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화. 아름답지 않으면 절기가 아니다
“가라고?”
갑자기 울려 퍼진 그 목소리는 바로 청홍쌍노의 것이었다.
푸른 옷의 청노와 붉은 옷의 홍노는 운현을 노려보며 동시에 말했다.
“네가 감히 우리더러 오라 가라 한단 말이더냐?”
당설련은 독선의 뜻에 고개를 숙였으나, 스스로 독선의 경지를 넘었다 자신하는 청홍쌍노는 그럴 수 없었다.
파사사사삭.
푸른 대나무가 순식간에 시들고 다시 죽음의 기운이 후원에 밀어닥쳤다.
“어르신들!”
당설련이 급히 말했다.
그러나 청홍쌍노의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클클, 새파랗게 어린놈이 맹주니 뭐니 떠받들어지더니 분수를 모르는구나.”
“만일 독선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네가 어찌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었겠는가?”
홍노와 청노가 말했다.
늘 묵직하던 청노도, 괴이할 정도로 가볍던 홍노도 운현을 향해 똑같이 눈동자를 이글거리고 있었다.
슥.
운현은 청홍쌍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에게서 뿜어 나오는 기세는 마치 검은 안개처럼 후원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안개가 닿는 곳마다 나무와 꽃들이 생기를 잃었다.
“멈추세요!”
당설련이 외치듯 말했다.
여기서 끝을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경우였다.
지금처럼 청홍쌍노가 폭주하는 건 결코 그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너는 나서지 마라.”
청노가 당설련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클클클. 그래 이건 당문도, 공손세가도, 태평맹도 상관없는 일이다. 그저 지나가다 버릇없는 놈을 만났을 뿐이니까.”
홍노가 운현을 보려보며 이죽거렸다.
“명분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었느냐? 네 말은 틀렸다.”
“강자가 약자를 유린하는 데 명분 따위는 소용없느니라. 킬킬.”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즉시 객옹을 돌아보았다.
“할아버지! 이건…….”
그러나 객옹의 개입을 막으려던 당설련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좋은 이야기로군.”
당설련의 말을 끊으며 객옹이 말했다.
그의 서늘한 시선은 청홍쌍노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분명 당문도, 공손세가도, 태평맹도 상관없는 일이라 했느냐?”
후우욱.
객옹의 온몸에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후원을 뒤덮던 검은 죽음의 기운이 일시에 뒤로 밀렸다.
청홍쌍노의 안색이 살짝 변했으나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래, 상관없다.”
콰과과곽.
청홍쌍노의 기운이 그 세를 더하며 객옹의 기세와 충돌했다.
“우리는 이미 너를 넘어섰으니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청홍쌍노가 말했다.
화륵.
두 기운의 충돌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만들어 냈다.
경계에 있던 나무와 풀들이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나무가 불꽃에 휩싸이고 꽃과 풀 들이 삽시간에 불살라졌다.
불길이 일렁이는 후원에서 객옹과 청홍쌍노의 시선은 날카롭게 맞서고 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가주인 공손월의 표정이 변했고, 당설련은 이를 악물며 내력을 끌어올려야 했다.
‘이건 안 돼!’
이것은 패착이다.
분노한 청홍쌍노가 운현만이 아닌 객옹마저 끌어들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청홍쌍노의 의도대로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당문에 드리운 독선의 그늘에서 벗어나기를 오래전부터 갈망해 왔으니 말이다.
휙.
당설련은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언가 말하려던 당설련은 흠칫 어깨를 떨며 숨을 삼켰다.
청홍쌍노를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은 지극히 차가웠다.
당설련 자신을 바라보던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제야 당설련은 조금 전 운현의 말이 단순한 경고나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부디, 이 인연을 스스로 파탄 내려 하지 마십시오.
그 말은 운현의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오히려 그것이 당설련을 수치스럽게 했다.
아득.
당설련은 이를 갈았다.
그때였다.
“너희가 나를 넘어섰는지는 관심 없다.”
객옹의 목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너희 마음대로 무슨 망상을 하건 그 또한 신경 쓰지 않는다.”
저벅.
객옹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내 뜻을 거스르는 건 용서하지 못한다.”
우우웅.
객옹의 주변으로 기이한 울림이 번져 나갔다.
그러나 불길의 경계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청홍쌍노의 눈동자에 득의의 빛이 흘렀다.
“큭큭큭. 보았느냐? 네가 언제까지나 그 오만한…….”
홍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슥.
객옹이 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콰과과곽.
그 순간 후원의 흙이 일제히 일어섰다.
그것은 마치 후원 전체를 뒤엎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흙과 나무의 벽이 엄청난 기세로 청홍쌍노를 향해 덮쳐 왔다.
“어딜!”
청홍쌍노는 즉시 손을 모았다.
두 사람의 손이 상하좌우의 틀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폭풍 같은 기운이 그들을 향해 모여들었다.
청홍쌍노는 즉시 객옹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아!”
콰아앙.
폭음과 함께 흙과 나무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척.
홍노가 앞에 서고 청노가 뒤에서 손을 뻗었다.
청노의 손바닥이 홍노의 등에 닿는 것과 동시에 홍노는 두 손을 가슴 앞으로 가져왔다.
“하아아아아!”
우우웅.
홍노의 두 손 사이로 허공이 일그러졌다.
그것이 무엇인지 운현도, 당설련도, 그리고 객옹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천향접!”
당설련이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독선의 절기로 알려졌던 천향접이 지금 청홍쌍노를 통해 발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크크크.”
