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화. 뜻을 함께하여 피를 나누는 자
공손세가의 외당 당주 공손위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세가 모든 이들의 우상이자 경외하는 가주가 ‘부디 도와 달라’며 간청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인 창룡검주 운현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창룡맹의 맹주라 해도 어찌 공손세가의 가주에게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라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일 눈앞에 독선, 스스로 객옹이라 칭하는 그가 있지 않았다면 당장 표정을 붉혔을 것이다.
그러나 독선 앞에서 감히 불쾌한 표정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공손세가의 선대 가주가 ‘그 앞에서는 숨만 쉬어도 죽어 나갔지’라며 씁쓸하게 말했던 모습이 눈앞에 생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손위는 무표정한 얼굴로 배 바닥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공손위의 귓가에 가주 비검 공손월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손월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공손세가의 가주요. 내가 명하면 가문의 그 누구라도 기꺼이 복종하오. 그건 내 말이 그들의 뜻과 같거나 납득이 되어서가 아니라, 바로 ‘가주의 명’이기 때문이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복종하는 이유요.”
운현을 바라보며 공손월은 말을 이었다.
“허나 대협께서 ‘왜 해야 하는가’라는 이유를 달라 하면 나는 그 이유를 줄 수 없소. 천하에서 대협께 이유를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대협 자신뿐일 테니 말이오.”
그건 가히 우문현답이라 할 수 있었다.
공손월은 이런저런 이점이나 대가를 제시하는 대신, 운현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운현 자신뿐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것은 이 일이 전적으로 운현의 뜻에 달려 있다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저를 부끄럽게 하시는군요. 저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니, 대단하오.”
공손월은 단호하게 말했다.
“공손세가의 가주가 도움을 청할 사람이, 천하에 과연 몇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오?”
더 이상 겸양할 수 없음을 운현은 깨달았다.
그리고 공손월이 얼마나 절박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왔는지도 알 수 있었다.
짐짓 격동시키고자 했던 운현의 차가운 응대 같은 건 조금도 개의치 않을 정도로 말이다.
운현은 공손월을 바라보며 말했다.
“굳이 장강의 영향력을 회복하지 않더라도 강남의 풍부한 물산이라면 공손세가를 보존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그건 ‘결국 장강의 이권을 되찾기 위해 창룡맹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말이었다.
“타산적인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소. 하지만 대협께 도움을 청하기로 한 것은 그저 장강의 이권만을 위함이 아니오.”
공손월은 심각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대로라면 공손세가는 허울 좋은 껍데기만 남게 될 것이오.”
“어째서요? 태평맹의 강남 공략은 제법 성공적으로 보입니다만.”
쓴웃음을 지으며 공손월은 말을 이었다.
“광서와 귀주, 운남은 그 지세가 매우 험하고 풍습과 기후도 크게 다르오. 공손세가가 이곳에 뿌리를 내리려면 적어도 십 년,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할 것이오.”
공손월이 말한 지역은 황실조차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곳들이었다.
이민족이 대다수인 데다 지리조차 험해서, 설령 민란이 일어나더라도 길목을 막고 다른 곳으로 번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일 정도였다.
그러니 강남의 무인들이 공손세가의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오. 당문은 결코 강남을 공략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오.”
“무슨 뜻입니까?”
운현이 묻자 공손월은 이를 악물었다.
“수십 년을 키워 온 가문의 인재 두 사람을 잃었소. 불운한 사고였다지만 나는 믿지 않소. 아마 강남 공략이 끝날 때까지 이런 사고는 결코 끊이지 않을 것이오.”
당문은 짐짓 양보하는 척하며 다른 문파들을 계속 험지로 내몰 것이다.
가문의 인재들은 계속 죽어 갈 테고 공손세가가 차지한 강남의 지역들은 끝없이 사람과 물자를 삼킬 것이다.
진퇴양난에 처한 공손세가를 당문이 잠식해 들어오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으리라.
