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화. 습격과 조우
태평맹 계림 대연회는 무인들로 가득했다.
자그마치 보름이나 계속되는 대연회에 참가한 무인들은 그간의 긴장과 피로를 풀고 마음껏 연회를 즐겼다.
각 문파의 수장들을 비롯한 중직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연회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탁.
공손세가의 외당 당주 공손위는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계속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평소라면 표시조차 안 났을 테지만, 지금은 붉어진 얼굴이 유난히 두드러질 정도였다.
쪼륵.
공손위가 술병을 기울여 다시 잔을 채웠다.
그때였다.
“술이 과한 것 아닌가?”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공손위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닙니다. 가주님.”
가주 공손월은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편안히 있게. 자네의 주흥을 방해하려 한 것이 아니니까.”
“……네.”
공손위는 자리에 앉았다.
가주는 ‘주흥(酒興)’이라 말했지만 공손위의 표정은 흥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평소에도 근엄한 얼굴의 공손위였지만 그 미묘한 차이를 공손월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생각이 많은가 보군.”
“아닙니다.”
공손위는 즉시 답했다.
“……조금 취했을 뿐입니다.”
공손월은 쓴웃음을 지었다.
공손위가 어째서 이러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서도 마음이 복잡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늘같이 여기던 가주가 비무에서 패배한 것만 해도 충격이 큰데, 이제 태평맹까지 이탈해야 하니 말이다.
“일찍 들어가서 쉬는 것이 어떤가?”
공손월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공손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외당 당주로서 가주님을 지켜야 할 책무를 어찌 소홀히 하겠습니까?”
“괜찮네.”
웃으며 공손월이 말을 이었다.
“연회장에서 위험해질 일이 무엇이 있겠나? 싸움터에서 내 등을 지켜 주는 것으로 충분하네.”
“허나…….”
“가주의 명일세.”
공손위는 흠칫 공손월을 올려다보았다.
공손월의 눈빛은 부드러웠다.
“그러니 들어가 쉬게. 오늘은 자네답지 않게 제법 취했으니까.”
“……알겠습니다.”
결국 공손위는 고개를 숙였다.
공손월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손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자리를 떠났다.
덜컹.
공손월은 일어났다.
찰랑거리는 술잔을 내버려 둔 채 공손월은 그대로 연회장을 떠났다.
***
연회장을 나온 공손위는 마차를 타고 공손세가 계림 지부로 향했다.
세가의 제자 몇이 취한 공손위를 호위하겠다고 했지만 공손위는 거절했다.
사실 그리 먼 거리도 아닌 데다가, 계림에서 태평맹의 기를 단 마차를 건드릴 자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공손위는 홀로 마차를 타고 공손세가의 지부로 향했다.
따각, 따각.
공손위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풍경을 바라보았다.
술기운 탓이었을까?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공손위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을 때 마차는 이미 한적한 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바깥 풍경이 낯설다는 것을 깨달은 공손월은 즉시 마부에게 소리쳤다.
“마차를 멈춰라!”
그러나 마차는 멈추지 않았다.
공손위는 즉시 마차 문을 박찼다.
쾅.
문이 떨어져 나가고 공손위는 몸을 날렸다.
휘릭, 탁.
단번에 마차 지붕 위로 올라간 공손위는 손을 뻗어 마부의 혈을 눌렀다.
“끅.”
마부가 신음과 함께 옆으로 쓰러졌다.
공손위가 막 말고삐를 잡으려 할 때였다.
피피픽.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들었다.
공손위는 즉시 발을 굴렀다.
파바박.
쓰러진 마부와 마차에 화살이 박혀 들었다.
따가닥, 따가닥.
마부를 잃은 마차가 제멋대로 달려 나가고 몸을 날린 공손위는 가볍게 땅에 내려섰다.
탁.
공손위는 즉시 주변을 살폈다.
