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화. 일인전승(一人傳承)
운현 일행은 마차를 타고 금가장으로 향했다.
금가장은 장사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택이 생각보다 크고 규모가 있었지만 오래되고 낡은 모습은 형편이 그리 좋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마치 예전 의형의 본가를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아가씨!”
대문을 연 늙은 총관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미안하지만 설명은 나중에 하겠네.”
능화영은 그렇게 말하고는 금가장 안으로 들어섰다.
거침없이 걸어가는 그녀를 따라 운현 일행도 발을 옮겼다.
늙은 총관은 어디론가 허겁지겁 달려가고, 능화영과 운현 일행은 방으로 들어섰다.
‘아, 여기는…….’
이곳이 금혜린의 방임을 운현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여인 취향의 단아한 장식은 물론이고 은은한 꽃향기가 떠다니고 있었다.
그사이 능화영은 금혜린을 침상에 조심스레 눕혔다.
“객옹 어르신,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이 아이의 보호자가 누구냐?”
“보호자는 난데…….”
능화영의 말에 운현이 얼른 끼어들었다.
“금 소저의 부모님이 계십니까?”
“당연히 있지. 잠시 기다리게.”
고개를 끄덕인 능화영은 즉시 밖으로 나갔다.
금혜린의 상태를 살펴보는 객옹에게 운현이 물었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당장은 괜찮다.”
객옹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 말은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하는 의미였다.
운현은 정신을 잃은 금혜린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가냘퍼 보이는 그녀의 안색이 유독 하얗게 보였다.
객옹은 금혜린의 상태를 살피는 듯 목 옆쪽에 손가락을 대고 있었는데 표정이 과히 좋지 않았다.
잠시 후,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벅.
“데려왔네.”
능화영의 목소리와 함께 노년의 부부가 방으로 들어왔다.
금혜린의 부모이자 금가장의 장주와 그 부인이었다.
“혜린아!”
노부인이 놀란 표정으로 금혜린에게 다가왔다.
객옹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지금은 괜찮으니까. 하지만 무엇엔가 충격을 받은 것처럼 기혈이 매우 불규칙하더군.”
그 말에 능화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노부인은 눈물을 글썽이며 객옹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의원님.”
“나는 의원이 아니라 객옹이다.”
무덤덤한 객옹의 말에도 노부인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숙였다.
“네, 객옹님. 정말로 고맙습니다.”
노부인은 고개를 돌려 정신을 잃은 금혜린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며 노부인은 금혜린의 가냘픈 손을 쥐고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딸아이를 보살펴 주셔서 감사드리오. 나는 금가장의 장주 금사열이오.”
금가장의 장주가 두 손을 모아 객옹에게 예를 표했다.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평소에도 건강이 좋지 않긴 했으나 이렇게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는데…….”
“저 아이의 병에 대해 알고 있느냐?”
객옹이 대뜸 물었다.
장주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비로서 어찌 딸의 병을 모르겠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객옹이 말했다.
“곧 깨어날 것이다. 푹 쉬게 해라.”
그 말을 끝으로 객옹은 발을 옮겼다.
장주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은인을 어찌 이리 보낼 수 있단 말이오? 이미 날이 저물었으니…….”
그러나 객옹은 이미 밖으로 나간 후였다.
운현도 장주에게 예를 표했다.
“저희도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장주는 재차 만류했지만, 운현은 그의 호의에 미소로 답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 뒤를 일아영과 능화영이 따랐다.
“내가 배웅하지.”
저벅, 저벅.
고풍스러운 금가장에 네 사람의 발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운현이 능화영에게 물었다.
“금 소저가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어르신께서 그러시던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능화영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오늘 금가장에 좋지 못한 일이 여럿 있었네. 나도 손님이라 자세한 것은 밝히기 어렵다네.”
그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운현은 아까 말했던 ‘호암상단의 무뢰한’도 그중 하나라는 것을 짐작했다.
하지만 대신 운현은 다른 것을 물었다.
“천일검이라고 하셨던가요?”
“그렇네. 망할 할망구, 아니 내 스승께서 주신 별호지.”
“무공이 대단하시더군요.”
운현의 말은 진심이었다.
능화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래? 하하하. 자네의 기개도 대단했네. 허나 무공이 대단하면 뭐하나? 은인의 가문을 돕지도 못하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아까 숲에서 검을 펼치고 있던 것도 그 답답함을 조금이나마 풀어 보려 한 것이었다.
“은인의 가문이라고요?”
운현의 물음에 능화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망, 아니 스승께서 금가장에 은혜를 입은 것이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내가 온 것일세. 우리는 일인전승이라 내려올 사람이 나밖에 없었거든.”
“일인전승요?”
“단 한 사람에게만 전수하는 계승 방식이다.”
객옹이 문득 말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능화영을 쳐다보았다.
“네 스승이 누구냐?”
멈춰 선 능화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냐고 물어도, 그냥 스승님인데? 별호는 천일검이지만 지금은 내가 천일검이고.”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림에 출도했을 때는 모두가 똑같이 천일검이라는 별호를 썼다는 의미냐?”
“모른다. 나도 산을 내려오며 처음 들은 별호니까.”
그녀가 잘 모르는 건 세속의 일만이 아닌 듯했다.
저벅.
객옹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말이 없었다.
운현과 일아영 역시 객옹의 뒤를 따랐다.
“아, 저기…….”
능화영이 운현에게 말했다.
운현이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미안하네. 그리고 고맙네.”
미소를 지으며 운현은 말했다.
“괜찮습니다. 사과는 이미 받았으니까요. 그보다 고맙다는 말은 객옹 어르신께 하시지요.”
