총관은 고개를 조아렸다.

이학붕이 고개 숙인 부총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호암상단의 총회합이 얼마 남지 않았네.”

상단의 주요 인물들은 물론 수많은 귀빈이 초청될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 호암상단의 새로운 주인이 결정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전에 모든 것이 끝나 있어야 하네. 알겠는가?”

“네, 내정총관님.”

‘내정총관’이라는 호칭이 오늘따라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지 않을 것이라고, 이학붕은 그렇게 확신했다.

***

호남성 악양, 일충현 본가.

탁자 앞에 앉은 운현은 한 장의 서찰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차를 마시던 객옹이 물었다.

바스락.

운현은 조용히 서찰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조금 놀라워서 그렇습니다.”

그 서찰은 금가장에서 온 초대장이었다.

장주 금사열이 보낸 그 서찰에는 놀랍게도 금가장과 일충현의 인연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저도 깜짝 놀랐어요.”

일아영이 찻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금가장이 우리와 인연이 있었다니요. 게다가 어머니께서도 알고 계셨다니…….”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 먼저 알려 준 사람은 일아영의 어머니, 의형 일충현의 부인이었다.

금가장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녀가 놀라며 말해 준 것이다.

아직 관직으로 나가기 전, 올곧은 무인이었던 일충현에게 금사열이 호감을 가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은 나이를 넘어 의기투합했고, 일충현이 관직에 나가기 전까지 깊은 우의를 나누었다.

“장주님도 일전의 무례를 다시 사과하셨더라고요. 어머니 말씀도 있으니 저는 초청을 거절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어깨를 으쓱한 일아영이 운현에게 말했다.

“운 숙부는 어쩌실 거예요?”

그녀가 물은 것은 운현이 뭔가 생각이 많아 보였기 때문이다.

운현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 고수 때문에 그래요?”

“그것만은 아니다.”

객옹이 문득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운현을 쳐다보았다.

“네가 고수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야 이상하지 않지. 하지만 어째서 그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냐?”

객옹이 말하는 ‘그 아이’란 바로 금혜린을 의미했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천운이다’라고 객옹이 말한 그녀에 대해, 운현은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운현이 말이다.

“……어르신께는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군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입을 다물고 있어도 운현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으니 도무지 감출 방법이 없다.

“실은 신경 쓰이는 것이 있습니다. 아직 무엇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알았다.”

객옹은 운현의 말을 끊었다.

“그것이면 족하다. 네가 확신이 들면 그때 말해도 충분하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운현이 말했지만 객옹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 무심한 모습이 운현에겐 어쩐지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그럼 안 가실 거예요?”

일아영이 운현에게 물었다.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가야지. 아영이가 가는데 어찌 내가 안 갈 수 있겠어?”

일아영은 웃었다.

그 모습이 일충현과 정말 닮았다고 운현은 생각했다.

비록 일충현이 웃는 모습을 자주 보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럴 때 보면 운 숙부도 보통이 아니라니까요?”

“보통이 아니라고? 뭐가?”

“됐어요.”

일아영은 고개를 돌렸다.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운현은 객옹을 향해 말했다.

“어르신께서도 함께 가시지요. 어차피 총군사가 오기까지 여유가 있으니까요.”

“그래.”

대답은 짧았다.

무성의하게 여겨질 정도였지만 운현은 개의치 않고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향긋한 차향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부드럽게 느껴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