몇 사람의 기척이 어둠 속에서 느껴졌다.
공손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라.”
사락, 사락.
십여 명의 사람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하나같이 손에 칼과 도를 들고 있었다.
공손위는 눈살을 찌푸렸다.
“너희는 누구냐?”
저벅.
습격자들 중 한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강렬한 눈빛을 가진 그 사내는 이를 갈며 공손위에게 말했다.
“나를 모르겠다고 하진 않겠지? 바로 너희들이 멸문시킨 혈사파다.”
“혈사파?”
공손위는 슬쩍 고개를 갸웃하더니 피식 웃었다.
“모르겠군. 멸문시킨 놈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이익!”
사내는 분노로 어깨를 떨었다.
그러나 공손위는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서, 멸문당한 문파의 떨거지들이 무슨 볼일이냐? 일거리를 찾는다면 객잔으로 가라.”
그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러나 사내는 오히려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그러냐? 허나 너는 객잔에서조차 받아 주지 않을 것이다.”
눈을 빛내며 사내는 말했다.
“죽은 사람을 받아 주는 곳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후욱.
사내의 전신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솟구쳤다.
공손위의 안색이 변했다.
‘이상하군.’
혈사파는 광서성 중소 도시의 문파였다.
하는 짓이 극악하고 지역민들을 수탈했기에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멸문시켜 버린 사파였다.
그런데 그들 중에 이 정도의 기세를 가진 자가 있었단 말인가?
우웅.
사내의 도가 울음을 흘렸다.
그는 시뻘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공손위. 너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공포스러운 광경이었지만 공손위는 피식 웃었다.
스릉.
공손위가 검을 뽑았다.
그는 사내를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봐라.”
공손위는 공손세가의 외당 당주다.
사내가 범상치 않은 기세를 가졌다 하나 이런 자들은 열 명이라도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냐, 내 기꺼이…….”
탓.
사내는 공손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내력이 담긴 그의 도가 섬뜩한 예기를 빛냈다.
“널 죽여 주마!”
카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윽.”
신음을 흘리며 물러난 사람은 놀랍게도 공손위였다.
사내의 도에 담긴 내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난 것이다.
‘이, 이럴 수가. 대체 언제…….’
공손위의 눈빛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내력을 끌어 올리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전신을 덮쳐 왔기 때문이다.
“왜?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더니, 자신이 없어졌나? 그게 아니면…….”
사내가 비릿하게 웃었다.
“내력을 못 쓰겠나? 크크크크.”
공손위의 안색이 변했다.
사내는 다른 습격자들에게 말했다.
“죽여라.”
습격자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하아!”
“타하!”
그들은 일제히 공손위에게 덤벼들었다.
카강, 캉.
비록 내력을 끌어 올릴 수 없다지만 공손위는 외당 당주다.
검술만으로도 공손위는 습격자들을 능히 물리칠 수 있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그를 괴롭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공손위는 이를 악물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후웅, 카앙.
그러나 공손위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내력이 담긴 사내의 도가 공손위의 검을 막아 낸 것이다.
“크흐흐흐.”
사내는 비릿하게 웃었다.
“공손위, 너는 여기서 죽는다.”
그 목소리는 섬뜩하게 공손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바로 그때였다.
“멈춰라!”
커다란 목소리와 함께 등불이 사방을 밝혔다.
그리고 요란한 발소리가 주위를 뒤덮었다.
탁탁탁탁탁.
어느새 수십여 명에 이르는 관군들이 창을 겨누며 그들을 둘러싸고 있었다.
날카로운 창날이 불빛 아래 섬뜩하게 빛났다.
“감히 황법을 거역하고 사사로이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 죄인들은 당장 무릎을 꿇고 포박을 받으라!”
관복을 입은 상급 무관이 크게 외쳤다.
공무를 집행하는 그의 표정은 더없이 당당하고 위엄이 넘쳤다.
