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화. 월하조우(月下遭遇)
운현은 숲속 어둠 속에서 느껴지는 기세를 바라보았다.
객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살기는 아니다.”
그것은 운현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강렬한 기세라니, 만약을 위해서라도 확인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운현은 일아영을 돌아보았다.
“아영아. 우선…….”
말하려던 운현이 멈칫했다.
여기서 일아영을 보내는 것이 안전할까?
“네 곁이 가장 낫다.”
운현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객옹이 말했다.
그 말에 운현은 마음을 굳혔다.
“조심해서 따라와. 내 뒤에서 벗어나지 말고.”
“네. 운 숙부.”
일아영 역시 일충현의 딸이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소매와 옷자락을 정리했다.
사박.
운현은 객옹과 함께 숲으로 들어섰다.
우연의 일치인지 그곳은 예전 운현이 수련을 하던 자리였다.
과거, 의형의 가족이 겪는 어려움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검을 펼쳐 냈던 곳 말이다.
얼마나 가까이 갔을까?
숲속에서 느껴지는 기세는 더욱 강해졌다.
이 정도면 상대도 알아차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반응은 없었다.
운현이 의아해하던 그때였다.
사박.
눈앞의 수풀이 걷히고 공터가 드러났다.
운현이 검을 펼쳐 냈던 바로 그곳에서, 누군가 검을 흩뿌리고 있었다.
후웅.
어두운 하늘 아래 검이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운현은 눈을 크게 떴다.
허공을 가르는 그 검로는 대단히 아름다웠다.
파라락.
검을 든 이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펄럭이는 옷자락과 흩날리는 머릿결, 유려한 몸매는 상대가 여인임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앗!”
문득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인의 수련을 지켜보던 이들은 운현 일행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순간 검을 펼치던 여인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하아!”
휘릭.
한 바퀴 몸을 튼 그녀는 즉시 허공을 박찼다.
‘오!’
운현은 속으로 감탄했다.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방향을 바꾸다니, 대단한 경신술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히 기세를 강하게 회전시킨 것 같았는데?’
운현이 그녀의 경신술에 놀라는 동안 여인은 땅으로 내려섰다.
탁.
그녀는 또 다른 여인 앞을 지키듯 섰다.
조금 전, 운현 일행을 발견하고 소리를 낸 사람은 뒤에 서 있는 그녀였다.
“너희는 누구냐!”
검을 든 여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어둠을 틈타 몰래 온 것을 보니 결코 좋은 의도로 온 자들이 아니구나!”
운현은 할 말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말처럼 된 셈이기 때문이다.
저벅.
운현은 밝은 달빛 아래로 나섰다.
“소저, 저희는…….”
“아!”
그때 뒤에 있던 여인이 놀란 표정을 했다.
검을 든 여인과 달리 사뭇 가냘퍼 보이는 그녀의 시선은 일아영을 향해 있었다.
“당신은 호암상단의…….”
그녀는 일아영을 알아본 눈치였다.
일아영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검을 든 여인이 그 말에 격하게 반응했다.
“호암상단이라고?”
휙.
검 끝이 운현과 객옹을 향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
“무뢰한들을 보내는 것으로 모자라 이곳까지 우리를 미행한 것이냐! 내 오늘 너희를 크게 징계하리라!”
운현은 순간 그녀의 말투에 위화감을 느꼈다.
젊은 여인의 말치고는 지나치게 고풍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생각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탓.
그녀는 즉시 검을 가슴 쪽으로 당기며 발을 굴렀다.
“안 돼요!”
가냘픈 여인이 외쳤지만 늦었다.
검을 겨눈 여인은 이미 운현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쯧.”
객옹이 혀를 찼다.
투두둥.
줄을 퉁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세 줄기의 기세가 객옹에게서 쏘아져 나왔다.
운현을 향해 짓쳐 들던 여인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여인은 멈추지도, 방향을 틀지도 않았다.
“어딜!”
우웅.
여인의 검에서 순간 초록빛 기운이 맴돌았다.
그리고 빛을 뿌리며 허공을 갈랐다.
파바방.
그 광경에 객옹조차 놀랐다.
자신이 쏘아 낸 기세를 단번에 와해시킨 그것은 바로 검기였다.
“현아!”
객옹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운현이 아직도 검을 뽑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오해라!”
검을 쥔 여인은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초록빛 기운을 머금은 그녀의 검이 단번에 운현을 갈라 버릴 것 같았지만 운현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운 숙부!”
와락.
뒤에서 일아영이 운현을 끌어안았다.
그를 피하게 하려는 듯했지만, 운현은 땅에 못 박히기라도 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우웅.
운현의 얼굴 앞에서 검이 나지막한 울음을 흘렸다.
여인의 검은 놀랍게도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운현의 시선은 여인의 눈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어째서 피하지 않았지?”
“해하려는 의도가 없으니까요.”
운현은 담담히 말했다.
여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섬뜩한 검기를 눈앞에 두고서도 운현은 눈빛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다.
“흥.”
여인은 코웃음을 흘렸다.
후욱.
검에 어리던 초록빛 검기가 사라졌다.
“기개가 있군. 덕분에 목숨을 건진 줄 알아라.”
여인은 검을 거두었다.
운현은 웃음을 머금었다.
“목숨을 건진 건 당신입니다.”
그 말에 여인이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운현의 말은 사실이었다.
후욱.
객옹의 손 위에서 사라지는 기세를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으니까.
여인 역시 그것을 모르지는 않아서, 날카로운 시선으로 객옹을 노려보았다.
그사이, 운현은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은 일아영의 손을 풀었다.
사락.
