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화. 비검(飛劍)과 미명(未明)
이강의 강변에 긴장이 흘렀다.
짙푸른 대나무 숲은 물론 이강의 흐르는 물결마저 운현과 공손월의 비무를 지켜보는 듯했다.
우웅.
공손월의 비검이 울음을 흘렸다.
그 소리에 답하듯 비검에 어린 짙푸른 검기가 천천히 일렁였다.
그것은 공손월이 절정의 경지에 올라선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었다.
후우우웅.
사실 무인의 경지를 나누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내력으로 모든 것이 정해지는 것도 아니며 상승의 무공을 익혔다고 반드시 이기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인으로서 절정의 경지에 올랐음을 나타내는 단 하나의 표지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검기였다.
천하에 자르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평범한 검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다는 검기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절정고수의 증거였다.
슥.
운현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의 검은 여전히 아무런 기세조차 피워 올리지 않고 있었다.
공손월의 눈썹이 꿈틀했다.
“……괜찮겠소?”
“네.”
운현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검기는 익숙합니다.”
공손월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선대 가주 뇌검 남궁진천 이후 검기 발현은 이제 충격적인 소식이 되지 못했다.
당장 공손세가의 대제자만 해도 검기 발현의 초입에 들어섰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가주인 공손월의 검기는 그 격이 다르다.
짙푸르게 일렁이는 공손월의 검기는 그가 검기를 완숙하게 다르는 경지에 들어섰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알았소.”
공손월이 말했다.
이미 운현의 검을 본 이후였기에 더 이상 의문은 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비검을 똑바로 세워 운현을 향했다.
우우웅.
짙푸른 검기가 눈앞에서 일렁였다.
공손월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났다.
“하아!”
부욱.
짙푸른 검기가 잔상을 남기며 운현을 향해 짓쳐 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허공에 푸른 비단이 펼쳐지는 듯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 푸른빛이 가르고 지나가는 곳에는 오직 죽음과 파괴만이 예정되어 있었다.
후우욱.
자신을 향해 짓쳐 드는 공손월의 검기를 운현은 지긋이 바라보았다.
놀라움도 당혹감도 없었다.
하지만 운현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스륵.
그의 검, 미명이 허공을 가르고 움직였다.
여전히 아무런 기세도 뿜어내지 않은 그 칼날이, 짓쳐들어오는 공손월의 비검을 향해 날아들었다.
‘역시.’
공손월은 운현이 조금 전 그 검을 펼치려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을 허공으로 날려 보낸 그 놀라운 검법 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자신의 비검은 짙푸른 검기를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후우욱.
공손월은 자신만만하게 운현을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사락.
아니나 다를까?
허공을 유영해 온 운현의 미명은 이번에도 공손월의 비검과 검 끝을 마주했다.
두 검 끝이 마주치는 순간, 운현의 미명이 박살 나 버릴 것을 공손월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운현의 검로는 공손월의 예상과 달랐다.
스륵.
미명의 검 끝은 찰라지간, 아주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마치 작고 여린 꽃잎이 사람의 손을 피해 밀려나듯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결과 두 검 끝은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 스쳐 지나간 듯했던 미명의 검 끝은 어느새 공손월의 검신에 가 닿고 있었다.
사아아아아.
바람 새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미명의 검 끝이 비검의 검신을 미끄러지듯 어루만지며 공손월에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검기가 일렁이는 공손월의 비검은 어느새 본래의 검로를 벗어나 옆으로 흐르고 있었다.
‘헉!’
공손월은 대경실색했다.
이대로라면 운현의 미명이 공손월의 손을 가르고 가슴에 박힐 판이었다.
비록 공손월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과거 독고랑이 공손세가의 대제자를 맞아 펼친 검로 그대로였다.
“하아!”
공손월은 즉시 자신의 모든 내력을 끌어 올렸다.
비틀린 검로를 되돌리는 동시에 공손월은 운현의 미명을 떨쳐 내려 했다.
하지만 미명은 공손월의 시도를 허락하지 않았다.
후욱.
공손월의 검은 결국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엄청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콰아앙―!
폭음이 주위를 울리고 폭풍 같은 기세가 사방을 휩쓸었다.
