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5화. 천도시비(天道是非)
강서성 남창, 공손세가 본가.
공손세가의 대부인은 딸 공손설과 함께 새로 수복된 정원의 한 정자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에 모녀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딸과 가벼운 대화를 나눈 대부인은 식사를 시작하기 위해 은수저를 들었다.
그리고 대부인은 흠칫 놀랐다.
음식을 입에 넣자마자 혀끝에서 톡 쏘는 느낌이 났기 때문이다.
“멈춰라.”
대부인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채소 볶은 것을 입에 넣던 공손설은 놀란 표정으로 대부인을 바라보았다.
대부인은 입에 든 것을 비단 손수건에 뱉었다.
“독이다.”
“네?”
공손설은 즉시 음식을 뱉고 은젓가락을 살폈다.
은젓가락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하지만 대부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총관을 오라고 해라.”
대부인의 명을 받은 총관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공손세가의 안주인답게 대부인은 즉시 음식을 만든 숙수와 주방에 출입하는 이들을 전부 구금하고 조사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의원을 불러 주게.”
적은 양으로도 치명적인 효과를 일으키는 독은 많다.
아직도 혀끝에 남아 있는 은은한 통증을 느끼며 대부인은 딸 공손설에게 말했다.
“너도 함께 진찰을 받아 보자꾸나.”
“네, 어머니.”
공손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공손히 대답했다.
잠시 후 마차를 타고 달려온 의원이 세가로 들어서고, 대부인과 공손설은 자리를 옮겨 대부인의 방에서 진찰을 받기로 했다.
“그럼 잠시 맥을 살피겠소이다.”
의자에 앉은 노의원이 말했다.
탁자 앞에 앉아 있던 대부인은 소매를 걷고 의원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의원이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는 때였다.
덜컹.
“잠시 멈춰 주시지요.”
문이 열리며 누군가 방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공손세가에 손님으로 머물고 있는 영호 공자와 일행인 담소하였다.
영호 공자는 항주의 진가장 출신이라며 공손세가의 가주께 전할 매우 중요한 전언이 있다고 했다.
평소라면 상대도 하지 않았겠지만 영호 공자는 놀랍게도 안찰사가 신원을 보증하는 서찰을 가지고 있었다.
뛰어난 외모는 물론 기품마저 넘치는 영호 공자의 청에 결국 대부인은 계림에 있는 가주에게 어찌해야 할지 묻는 서찰을 보내기로 했다.
명문 세가로서 가주를 찾아온 사람을 객잔에서 머물라 할 수도 없어서, 영호준과 담소하는 계림에서 답이 올 때까지 손님으로 이곳 공손세가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이게 무슨 무례인가요?”
급히 소매를 내려 손목을 감추며 대부인이 말했다.
주인이 청하지도 않았는데 허락도 없이, 더구나 대부인의 방에 들어온 것은 분명한 결례였다.
대부인은 영호 공자의 무례에 눈살을 찌푸렸고 딸 공손설은 깜짝 놀라 일어서기까지 했다.
“죄송합니다. 허나 두 분이 위험에 처하신 것을 두고 볼 수 없었으니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영호준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멋진 미소와 목소리는 대부인의 노여움을 크게 누그러뜨렸다.
“……위험이라니요?”
대부인의 말에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바로 이자입니다.”
쉭.
영호준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그의 소맷자락이 펄럭였다.
대부인은 깜짝 놀랐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일인 데다가 그 손놀림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사이, 영호준의 손끝은 어느새 의원의 좌우 어깨 부위를 재빠르게 짚고 있었다.
“큭.”
의원이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대부인과 공손설도 크게 놀랐다.
고통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의원이 말했다.
“가,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오?”
“고통이 심할 텐데 잘도 묻는군. 요즘 의원은 고통을 참는 법도 배우나 보지?”
영호준은 조소를 머금었다.
의원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정체가 들켰음을 직감했다.
탓.
그는 주저 없이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앗!”
대부인과 공손설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영호준의 손은 이미 자신의 검에 가 닿아 있었다.
쌔액.
순간 영호준의 검 끝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뻗어 나갔다.
대부인은 눈을 크게 떴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기세로 상대를 상하게 하는 고절한 수법이 그에게서 펼쳐진 것이다.
“커억!”
의원은 신음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의식을 잃은 의원을 담소하가 살피더니 영호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죽지는 않았다는 의미였다.