“강남의 공략이 마무리될 때면 당문은 실질적으로 공손세가를 집어삼킨 뒤일 것이오. 아니, 공손세가를 집어삼킨 후에야 비로소 강남 공략이 끝날 테지.”
공손월은 눈을 들었다.
“재물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내어 드리겠소. 세가의 무공비급과 영약을 달라 해도 그리하겠소. 공손세가가 창룡맹에 굴복했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이라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겠소.”
뒤에 있던 공손위의 어깨가 꿈틀 경련했다.
하지만 공손월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니 부디 공손세가를 도와주시오.”
운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까지 하실 정도라면 차라리 태평맹에 남아 있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공손월의 말은 세가의 자존심마저 내려놓겠다는 뜻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런 치욕을 어찌 공손세가가 감내한단 말인가?
“그렇지 않소.”
공손월은 조금도 주저 없이 단언했다.
“대협은 태평맹 밑에서 공손가의 혈통이 제대로 이어질 것이라 보시오?”
‘아.’
운현은 공손월의 의도를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공손월에게 이것은 단순한 이해타산이나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당문이 공손세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다면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공손세가의 혈통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혈통(血統)…….’
황실로부터 평범한 양민에 이르기까지 혈통의 계승은 이 시대에서 그 무엇보다 우선되는 가치다.
더구나 혈족에 기반을 둔 세가들로서는 그 의미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일반 문파와는 사뭇 다르게 말이다.
“……가주께서는 능숙한 상인은 되지 못하시겠군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신의 패를 이렇듯 전부 보이시니 말입니다.”
거래에서 자신의 패를 숨기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지금 가주 공손월은 자신의 패를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내보였다.
운현이 무엇을 요구하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공손월 역시 쓴웃음을 지었다.
“허나 어쩔 수 없소. 진실과 진심이 아니고서야 어찌 대협의 도움을 바랄 수 있겠소?”
어쩌면 공손월이야말로 대단한 도박꾼일지도 몰랐다.
그의 말처럼 운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진심과 진실뿐이었으니까.
운현은 잠시 침묵했다.
철썩.
이강의 물결이 유람선의 뱃전에서 소리를 냈다.
“……강호 무림은 이해득실과 힘의 논리에 의해 모이고 흩어집니다. 아니, 어쩌면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러한 것인지도 모르지요.”
조용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허나 ‘맹(盟)’이란 뜻을 함께하여 피를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강호 무림의 논리로 이 문제를 결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공손월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 말은 운현의 뜻이 정해졌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공손세가가 능히 뜻을 함께할 만한 자격이 있음을 제게 보여 주십시오.”
“어떻게 말이오?”
“사람은 속여도 자신의 칼은 속이지 못하는 법이지요.”
운현은 빙긋 웃었다.
“무인의 진심을 알고자 한다면 비무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공손월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에는 한 점 거짓도 없었다.
그는 자신에게 가주나 세가의 영향력이 아니라 무인의 진심을 원하는 것이다.
‘……무인(武人).’
그것은 공손월의 가슴을 뛰게 하는 단어가 아닐 수 없었다.
그 역시 무인이다.
게다가 상대는 한때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졌으며, 신승의 사제이자 창룡맹의 맹주인 창룡검주 운현이었다.
그와 검을 나누는 것에 어찌 가슴이 뛰지 않으랴?
“좋소.”
눈을 빛내며 공손월이 말했다.
“기꺼이 그리하리다.”
강렬한 공손월의 눈빛은 세가의 가주가 아니라 한 사람의 무인, 비검 공손월로 돌아와 있었다.
***
계림의 이강 강변, 이름 없는 빈터에서 운현과 공손월은 마주 섰다.
한쪽 옆에는 대나무 숲이 바람에 일렁이고, 반대편에는 이강의 물결이 철썩이며 흘렀다.
운현의 눈빛은 청명했고 비검 공손월의 눈빛에는 비장감이 엿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비무를 앞둔 긴장감만은 감추지 않았다.