풀잎이 날아오르고 충격의 범위 안에 있던 이강의 강물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튀어 올랐다.
지켜보던 객옹과 외당 당주 공손위의 옷자락도 세차게 펄럭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휘릭.
미명이 허공에 빛을 뿌렸다.
검의 상태를 살피듯 가볍게 휘두른 운현은 고개를 돌려 공손월을 바라보았다.
“으음.”
공손월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세웠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옷자락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지만 공손월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시선은 자신이 땅에 남긴 긴 흔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뒤틀린 검로를 공손월이 되찾는 동안 생겨난 흔적이자, 운현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공손월을 베어 버릴 수 있었다는 증거였다.
공손월은 고개를 들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 검법은 무엇이오?”
공손월이 나지막이 물었다.
“대체 어떻게 검기를…….”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검기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내력을 담은 검 정도로는 절대 검기에 맞설 수 없고, 검기 앞에서는 모든 검법과 초식이 그 의미를 잃는다.
그런데 지금 운현은 공손월의 검기를, 그것도 초입과는 격이 다른 짙푸른 검기를 완벽하게 파훼해 버렸다.
“이것은 백호실전검 제이식, 유검(柔劍)이라 합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답했다.
“알고 보면 상대의 검로를 그저 조금 비틀었을 뿐이지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강한 힘일수록 쉽게 길을 잃기 마련이더군요.”
운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공손월은 알 수 있었다.
작은 힘으로 큰 힘을 다루는 사량발천근,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이화접목의 수법, 모두가 강호 무림에선 익히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경지가 높지 않을 때의 일이다.
절정고수가 뿜어내는 검기를 비틀었다면 그것은 가히 신공이라 불러야 마땅했다.
“허어.”
공손월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운현은 자신의 판단이나 상식과는 아주 다른 곳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그대에게 경의를 표하오.”
공손월은 말했다.
그것이 결코 패배의 선언이 아니라는 것을 운현은 알 수 있었다.
말하는 공손월의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릭.
공손월은 자신의 검, 비검을 가볍게 허공에 흩뿌렸다.
그리고 검 끝을 비스듬히 아래로 내렸다.
“이것은 비검승천이라 하오.”
공손월이 담담하게 말했다.
비검의 칼날이 햇빛 아래 번쩍였다.
“그리고 이 일 검이 나의 모든 것이오.”
후우우욱.
엄청난 기세가 공손월에게서 쏟아져 나왔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겠다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하듯 공손월을 중심으로 폭풍 같은 기세가 휘몰아쳤다.
파라락.
공손월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펄럭였다.
비스듬이 아래로 내린 그의 비검에서는 짙푸른 검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우우우우웅.
그것은 말 그대로 비검 공손월의 모든 것이었다.
스륵.
운현은 미명을 옆으로 뻗었다.
나지막한 울음이 미명에서 흐르는 것과 동시에 운현의 발밑으로 하얀 서리가 번져 갔다.
우웅, 츠즈즈즈즈.
공손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나지막이 흐르는 미명의 울음은 운현이 공손월의 일 검을 정면에서 상대하겠다는 의미였다.
“……가겠소.”
훅.
공손월의 신형이 운현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그 순간 그의 전신에서 뿜어 나오던 기세가 변화했다.
자신의 검에서 일렁이는 검기처럼, 공손월의 기세는 어느새 푸른 불꽃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은 바로 공손월과 비검이 하나가 된 검신일체(劍身一體)의 경지였다.
콰과과곽.
공손월이 비검과 함께 짓쳐 들었다.
그러나 운현의 미명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락.
운현의 검 끝이 허공에 원을 그려 나갔다.
마치 모든 것을 감싸 안을 듯 부드러운 그 검로는, 바로 백호실전검 제일식 예검이었다.
***
파스스스.
대나무 숲의 흔들림이 잦아들고 시야를 가리던 흙먼지와 풀잎들도 가라앉았다.
물보라를 일으키던 이강의 강물도 뒷물결에 밀려 본래의 흐름을 되찾고 있었다.
스릉.
운현은 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공손월을 바라보았다.