홍노가 객옹을 향해 조소를 흘렸다.
“왜? 너 외에는 아무도 못 할 줄 알았더냐?”
말하는 홍노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혈관이 부풀어 오르며 얼굴이 기괴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것은 뒤에 있는 청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향접은 이미 너만의 것이 아니…….”
“거칠군요.”
그건 운현의 목소리였다.
청홍쌍노는 물론 당설련과 공손월의 시선이 운현을 향했다.
“흐름이 난폭하고 제멋대로인 데다가 완성조차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감히 그걸 천향접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운현뿐이었다.
운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건 천향접이 아닙니다. 그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기운일 뿐이지요.”
듣고 있던 공손월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청홍쌍노의 기괴한 모습은 운현의 말이 옳음을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청홍쌍노의 조소는 멈추지 않았다.
“큭큭큭. 그거 좋은 이름이로구나.”
“이것을 사멸접이라 부르겠다. 그리고 이 사멸접의 첫 제물은.”
두 쌍의 붉은 눈동자로 객옹과 운현을 노려보며 청홍쌍노가 말했다.
“바로 너희가 될 것이다.”
비록 거칠고 미완성이라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사멸접의 파괴력은 더더욱 컸다.
객옹의 천향접이라 해도 그 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운현도, 그리고 당설련도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객옹은 아니었다.
“그 나비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객옹이 말했다.
자신의 천향접에 버금가는 사멸접의 기세 앞에서도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한 손을 가볍게 내밀며 객옹은 말을 이었다.
“억지로 편 날개로는 창공을 날 수 없음이니…….”
훅.
그 순간 객옹의 손 위에서 자그마한 나비가 떠올랐다.
영롱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그 나비는, 이전의 천향접과 달리 모든 사람의 눈에 똑똑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참으로 매혹적인 광경이었다.
“아름답지 않고서야 어찌 절기라 말하겠는가?”
말하는 객옹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객옹만이 아니었다.
이 순간 모든 사람이, 심지어 청홍쌍노조차도 객옹의 손 위에 떠오른 그 작은 나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격렬한 분노로 변했다.
“너 이노옴!”
콰아아아.
사멸접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청홍쌍노의 눈동자가 피로 물들고 부풀어 오른 혈관이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 했지만 그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크아아아아!”
후욱.
비명 같은 외침과 함께 청홍쌍노의 사멸접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죽음의 날개를 펼친 채, 사멸접은 난폭한 기세로 객옹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러나 객옹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사락.
객옹의 손에 있던 작은 나비가 날아올랐다.
그 나비는 아름다운 날개를 일렁이며 사멸접을 향했다.
사멸접의 폭풍 같은 기세에 비하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운현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 작은 나비는 객옹이 일은과 함께 만들어 내었던 바로 그 천향접이었기 때문이다.
후우우욱.
난폭한 사멸접은 당장이라도 천향접을 삼킬 듯 짓쳐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아악.
눈이 멀 듯 밝은 빛이 후원을 가득 메웠다.
운현은 얼굴을 가렸던 소맷자락을 내렸다.
후원은 이전의 모습을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친 사람은 없었다.
오직 청홍쌍노만을 제외하고는.
“……크윽.”
청홍쌍노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몸을 숙이며 피를 토했다.
“커헉.”
그 모습을 객옹은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예전에도 말하지 않았더냐?”
객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스스로를 나와 비교하는 짓은 그만두라고 말이다.”
그러나 청홍쌍노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들의 옷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사멸접이 소멸된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한 탓이었다.
휙.
당설련이 즉시 청홍쌍노에게 다가갔다.
급히 혈을 눌러 지혈을 했지만 의원에게 보이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살아 있었다.
“……고마워요, 할아버지.”
당설련이 객옹에게 말했다.
만일 객옹이 마음만 먹었다면 청홍쌍노의 목숨은 없었을 것이다.
“천벽에게 전해라.”
객옹이 입을 열었다.
천벽은 곧 당문의 문주, 청염군 당천벽을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하늘이 당문을 허락하지 않으니 조용히 숨죽이고 있으라고.”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숙여 객옹의 뜻을 받들었다.
“……네, 할아버지.”
슥.
당설련은 운현을 쳐다보았다.
“가도 되나요?”
그 물음은 의미심장했다.
운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설련은 청홍쌍노를 안아 들고 즉시 몸을 날렸다.
탓.
그녀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폐허에 가까운 후원과 경악하고 있는 가주 공손월뿐이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려 객옹을 보았다.
“왜?”
객옹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일은과의 만남에서 새로운 경지를 본 사람은 운현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크흠.”
객옹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운현의 미소는 한동안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
태평맹의 계림 대연회가 한창이던 때, 갑작스러운 소식이 계림을 뒤흔들었다.
공손세가가 하루아침에 계림에서 철수해 버린 것이다.
당장 공손세가 계림 지부가 텅 비었고 현판도 사라졌다.
다른 지역에 가 있는 공손세가의 무인들 역시 임무를 중지하고 철수했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장강의 영향력 회복을 갈망하던 공손세가가 결국 창룡맹으로 돌아섰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번져 갔다.
대연회는 중지되었고 태평맹은 공손세가를 규탄하며 상응하는 조치를 예고했다.
말이 ‘조치’지 보복하겠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작 공손세가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마치 강남 공략이나 태평맹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해명조차 하지 않았다.
태평맹 역시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뿌리부터 흔들리는 강남 공략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공손세가는 계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태평맹에 날아온 얄팍한 한 장의 통지를 끝으로 공손세가는 태평맹에서 정식으로 이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