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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23화 (423/530)

423화. 평범하지 않은 인연

공손세가의 가주, 비검 공손월은 이를 악물었다.

스스로를 ‘청홍쌍노’라 밝힌 두 노인은 결코 공손월의 아래가 아니었다.

비록 옷차림이나 말투는 이상하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기세는 지금도 공손월의 피부를 저릿저릿하게 하고 있었다.

파삭.

떨어진 나뭇잎이 저 혼자 바스러졌다.

으득.

공손월은 이를 악물었다.

“클클클. 머리 굴릴 필요 없다.”

붉은 옷을 입은 홍노가 말했다.

“너의 죽음은 이미 우리가 정하였으니 말이다.”

“그러하다. 허니 너는 운명에 헛되이 저항치…….”

말하던 청노의 목소리가 끊어졌다.

휙.

청홍쌍노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가주 공손월 또한 이변을 알아차렸다.

저벅.

누군가 후원 저편에 나타났다.

그의 발소리는 작고 나지막했지만 그가 일으킨 변화는 놀랄 만큼 즉각적이었다.

화아악.

시들었던 나무와 꽃 들이 생기를 회복했다.

심지어 떨어졌던 잎들조차 본래의 색을 되찾고 있었다.

마치 후원에 갑자기 봄이 찾아온 것 같았다.

청홍쌍노와 공손월의 주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메말라 가던 후원의 대나무가 그 푸르름을 다시금 뽐내기 시작했다.

“죽음을 정했다 말하려면 삶 역시 정할 수 있어야 한다.”

저벅.

낮은 발소리와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죽음을 운운할 수 있겠느냐?”

탁.

목소리의 주인이 멈춰 섰다.

불빛 아래 일렁이는 그 모습은 분명 객옹이었다.

“큭.”

홍노가 인상을 쓰며 신음을 내뱉고, 청노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가주인 공손월 또한 크게 놀랐다.

그러나 섣불리 희망을 갖지는 않았다.

객옹이 강호 무림에 개입하지 않으리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공손월만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사박.

당설련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락.

당설련의 머리 장식이 불빛 아래 흔들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할아버지를 뵐 줄은 몰랐어요. 밤 산책 중이신가요?”

객옹은 지긋이 당설련을 바라보았다.

당설련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나 자리가 좋지 못하네요. 이곳은 곧 피가 흐를 테니까요.”

그녀의 눈빛은 단호했다.

객옹이 강호 무림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리란 것을 당설련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 한 줄기 음성이 후원을 울렸다.

“이곳에서는 그 누구의 피도 흐르지 않을 것입니다.”

청홍쌍노는 물론 가주 공손월도 움찔했다.

오직 당설련만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저벅, 저벅.

한 사람이 독선 옆으로 나와 섰다.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요.”

문사 차림의 그는 바로 창룡검주 운현이었다.

“맹주!”

가주 공손월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당설련의 눈매가 단번에 표독스러워지며 공손월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공손월은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곳에 어떻게…….”

“공손세가 본가의 일이라면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운현의 말에 공손월은 더욱 놀란 표정이 되었다.

담담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독하지 않으면 당문이 아니라 하니, 가주의 뜻을 눈치챈 당문이 공손세가의 본가에 손을 쓸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습니다.”

공손월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이시오? 정말로 본가에…….”

그가 되물은 것도 당연했다.

단지 변심의 기색이 보인다는 것만으로 본가까지 손을 쓴다는 건 그도 예상치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현은 담담했다.

“제가 신뢰하는 분을 공손세가의 본가에 보냈으니 괜찮을 것입니다. 아, 혹시 본가 외에 다른 방계 혈족에도 손을 썼다면 그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만…….”

운현은 당설련을 돌아보았다.

당설련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입술을 깨문 그녀의 모습이 대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운현은 가볍게 웃었다.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요.”

“……어떻게 알았지?”