“비검승천이라 하셨습니까?”
고개를 떨구고 있던 공손월이 움찔했다.
그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과거 환우오천존의 상징과도 같았던 검기를 발현하였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검신일체의 경지를 이루어 드디어 비검과 하나가 되었을 때, 공손월은 그것을 ‘비검승천’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 검으로 공손세가의 이름이 천하에 우뚝 설 것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의의 습격에 공손세가의 본가가 불에 타고 영웅맹에 장강을 빼앗겼어도 다만 아직 천시(天時)가 아닐 뿐이라고 여겼다.
제아무리 고수라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그저 기인이나 은거고수가 될 뿐이니까.
“……그렇소. 이것은 비검승천이라 하오.”
공손월은 나지막이 말했다.
“허나 하늘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이제는 유회(有悔)만이 남았소이다.”
그것은 용의 승천에 비유한 말이었다.
높이 오른 용이 마침내 후회하듯이[亢龍有悔], 자신만만하던 공손월의 검은 운현에게 꺾여 버린 것이다.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이것이 생사결이었다면 말입니다.”
공손월은 자신도 모르게 운현을 돌아보았다.
운현은 말을 이었다.
“허나 이것은 비무일 뿐이며 우리는 또한 적이 아닙니다. 그러니 남은 것은 유회가 아니라 함께 술 한 잔을 나누는 것뿐이겠군요.”
말하는 운현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공손월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말은 곧 공손월을 ‘뜻을 같이하여 피를 나눌만한 무인’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그렇소?”
“비검께 어찌 허언을 하겠습니까?”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일어나시지요. 이곳은 비검께서 머물러 계실 만한 곳이 아닙니다.”
그 말은 의미심장했다.
“허허.”
공손월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조용히 되물었다.
“진정 그러하오?”
“네. 진정 그러합니다.”
운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비록 운현의 예검을 넘지는 못했으나 어찌 공손월이 이룬 경지가 헛되다 하랴?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공손월의 ‘비검승천’은 마땅히 존중받아 마땅했다.
슥.
공손월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공손월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대의 말이 옳소. 이곳은 결코 내가 머물러 있을 곳이 아니오.”
“그렇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월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그대의 검을 마주하고 나니 이제야 그대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겠소.”
“저도 그렇습니다.”
운현의 대답에 공손월이 빙긋 웃었다.
“공손세가의 가주로서 말하겠소. 나는 그대의 창룡맹에…….”
“가주님!”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공손월은 고개를 돌렸다.
털썩.
외당 당주 공손위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땅에 이마를 찧었다.
쿵.
“가주의 명은 지엄하니 그 누구도 감히 거역할 수 없습니다. 허나 지금 그 뜻을 밝히시면 그로 인한 혼란이 극심할 것입니다.”
공손월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공손위의 말은 옳았다.
공손월은 무인인 동시에 공손세가의 가주다.
자신이 경솔히 뜻을 밝힘으로서 밀어닥칠 세가의 혼란은 물론, 만의 하나 있을지 모를 태평맹의 보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신 것 같군요.”
운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가 끝나면 항주로 오십시오. 좋은 술을 준비해 놓고 있겠습니다.”
공손월 역시 미소를 머금었다.
“알겠소. 내 기꺼이 그리하리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공손월은 외당 당주 공손위를 내려다보았다.
“자네의 염려는 잘 알겠네. 허나 내 뜻은 변하지 않을 것일세.”
공손위는 즉시 땅에 이마를 찧었다.
쿵.
“가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그 모습에 가주 공손월도 더 이상 무어라 할 수 없었다.
공손위의 충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공손월은 운현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했다.
“감사하오. 맹주.”
그것은 그저 운현이 창룡맹의 맹주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호칭이 특별하게 들린 사람은 운현만이 아니었다.
사락.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모아 공손월에게 답례했다.
공손월은 공손위를 일어나게 한 후 객옹에게도 예를 표했다.
그리고 경공을 펼쳐 대나무 숲 너머로 사라져 갔다.
쏴아아.
바람이 불고 대나무 숲이 흔들렸다.
공손월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지만 운현의 입가에는 따뜻한 미소가 한동안 떠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