쏴아아.
강바람이 둘의 옷자락을 일렁이며 지나갔다.
스릉.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이 검을 뽑았다.
운현의 미명과 공손월의 비검이 햇살 아래 반짝였다.
“미리 말해 두지만.”
지켜보던 객옹이 문득 말했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해야 할 게다.”
그 충고가 누구를 향한 것인지 공손월은 알고 있었다.
후우우웅.
객옹의 말에 답하듯 공손월에게서 거친 기세가 쏟아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검이 나지막한 울음을 흘렸다.
웅, 웅.
그러나 운현의 검은 여전히 조용하기만 했다.
놀랄 만한 기세는커녕 그 흔한 예기조차도 없었다.
“……가겠소.”
공손월이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필요 없었다.
“언제든지요.”
운현이 조용히 답했다.
공손월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더 이상 주저하지는 않았다.
스륵.
자신의 검, 비검을 슬며시 안쪽으로 당기는 것과 동시에 공손월의 발이 땅을 박찼다.
“하아!”
후우욱.
순간 공손월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비단 찟는 소리와 함께 공손월의 비검이 허공에 선을 그렸다.
부욱.
그것은 바로 공손세가의 절초 중 하나인 비조추월이었다.
달빛을 가르고 날아가는 새처럼, 공손월은 자신의 비검과 하나가 되어 운현을 향해 똑바로 짓쳐 들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운현의 검, 미명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
공손월은 순간 갈등했다.
하지만 비조추월은 잡념을 품고 펼칠 수 있는 검이 아니다.
공손월은 자신의 비검과 함께 운현을 향해 쏘아져 들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사락.
운현의 검이 움직였다.
그건 너무도 느리고 때늦은 대응이었다.
게다가 대단한 절기는커녕 특별한 초식조차도 아니었다.
그저 들고 있던 검을 비스듬히 위로 올려 긋는 지극히 단순한 동작.
그조차 운현의 검끝이 하늘로 향하기도 전에 비무가 끝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스르륵.
운현의 검은 여유롭게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나 그 느릿하던 검 끝이 어느 사이엔가 공손월의 비검을 정확히 마주하고 있었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공손월이 경악하던 그 순간.
슥.
운명처럼 두 검이 마주쳤다.
충격은 물론 소리조차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놀랄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훅.
공손월의 시야가 순간 격하게 회전했다.
그의 눈앞에서 말 그대로 천지가 뒤집히고 있었던 것이다.
‘큭!’
상황을 파악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공손월은 즉시 내력을 끌어 올렸다.
콰앙.
두 자루의 검 끝이 나뉘며 충격음이 사방을 휩쓸었다.
운현의 옷과 머리카락이 세차게 펄럭였다.
사락.
미명을 거두며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공손월이 허공에서 떨어지듯 내려앉았다.
파라락, 탁.
공손월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운현은 여전히 그대로 서 있는 반면 자신은 한 손으로 땅을 짚어야 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라고.”
운현이 공손월을 쳐다보며 조용히 말했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공손월을 바라보는 운현의 눈빛은 서늘했다.
그 눈빛은 마치 공손월의 마음 밑바닥까지 꿰뚫어 보는 듯 했다.
“알겠소.”
슥.
공손월은 몸을 일으켰다.
객옹의 충고를 귀담아듣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검 공손월이 펼치는 비조추월은 공손세가의 절기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공손월의 ‘전력’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았다.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공손월은 말했다.
“내 기꺼이 그리하리다.”
더 이상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다음 순간, 칼날 같은 기세가 공손월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후드득.
발밑의 풀들이 세차게 흔들리고 놀란 새들이 대나무 숲에서 날아올랐다.
그리고 공손월의 검에 짙푸른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공손월의 비검에서 줄기줄기 쏟아져 나오는 짙푸른 기운, 그것은 바로 검기였다.
운현의 입가에도 그제야 희미한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