스릉.
영호준은 검을 거뒀다.
그리고 대부인과 공손설을 돌아보며 말했다.
“놀라게 해 드렸군요. 하지만 이제 괜찮으니 안심하시지요.”
대부인과 공손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영호준은 공손설을 돌아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공손설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대부인이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이자는 두 분께 위해를 가하기 위해 의원으로 위장한 것입니다. 음식에 있던 것은 그저 미끼일 뿐이고 이자가 진짜지요.”
제아무리 당문이라 해도 공손세가를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는 없었다.
부드럽게 웃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변고가 생기기 전에 막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의 소지품을 살펴보시면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을 대비해 독을 잘 아는 자에게 맡기십시오.”
도주를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자백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부인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자,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그의 실력은 결코 이름 없는 무가의 것이 아니었다.
대부인이 새삼 그의 정체를 물은 것도 당연했다.
“저는 영호준입니다. 두 분을 지키기 위해 잠시 소속을 감추었으나 실은 화산의 제자입니다.”
‘화산의 제자!’
그냥 이름만 들었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가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강남 공략에 나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산의 영호준이라면 대부인도 알고 있는 명호가 있었다.
“자네가 매화검이란 말인가?”
대부인은 물론 공손설도 크게 놀랐다.
화산의 매화검이라면 공손세가라 해도 결코 가벼이 대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창룡맹 총군사이기도 하지요.”
이어지는 영호준의 말은 대부인을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공손설의 뺨은 더욱 붉어지고 있었다.
화산의 매화검이자 멋진 귀공자인 영호준이 공손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있었다니, 마치 이야기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자세한 것은 가주께서 오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항주에서 뵙겠습니다.”
영호준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당황해하는 대부인과 공손설을 남겨두고 영호준은 몸을 돌렸다.
저벅, 저벅.
“이, 이보게!”
대부인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영호준은 멈추지 않았다.
등 뒤로 느껴지는 공손설의 시선도 짐짓 무시했다.
“끝난 건가요?”
담소하가 얼른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당문이 다시 시도할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공손세가도 경계를 높일 테고, 곧 가주께서도 돌아오실 테니 괜찮을 걸세.”
사뭇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영호준이 말을 이었다.
“자, 이제 대부인과 금지옥엽을 구한 셈이니, 공손세가가 창룡맹에 올 때 과연 뭘 들고 올지 제법 기대가 되는군.”
담소하는 피식 웃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아, 이제 휴가도 끝났으니 다시 항주에서 일에 쫓기게 되겠네요.”
“아직 아닐세. 호남성 장사에 일이 있거든. 마침 맹주님께서도 그쪽으로 향하실 테니 거기서 뵙게 되겠군.”
“호남성 장사요? 거기 무슨 일이 있는데요?”
담소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그야 당연히 돈 되는 일이지.”
담소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흐뭇하게 웃는 영호준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는 말은 비록 계산적이고 속물적일지라도 말이다.
***
운현 일행은 계림을 떠나 호남성 장사로 향했다.
따각, 따각.
운현은 창밖으로 사라져 가는 기묘한 봉우리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쉬운가 보구나.”
문득 객옹이 물었다.
운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네, 그렇습니다. 이곳은…….”
“공손세가의 금지옥엽이 예쁘다더냐?”
“네?”
운현은 화들짝 놀랐다.
청홍쌍노와의 비무 후, 가주 공손월은 운현과 객옹의 도움에 크게 감격했다.
운현에게 자신의 금지옥엽인 공손설을 선뜻 주겠다고 할 정도였다.
뜻을 같이하여 피를 나누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혈연을 맺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말이다.
당연히 운현은 거절했다.
그런데 갑자기 객옹이 그 말을 꺼낸 것이다.
“그게 아니라 계림의 경치가 하도 인상적이어서 그런 것입니다. 공손세가의 아가씨는 얼굴도 모릅니다.”
이름도 가주 공손월로부터 처음 들었다.
말하던 운현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그 아가씨 눈에 제가 들어오겠습니까? 영호준 총군사를 이미 본 후인데요.”
“눈에 들어오면 하고?”
객옹의 말에 운현의 쓴웃음이 짙어졌다.
“……글쎄요.”
의외로 운현은 부정하지 않았다.