당설련이 이를 악물고 물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딱히 알아낸 것이 아닙니다. 정적(政敵)을 숙청할 때 대역죄인으로 몰아 삼족을 멸하는 건, 정치에선 기본이니까요.”

학문을 익히고 도리를 안다는 사대부들의 보복은 더욱 잔혹했다.

명분을 내세워 삼족은 물론이고 구족을 멸하는 경우도 있었으니, 진짜 독심(毒心)은 강호 무림이 아니라 황실과 조정에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후후후.”

문득 당설련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당설련을 향하고, 웃던 그녀가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창룡맹의 맹주이시자 창룡검주인 당신이 이 일에 개입하겠다는 건가요? 대체 무슨 명분으로요?”

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당설련을 바라보았다.

당설련의 눈동자에 불꽃이 일렁였다.

“공손세가는 아직 태평맹의 일원이에요. 당신이 이곳에 있을 이유는 하나도 없어요!”

날카로운 그녀의 눈빛에는 독기마저 서려 있었다.

그녀의 말에 오히려 공손월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감히!”

그는 분노를 터트렸다.

“너희가 이따위 짓을 하고서도 아직도 맹을 운운한단 말이냐!”

공손월은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나 공손월! 이 자리에서 말하노니!”

슥.

운현이 손을 들어 공손월을 제지했다.

공손월이 눈살을 찌푸리자 운현은 조용히 말했다.

“지금 이곳에서 뜻을 밝히시면 외당 당주의 충언이 헛되이 될 것입니다.”

외당 당주 공손위는 가문의 혼란을 염려했다.

제아무리 옳은 뜻이라도 가주의 독단으로 강행되는 것과, 중직들이 뜻을 모아 결정하는 것은 그 차이가 컸다.

공손월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맹주의 뜻은 알겠소. 허나…….”

그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가주라 하나 독단적인 가맹 결정이 위험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창룡맹 가맹을 선언하지 않으면 당설련의 명분을 논파하지 못한다.

그러나 운현의 표정은 여유롭기까지 했다.

“강호 무림은 제가 오랫동안 배워 온 것과는 아주 다른 세상이더군요.”

그건 사뭇 난데없는 말이었다.

당설련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악한 자를 벌한다 해도 관리는 고려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의 악행이 명백한 사실인지 증거와 상황을 살펴야 하고, 어떠한 법을 적용시킬 것인지 법리 또한 따져야 하지요. 그뿐입니까? 다른 범법자들과의 형평성은 물론이고 이 처벌이 미칠 사회적 파장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듣던 공손월은 물론 청홍쌍노까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객옹은 그저 무표정하기만 했으나 당설련의 얼굴은 이미 일그러지고 있었다.

운현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호 무림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그저 적당한 명분뿐이지요. 개인적인 복수나 의협 같은, 죄송합니다만 아주 막연한 것들 말입니다.”

막연하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명분은 소위 말하는 대의, 그리고 나아가 정통성으로 이어진다.

조정에서 벌어지는 정통성과 명분에 관한 논쟁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하며 난해했다.

그것은 단순한 논쟁이 아니었다.

때로는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는 사화(士禍)가 그로 인해 일어나기도 했으니, 문사에게 명분이란 말 그대로 목숨이 달린 실전이 아닐 수 없었다.

무사에게 칼이 그러하듯 말이다.

“명분이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운현이 말을 이었다.

“비검께서는 나이와 신분을 넘어 검으로서 나와 의기투합하셨습니다. 이는 무인으로서 마땅히 존경받을 만한 일인 바, 비검께서 곤란함에 처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시선은 당설련과 청홍쌍노를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비검께 위해를 가하는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운현의 눈빛은 서늘하기까지 했다.

그저 명분이라고 말한 것과는 달리, 그 모습은 운현이 진심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또…….’

당설련에게 운현은 지긋지긋한 악몽이었다.

그는 갑자기 나타나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지고 뒤이어 신승 불영의 사제가 되었다.

남들은 몰라도 당설련은 확신했다.