슥.
그 말에 객옹이 고개를 돌렸다.
능화영은 사뭇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네. 객옹 어르신. 그보다 언제 한 수 가르쳐 줄 건가?”
그 말은 사뭇 도발이나 다름없었다.
객옹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능화영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따각, 따각.
운현 일행은 마차를 타고 금가장을 떠났다.
멀어지는 금가장을 바라보며 일아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금가장의 딸이 건강이 좋지 못하다더니, 사실이었군요.”
운현은 일아영을 바라보았다.
“금가장에 대해 알고 있어?”
“네. 운 숙부.”
일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가장은 아주 오래된 무가예요. 대대로 이곳에 뿌리를 내려 왔는데, 호암상단이 남궁세가와 손을 잡으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지요.”
호암상단의 성장이 금가장에는 오히려 화가 되었다.
규모가 제일 큰 호암상단이 남궁세가와 손을 잡자 대부분의 상단들도 남궁세가로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네요. 이제와서 호암상단이 금가장을 핍박할 이유는 없을 텐데요? 지금 호암상단은 얼마 후 있을 상단 총회합으로 눈코 뜰 새 없거든요. 저는 비교적 한가하지만요.”
일아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번 사건 이후 일아영은 한직으로 좌천을 당했다.
“덕분에 옛 서류나 장부를 볼 시간이 많아졌어요. 제가 알기로 금가장을 노리는 건 오히려 쌍검문이라는 문파예요.”
“쌍검문?”
“네. 금가장과 경쟁하기는 예전부터였는데 최근 그 세가 갑자기 커졌다고 하더군요.”
“세가 커지다니, 어떻게?”
일아영은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잘 몰라요. 상단에 올라온 보고서에 있던 이야기니까요.”
운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까 능화영은 ‘오늘 금가장에 좋지 못한 일이 여럿 있었다’고 말했다.
금가장을 괴롭히는 일이 한둘이 아니라는 의미다.
“운 숙부. 내일 아침은 제가 준비할게요. 뭐가 좋으세요?”
“뭐?”
운현은 깜짝 놀랐다.
그 까칠하던 일아영이 아침을 해 준다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 우리는 객잔에 숙소를…….”
“객잔요?”
일아영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집이 있는데 객잔이라니요. 어머니가 들으시면 크게 낙담하실 거예요. 허튼 곳에 돈 쓰지 마시고 같이 가세요. 벌써 총관이 방을 준비했으니까요.”
“어?”
하나같이 옳은 말이라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예전 기억이 생생한 운현으로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른 일행도 있고…….”
“다 오라고 하세요. 방은 많아요. 게다가 우리 집은 숙부님 집이나 마찬가지잖아요.”
일아영은 단호했다.
이럴 때 보면 의형인 일충현과 너무나 닮아 보였다.
“아셨지요?”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일아영이 말했다.
그 눈빛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그제야 일아영은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일아영이 정말 예쁘고 당찬 아가씨임을 운현은 새삼 깨달았다.
“왜 웃어요?”
일아영이 새초롬한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마워.”
“뭐가요?”
일아영이 되물었지만 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운현은 객옹에게 물었다.
“금 소저의 용태가 어떻습니까?”
아까 객옹은 ‘당장은 괜찮다’고 했다.
그건 금혜린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의미였다.
“나쁘다.”
객옹은 담담하게 답했다.
“지금까지 살아 있는 것이 천운이라 할 정도로.”
운현은 물론 일아영의 표정까지 어두워졌다.
젊은 아가씨의 가혹한 운명 앞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따각, 따각.
마차는 어두운 밤길을 뚫고 악양을 향해 달렸다.
하늘에 뜬 달빛이 관도를 희미하게 비춰 주고 있었다.
***
금가장, 금혜린의 방.
달칵.
문을 열고 들어서던 능화영은 금혜린이 침상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아가씨, 괜찮은가?”
능화영의 물음에 금혜린은 웃음을 머금었다.
“네. 괜찮아요. 폐를 끼쳐서 미안해요.”
“내게 미안할 것 없네. 아, 그 객옹 어르신이 자네를 돌봐 주었다네. 의술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나 보더군.”
“그렇군요. 나중에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내가 이미 했으니 괜찮네.”
금혜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까 객옹과 능화영의 분위기를 봐서는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능화영이 수고를 한 건 사실이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제 탓에 수고를 하셨네요.”
“아니, 자네가 괜찮으니 다행일세.”
금혜린이 웃고 능화영은 그제야 안심한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저기, 그런데…….”
능화영이 주저하며 말했다.
금혜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능화영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아까 그 문사 말이네. 내 검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던…….”
“네.”
“자네가 보기엔 어떤가?”
금혜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아니, 그게 말이지.”
능화영은 주저하며 말했다.
“이상하게 그 문사의 눈만 쳐다보면 가슴이 두근거려서 말이야. 갑자기 온몸에 긴장도 되고…….”
금혜린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혹시 그 사람이 마음에 드세요?”
능화영은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냥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기개는 괜찮은 것도 같고…….”
횡설수설하는 능화영을 보며 금혜린은 빙긋 웃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천천히 살펴보세요. 어차피 감사 인사를 전할 겸 한번 초대할 생각이니까요.”
옛 은혜를 갚겠다며 불원천리 찾아와 준, 고마운 능화영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수고 축에도 들지 않았다.
“그, 그래?”
능화영의 표정이 밝아졌다.
엄청난 고수인 그녀가 지금은 마치 순진한 또래 친구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두 사람의 나이는 그리 큰 차이도 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금혜린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은은히 가슴을 찌르는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