조관은 물론 항장익까지 운현을 쳐다보는데 운현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눈에도 들어와야 하는 거니까요. 그래야 인연이라는 것이겠지요.”
“흠, 그건 그렇군.”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 대인.”
감찰어사 조관이 물었다.
“객잔에서 대인을 찾아왔던 이들에 대해서는 따로 조사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건 남해검문과 혁련세가, 단목세가에 대한 말이었다.
그들은 천화객잔에 들어오려다 객옹에 의해 전부 잠에 빠져 버렸다.
“괜찮습니다. 우연을 가장해 저를 만나려 했던 모양인데, 지금은 당장의 문제로 인해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그들 중에 운현을 제대로 만난 사람은 파진한뿐이었다.
다른 이들은 잠에서 깨어난 후 화급히 자리를 떴다.
그나마 그들의 추태가 알려지지 않은 것은 파진한이 객잔 총관에게 입막음을 해 두었던 덕분이었다.
지금은 공손세가 문제 탓에 운현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조차 없을 것이다.
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태평맹에 남은 문파들은 가주나 문주가 모두 공석이군요.”
혁련세가는 물론이고 남해검문과 단목세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무림맹이 무너지던 때 철혈사왕 염중부의 습격을 받아 현재까지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가주들이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던 모용세가와 제갈세가, 북해일문은 일찌감치, 그리고 공손세가는 뒤늦게라도 태평맹을 이탈했다.
그 결과는 결코 우연이 아닐 터였다.
따각, 따각.
마차는 어느새 광서성을 벗어나고 있었다.
호남성의 성도 장사를 향해 쭉 뻗은 관도를 마차는 힘차게 달려 나갔다.
***
장사에 도착한 운현은 숙소를 정했다.
그리고 곧바로 악양으로 향했다.
의형 일충현의 본가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오랜만에 본 의형의 본가는 예전 그대로였다.
의형 일충현의 부인은 운현의 방문을 기뻐해 주었고, 일아영을 구해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운현은 의형의 외동딸이자 의질인 일아영을 만났다.
“오랜만이네요. 운 숙부.”
지난번 인질 사건 이후 처음 만나는 일아영의 모습은 어쩐지 초췌해 보였다.
운현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잘 지냈소? 아영 소저.”
“네.”
일아영은 미소를 지었다.
활달하던 일아영의 그 미소가 오히려 슬퍼 보여서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어디 나가시게요?”
“악양루에 가지 않겠소?”
일아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묵묵히 있던 객옹도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쏴아아.
악양루에 바람이 불었다.
하늘로 솟은 화려한 지붕 아래 펼쳐진 드넓은 동정호의 모습은 답답한 마음을 달래 주는 듯했다.
“……그 사람은 죽었나요?”
동정호를 바라보던 일아영이 문득 물었다.
그녀가 말하는 ‘그 사람’이 문왕이라는 것을 운현은 알 수 있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잠시 침묵하던 일아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쩌면 그곳에서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건 그 사람뿐이었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고개를 숙인 채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는 분명 악행을 저지른 사람이지만,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이킬 기회가 한 번 정도는 주어져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일아영의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미안해요. 날 구해 준 운 숙부께 할 말은 아닌데…….”
“아니. 괜찮아.”
소저라는 호칭도, 높이는 말투도 없었다.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어쩌면 그것이 올바른 세상일 테니까.”
그러나 현실은 무정하다.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커녕 성실히 선하게 산 사람에게조차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운현은 동정호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옛 현인의 말처럼 ‘하늘의 도란 과연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天道是非]’라는 탄식이 절로 나올 것만 같았다.
객옹 역시 그저 드넓은 동정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없었다.
***
운현은 객옹, 일아영과 함께 악양루를 내려왔다.
이미 늦은 시간에 찾아왔기에 벌써 해가 지고 사방에 어두움이 깔리고 있었다.
“조심하시오, 아영 소저.”
운현의 말에 일아영이 웃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운 숙부.”
“그, 그럴까?”
“네.”
그녀의 말은 운현의 마음까지 편하게 해 주었다.
운현은 웃음을 지었다.
“조심해. 발밑이 제법 험하…….”
탁.
말하던 운현이 멈칫했다.
운현뿐만이 아니었다.
객옹 역시 발을 멈추고 숲속을 노려보았다.
범상치 않은 기세가 숲속 어둠 속에서 뭉클뭉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지?’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