신승 불영이 그에게 무림맹을 넘겨줄 작정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후 무림맹이 무너지고 태평맹의 시대가 열렸으나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당설련이 그토록 바라던 박 공공의 후원을 힘입은 운현이, 태평맹에는 필요악이던 영웅맹을 순식간에 없애 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모용세가와 제갈세가, 북해일문이 운현 탓에 이탈했고 이제는 공손세가를 가져가려 한다.

어찌 악몽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당설련의 가슴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터져 버릴 듯했다.

그러나 치솟는 분노와 반대로 그녀의 생각은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차라리 여기서 끝을 봐야 하나?’

독선은 끼어들지 않을 것이다.

가주인 공손월은 이미 청홍쌍노가 암암리에 펼친 독기공의 영향하에 있고, 여차하면 그의 본가를 인질로 삼아 협박할 수도 있었다.

운현의 말도 증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니까.

문제는 바로 운현이다.

청홍쌍노는 스스로 독선과 비길 만하다 자신하지만 과연 운현을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이건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야.’

여기서 공손세가를 장악하지 못하면 태평맹의 강남 공략은 파탄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을 알기에 문주인 당천벽도 허가해 준 것이다.

‘끝을 봐야 해. 지금, 여기서.’

당설련은 마음을 굳혔다.

그녀에겐 아직 밝히지 않은 비장의 수단이 있었다.

“어르신들…….”

당설련의 붉은 입술이 달싹이던 바로 그때였다.

“하지 마라, 연아야.”

낮은 목소리가 당설련의 말을 끊었다.

그는 객옹이었다.

당설련을 바라보며 객옹은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필시 네게도 생각이 있겠지. 그것이 가문 비전의 천뢰이건, 혹은 너 자신을 현이의 칼날 아래 내던지는 것이건 말이다.”

그 말에 청홍쌍노의 표정이 변했다.

천뢰는 당문에서 비밀리에 전해 내려오는 화탄이었다.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당문 사람들에게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 극악한 천뢰라면,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공손월은 다른 이유로 안색이 변했다.

‘칼날 아래 스스로 몸을 내던진다고?’

당설련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렇게 되면 객옹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집요할 정도로 혈족에 집착하는 당문 출신이자, 사랑하는 핏줄의 죽음 앞에서 그는 여전히 객옹으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공손월은 당설련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서 있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허나 모두 쓸데없다. 그 어떤 고수라도 천재지변 앞에서는 몸을 피해야 한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객옹은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말했다.

“현이의 검은 하늘에 닿았다. 감히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그 말에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그건 지극히 애매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독선이 말했다면 그 의미는 다르다.

으득.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녀의 차가운 머리는 이미 이후의 대책을 생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네요.”

당설련은 안타까운 듯 탄식을 흘리며 말했다.

“이곳에선 물러나도록…….”

“그걸 결정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닙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당설련의 안색이 단번에 변했다.

슥.

운현은 시선을 돌렸다.

“비검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비검 공손월은 흠칫했다.

자신에게 운현이 물어볼 줄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눈동자에 당문을 향한 분노가 끓어올랐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을 보내 주시오, 맹주.”

공손월은 나지막이 말했다.

“이것으로 태평맹과의 모든 은원을 정리하겠소. 물론 맹주의 뜻이 어떠하건 나는 그 결정에 따르겠소이다.”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당설련과 청홍쌍노의 표정은 더더욱 일그러지고 있었다.

객옹도 아니고 공손월이라니, 그야말로 굴욕이 아닐 수 없었다.

운현은 당설련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당설련 소저. 소저와 저의 인연은 평범하지 않습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이 인연이 피로 물들지 아니한 것은 오직 소중한 분들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부디, 이 인연을 스스로 파탄 내려 하지 마십시오.”

그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객옹과 비슷했다.

그러나 당설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운현은 한숨을 흘렸다.

“……가십시오.”

그것은 이 자리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태평맹 강남 공략의 끝을 알리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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