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독심(毒心)
운현은 객옹과 함께 강변을 따라 걸었다.
타고 왔던 배는 이미 비무 전에 돌려보냈고, 조금 걸어가면 마을에서 마차나 말을 타고 계림 시내로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흐르는 강물과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기묘한 봉우리는 두 사람의 걸음을 가볍게 했다.
유유히 발걸음을 옮기던 운현이 문득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보셨습니까?”
“네 검 말이냐?”
객옹의 말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비검의 검 말입니다.”
“기대 이상이었다.”
조금도 주저 없이 객옹이 말했다.
“검기를 넘어 검신일체의 경지에 이르다니, 공손세가가 그간 얼마나 절치부심했는지 알 수 있겠더구나. 이검학이 보았다면 꽤나 좋아했을 것이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월의 마지막 한 수였던 비검승천은 객옹마저 기대 이상이라 평할 정도였다.
다른 문파와 세가 들 역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으리라.
“너야말로 어땠느냐?”
“네?”
운현이 반문하자 객옹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맹원 운운한 것이 핑계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어차피 너는 공손세가를 받아들일 생각이 아니었더냐?”
어색한 웃음이 운현의 입가에 떠올랐다.
그건 객옹의 말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불영 때문이냐?”
“……그렇습니다.”
운현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사대전으로 인한 극심한 반목에도 불구하고 신승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니 저도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사대전은 강호 무림을 둘로 갈라 버렸다.
쌓여 가는 피의 복수와 원한 속에 악순환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신승 불영은 무림맹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품었다.
비록 피로 새겨진 깊은 간극까지 메우지는 못했지만 신승의 시도는 성공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 누구도 한쪽을 선택하라 강요하지 않으니 말이다.
“창룡맹이 또 다른 무림맹이 되는 일은 없겠지만요.”
그건 객옹의 관심 밖이었다.
“그건 네 맘대로 하고. 그래서 비검의 검은 어땠느냐?”
“제가 예상한 것 이상이더군요.”
다른 문파에 없던 조건을 공손월에게 요구한 것은 그들이 다만 늦게 합류했다는 이유만이 아니었다.
스스로 말한 것처럼, 운현은 비검 공손월의 무(武)에 대한 진심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공손월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한 비검승천은 충분히 대단했다.
쏴아아.
이강의 강바람이 두 사람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조용히 걷던 운현이 문득 물었다.
“공손가주의 말이 사실일까요?”
“당문이 공손세가를 집어삼키려 한다는 것 말이냐?”
“네.”
드러난 사실은 공손세가의 중직 두 사람이 ‘불운한 사고’로 죽었다는 것뿐이다.
공손월의 추측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기엔 상식적으로 무리였다.
“당문이라면 능히 그렇게 할 만하지.”
객옹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당문이 아니다.”
그의 단언에 운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객옹은 당연한 듯 말을 이었다.
“당문이 강남을 지배하려면 공손세가와 혁련세가를 그대로 놔둘 수는 없다. 가장 좋은 방법 역시 비검의 말처럼 허울 좋은 껍데기만 남기는 것이고.”
객옹은 무심히 발을 옮겼다.
“비검의 추측은 옳다. 아니, 당문을 안다면 그 누구라도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독심(毒心)이 없으면 당문이 아니니까.”
정사대전 당시 당문은 소위 정파와 사파의 중간, 정사지간에 속했다.
엄정한 중립을 지켜서가 아니라 정사에 무관하게 오직 당문의 이득만을 최우선으로 두었기 때문이다.
자칫 양쪽에서 공격받을 수 있는 처신이었지만 당문은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당문의 저력과 독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혁련세가도 알아차렸을……. 아!”
말하던 운현은 탄식을 흘렸다.
혁련세가와 공손세가는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객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패검이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무림맹이 무너지던 날, 혁련세가의 가주인 패검 혁련철후는 철혈사왕 염중부의 기습을 받았다.
그리고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너를 찾아와야 했던 사람은 오히려 패검이었는지도 모르겠구나.”
객옹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패검은 의식을 잃었고, 대륙 남단에 자리 잡은 혁련세가는 장강이나 창룡맹이 자신들과 무관한 곳이라 여길 테니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쏴아아.
이강의 강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객옹과 운현은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계림의 기묘한 봉우리들과 굽이쳐 흐르는 이강의 물결이 어쩐지 낯설어 보였다.
***
태평맹의 계림 대연회는 화려하게 시작되었다.
당문을 비롯한 태평맹 모든 문파가 참석한 것은 물론이고, 계림에 있는 태평맹 소속 무인들 전부가 한자리에 모였다.
임무를 위해 나가 있는 이들을 제외하면 강남 공략에 참가한 무인들 대부분이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간 광서성의 낯선 풍토와 익숙지 않은 음식, 그리고 피 튀는 싸움에 지쳐 있던 각 파의 제자들은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마음껏 연회를 즐겼다.
달아오른 연회의 열기는 자연히 연회장 밖으로도 번져 가서, 계림의 번화가 전체가 마치 축제처럼 흥청거리고 있었다.
계림 대연회의 개최식에 공손세가의 가주와 외당 당주가 늦게 참석한 것 정도는 이야깃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하지만 대연회의 열기에는 아랑곳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공손세가를 주시하는 이도 있었다.
태평맹 광서 지부, 대외 총괄군사 집무실.
당설련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공손세가의 가주와 외당 당주를 만났다고?”
‘그’는 바로 창룡검주 운현이다.
수하는 고개를 숙였다.