“고마워, 이제 괜찮아.”
운현이 일아영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일아영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물러나자 운현은 손을 내려 자신의 검, 미명을 가볍게 눌렀다.
우웅.
조용히 울던 미명의 울음이 잠들었다.
운현은 고개를 들어 검을 든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생각보다 더 젊고 아름다웠으나 매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운현이 말했다.
“허나 우리는 나쁜 의도로 온 것이 아닙니다.”
“흥! 그걸 어찌 믿느냐!”
여인은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채무 증서로도 말을 듣지 않으니 감히 아가씨께 위해를 가하려던 것 아니더냐!”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채무 증서요?”
“그래! 너희가…….”
“그만하세요.”
가녀린 목소리가 대화를 끊었다.
사박.
뒤에 있던 여인이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곧 휘청하고 균형을 잃었다.
“아!”
사락.
검을 든 여인이 즉시 그녀를 부축했다.
“고, 고마워요.”
가녀린 여인은 몸을 세웠다.
“저는 금가장의 금혜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분은…….”
자신을 금혜린이라 한 그녀가 검을 든 여인을 돌아보았다.
“능화영이다.”
그녀가 퉁명스레 말했다.
금혜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별호를 말씀하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아, 그래? 천일검이라고 한다.”
그건 처음 듣는 명호였다.
객옹 역시 마찬가지인 듯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스쳐 갔다.
능화영이 객옹을 쳐다보며 말했다.
“노인네가 대단하더군.”
객옹은 물론 운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금혜린이 급히 말했다.
“그런 말투는…….”
“어르신께 그런 말은 실례입니다.”
운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능화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뭐라고 해?”
“어르신이라고 하시지요.”
“어르신?”
“네. 객옹 어르신입니다.”
능화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객옹에게 다시 말했다.
“객옹 어르신의 수법이 아주 고강하더군. 나중에 한 수 가르쳐 줄 수 있겠나?”
그건 마치 바둑이라도 한판 두자는 것 같은 말투였다.
객옹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아예 고개까지 돌려 버렸다.
노골적인 외면에 능화영 역시 눈을 찌푸렸다.
“왜 그러지? 한 수 가르쳐 달라는 건 상대를 인정하는 말이라고 사부님께서 그러시던데.”
“사부님요?”
운현의 말에 뒤에 있던 금혜린이 답했다.
“은거기인이세요. 그보다 먼저, 여러분을 놀라게 해 드린 것을 사과드려요.”
금혜린은 손을 모으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능화영은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객옹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는 네가 아니라 저것이 해야 한다.”
“나?”
능화영이 반문했다.
‘저것’이라는 호칭에도 그녀는 전혀 기분 나빠 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객옹의 말에 반박했다.
“몰래 다가온 건 너희들이 아닌가? 왜 내가 사과해야 하지? 죽이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너희는 호암상단 사람들이잖아.”
“아니에요.”
운현 뒤에 있던 일아영이 나섰다.
“저는 호암상단에 속해 있지만 이분은 제 의숙부세요. 호암상단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분들이지요.”
일아영의 눈빛은 단호했다.
능화영은 금혜린을 돌아보았다.
금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내가 잘못했군.”
능화영이 운현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애초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전혀 미안하지 않은 말투였지만 이쪽에도 과실이 있으니 더 이상 무어라 할 수는 없었다.
“저도 죄송합니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소저의 검을 훔쳐본 셈이 되었군요.”
“소, 소저라고……?”
능화영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얼른 헛기침을 했다.
“크흠, 뭐 괜찮다. 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본래 타인의 수련을 보는 것은 강호 무림에서는 금기다.
그러나 능화영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때였다.
“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우리 현이는 보면 다 안다. 네 검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능화영의 눈매가 대번에 일그러졌다.
“호오, 그래? 그럼 그렇게 말하는 어르신부터 먼저 나와 무공을 겨뤄 보는 게 어떤가?”
객옹의 눈살이 일그러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강렬하게 맞부딪혔다.
파직.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는 금혜린이라는 아가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금 소저라고 하셨지요?”
“네.”
금혜린 역시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천일검께서는 세속의 일을 잘 모르셔서……. 윽!”
말하던 금혜린이 갑자기 가슴께의 옷깃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고운 얼굴이 단번에 일그러지며 몸을 앞으로 굽혔다.
“아가씨!”
능화영이 즉시 금혜린을 부축했다.
“쯧.”
객옹이 혀를 차며 나섰다.
“비켜라.”
“뭐라고!”
능화영이 날카롭게 객옹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객옹은 눈살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그 아이를 살리고 싶으면 당장 비켜서란 말이다.”
능화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금혜린은 벌써 의식을 잃어 가고 있었다.
능화영은 금혜린을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사락.
능화영이 비켜서는 것과 동시에 객옹이 몸을 낮췄다.
금혜린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댄 객옹은 잠시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객옹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손가락 둘을 모아 검결지를 취하더니 금혜린의 혈도 몇 곳을 두드렸다.
“어떤가? 어르신.”
능화영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의외로 객옹의 처치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의심치 않는 듯했다.
객옹은 능화영이 아닌 운현을 돌아보았다.
“일단 옮겨야겠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능화영을 보고 말했다.
“금가장이 어디입니까?”
“어, 그게 길은 아는데 말로 설명하기는 좀…….”
“내가 알아요.”
대답은 일아영이 했다.
객옹은 몸을 일으키고는 능화영에게 말했다.
“들어라. 가자.”
“그, 그래.”
능화영은 즉시 금혜린을 안아 들었다.
너무나 가벼운 그 느낌이 능화영을 가슴 아프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