공손위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습격자들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
강서성 남창.
공손세가의 금지옥엽 공손설은 하녀와 함께 승금탑에 올랐다.
비록 등왕각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오랜 역사를 가진 칠 층 높이의 승금탑에서는 남창 시내와 도시를 가로지르는 간장강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부친 공손월이 강남 공략을 떠난 후, 공손설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 탑에 올라 천지신명께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
그날도 공손설은 기원을 마치고 답답한 마음을 위로하며 탑을 내려오던 중이었다.
“어머, 아가씨. 저분 좀 보세요.”
하녀의 말에 공손설은 고개를 돌렸다.
쏴아아.
부는 바람 속에 한 귀공자가 서 있었다.
한 손에 부채를 쥔 채 남창 시내를 내려다보는 잘생긴 그의 모습은 마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하녀는 한숨까지 섞으며 말했다.
“하아, 정말로 멋지네요.”
그저 잘생긴 것만이 아니었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귀공자의 모습에선 남다른 기품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공손설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지금 한눈팔 때니? 어르신들께서 머나먼 땅에서 피를 흘리고 계신데.”
“보는 것 정도야 뭐 어때서 그러세요?”
하녀는 입을 비죽였지만 곧 공손설을 따라 발을 옮겼다.
공손설은 탑 입구에서 마차를 기다렸다.
오늘따라 마부가 조금 늦다 싶은 그때, 문득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제가 이곳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공손설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있던 하녀가 깜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가렸다.
“어머나!”
뒤에 서 있던 사람은 조금 전 보았던 그 귀공자였다.
하녀가 놀란 것은 물론이고 공손설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로 앞에서 보는 미남의 모습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귀공자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공손세가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는 목소리마저 감미로웠다.
정작 공손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하녀가 호들갑을 떨었다.
“네? 공손세가요? 어머, 이걸 어떻게 해. 우리 아가씨가…….”
“그만하렴.”
짧은 목소리에 하녀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공손설은 살짝 시선을 내리고 귀공자에게 답했다.
“이곳에서 공손세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지나는 마차를 타시면 마부가 알고 있겠지요.”
“오, 그렇습니까?”
귀공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으로 친절하시군요.”
그 미소에 하녀의 눈빛이 몽롱해지는데 공손설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대신했다.
따각, 따각.
마침 공손설이 타고 온 마차가 도착했다.
하녀는 무언가 아쉬운 듯 공손설과 귀공자를 번갈아 보았지만 공손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탁.
문이 닫히고 마차가 움직였다.
하녀는 목을 내밀고 귀공자를 쳐다보았지만 그의 잘생긴 모습은 곧 멀어졌다.
따각, 따각.
“아이 참, 왜 그러셨어요?”
하녀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어차피 세가의 손님이시면 같이 모시고 가도 되잖아요.”
“안 돼. 함부로 외간 남자를 들이는 거 아니야.”
공손설의 대답은 단호했다.
늦게 얻은 귀한 딸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일러 준 부친 공손월의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공손설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귀공자의 멋진 모습이 그녀의 눈앞에 생생했다.
따각, 따각.
멀어져가는 마차를 보며 귀공자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마저 매력적이어서 지나던 아가씨들이 자신도 모르게 쳐다볼 정도였다.
“생각보다 도도한 아가씨로군. 오만한 시선으로 독설까지 내뱉는다면 딱 내 취향인데…….”
중얼거리던 귀공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 정도면 첫인상은 나쁘지 않겠지.”
귀공자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키 작은 청년에게 말했다.
“잘 보살필 테니 걱정 마시라고 맹주님께 전해 주게.”
“잘 보살펴요? 어떻게요?”
청년, 담소하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부채를 든 귀공자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그야 당연히 건전하게지.”
담소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건전하지 않은 방법도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일에서 풀려나 잠시간의 휴가를 얻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그 휴가가 맹주인 운현의 부탁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 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