“네. 허나 ‘그분’의 경계를 산 탓에 대화의 내용은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당설련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경계를 샀다니? 분명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고 일렀을 텐데?”
“저희가 아니었습니다.”
당설련이 멈칫했다.
“그러면 혁련세가였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자리를 감시하는 세력은 최소한 셋, 혹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수하의 말에 당설련은 잠시 생각했다.
창룡맹의 맹주이자 창룡검주인 운현의 동향을 알고 싶은 사람은 많을 것이다.
객옹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가주인 공손월이 그와 비무했으며, 결과는 공손월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비록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비무의 결과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최후의 격돌 후에 공손월이 한쪽 무릎을 꿇은 반면, 운현은 여전히 그대로 서 있었으니까.
“흥, 비무라고? 정말이지 한심한 짓을…….”
당설련은 노골적인 조소를 감추지 않았다.
공손세가의 가주가 창룡맹의 맹주를 은밀히 만난 것은 분명 중대사를 논의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무라니?
세가의 가주가 직접 나서야 할 정도로 중대한 문제가 그런 식으로 결정되는 것을 당설련은 절대로 납득할 수 없었다.
당장의 이해득실과 앞으로의 여파는 물론, 이후에 전개될 상황까지 고려하고서도 최선이라 확신할 수 없는 것이 강호 무림이니 말이다.
하지만 조소하는 것과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별개다.
생각에 잠겨 있던 당설련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공손세가의 가주가 눈치를 채고 딴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르겠네.”
“허나 의심이 갈 만한 것은 단 하나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수하가 말했지만 당설련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공손월은 증거 따위나 찾고 있을 사람이 아니야. 다음 목표가 누구였지?”
“내당 소속의 공손림입니다. 여색을 밝히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자로 알려졌으며 지금도 연회장에서 취해 있다고 합니다.”
그는 만취한 채 누각 난간에서 발을 헛디뎌 추락사할 예정이었다.
물론 불운한 사고로 말이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이 순간 바뀌어 버렸다.
“흠.”
당설련은 손가락으로 서탁을 톡톡 두드렸다.
마음 같아서는 공손세가의 가주를 처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공손세가의 가주를 건드리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설령 성공하더라도 다른 문파들에게 미칠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터였다.
‘자칫 강남 공략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어.’
무엇보다 문주 당천벽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함께 있던 사람이 외당 당주라고 했지?”
“네. 외당 당주 공손위입니다.”
“그로 하도록 해.”
수하는 당설련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공손세가 외당 당주 공손위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당설련은 수하에게 손짓했다.
수하는 예를 표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홀로 남은 당설련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달칵.
화려한 의자가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래, 외당 당주 정도면 충분히 경고가 되어 줄 거야. 하지만 딴생각을 품은 것에 대한 징계도 있어야겠지?’
결론을 내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설련은 자리에서 일어나 붓을 들었다.
사락.
백지 위에 붓이 내달리며 문장을 이루어 갔다.
일필휘지로 적어 내려간 당설련은 붓을 놓았다.
탁.
자신이 적은 내용을 살펴보며 당설련은 희미하게 조소를 머금었다.
“그래. 본래 잃고 난 뒤에야 그 소중함을 아는 법이지.”
***
저녁 시간이지만 천화객잔은 한산했다.
자리를 채우던 태평맹 무인들이 대연회로 몰려갔어도 다른 이들은 여전히 이곳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대연회가 끝나면 다시 태평맹 무인들로 채워질 것이니 말이다.
덕분에 운현 일행은 한산한 일 층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여유롭게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찻잔을 든 운현이 조관에게 물었다.
“이곳 관부에서는 태평맹의 움직임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공식적으로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입니다만 은근히 반기는 눈치입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조관이 말을 이었다.
“조정의 입장에서 이곳 광서의 문파들은 잠재적인 위험요소인 반면 태평맹은 관부에 협조적이니까요.”
광서성의 고위 관리, 즉 지방 대관들은 모두 중앙의 조정에서 임명된다.
당연히 조정과 같은 입장인 지방 대관들은 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있는 이 지역 문파들에 대해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교적 협조적이고 말도 잘 통하는 태평맹이 광서성의 지역 문파들을 정리하고 있으니, 대놓고 내색은 못 해도 은근히 기꺼운 것이다.
물론 태평맹이 그들에게 바친 뇌물 역시 중요한 요인이었고 말이다.
“그렇군요.”
“태평맹에 협조하지 말라 명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일차적인 목적은 이미 끝났습니다.”
조관은 놀란 표정을 했다.
계림에 온 지 채 사흘이 못 되었는데 목적을 이루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면 항주로 돌아갈까요?”
“모처럼 먼 길을 왔으니 며칠 더 머문 후에 떠나도록 하지요.”
부드러운 표정으로 운현이 말했지만 조관은 눈을 빛냈다.
운현이 느긋하게 유람이나 다니는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 운현이 말했다.
“이 서찰을 영호준 총군사께 전해 주시겠습니까?”
바스락.
운현은 품에서 얄팍한 서찰 한 장을 꺼내 조관에게 건넸다.
“물론입니다.”
조관이 답하며 정중하게 서찰을 받았다.
“가능한 한 빠르게 전해 주십시오. 어쩌면 여러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인지도 모릅니다.”
갑작스러운 그 말에 조관은 운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운현의 눈빛은 진지하기만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조관과 항장익은 운현과 객옹에게 예를 표한 후 자리를 떴다.
그들이 객잔 밖으로 나가자 운현은 찻잔을 들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객옹은 묵묵히 차를 음미하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