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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16화 (416/530)

416화. 기루 주인입니다

객옹의 눈빛은 담담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객옹의 신념이자, 삶 그 자체라 부를 만한 것이었다.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슥.

객옹은 당문의 문주 당천벽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돌아가라. 예라면 충분히 받았다.”

당천벽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당설련이 독선의 마음을 바꾸지 못한다면 당문의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알겠습니다.”

당천벽은 고개를 숙여 객옹의 뜻을 받들었다.

객옹은 몸을 돌렸다.

“할아버지.”

돌아서던 객옹이 멈췄다.

당설련이 객옹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자와 함께 계신 것은 할아버지의 뜻이 창룡맹에 있다는 의미인가요?”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은 운현을 향하고 있었다.

객옹은 흘깃 운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창룡맹은 또 무엇이냐?”

객옹은 연민의 눈빛으로 당설련을 향해 말했다.

“독선도, 약선도 모른다 한 내가 어찌 맹 같은 것에 뜻을 두겠느냐?”

당설련은 물론 문주 당천벽의 눈빛에도 이채가 스쳤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놈은.”

객옹은 당설련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운현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기루 주인이다.”

당설련과 당천벽의 눈살이 살짝 일그러졌다.

분명 창룡검주이자 창룡맹의 맹주이거늘 갑자기 기루 주인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두 사람의 시선에 운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부인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비록 현판은커녕 짓지도 않은 기루지만, 주인이 될 예정인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슥.

객옹은 지긋이 당설련을 쳐다보았다.

“건강해라, 연아야.”

그것이 대화의 끝이었다.

객옹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그 뒷모습을 운현과 당설련, 문주 당천벽,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든 현무대주 당엽이 말없이 지켜보았다.

객옹의 모습은 곧 사라졌다.

“죄송하지만 따로 배웅은 못 하겠군요.”

문득 운현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설련과 당천벽, 당엽이 바라보는 가운데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조심해서 가십시오. 아, 그리고.”

당설련을 바라보며 운현이 말했다.

“매화검이 소저께 안부를 전하라더군요. 그러고 보니 우연찮게도 두 분의 직책이 비슷하네요. 총군사와 총괄군사요. 후후후.”

무엇이 우스운지 운현은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이 당설련의 적개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너…….”

후욱.

순간 차가운 기운이 객잔에 드리웠다.

무언가 말하려던 당설련이 흠칫하고 당천벽과 당엽도 눈을 크게 떴다.

그 기운은 바로 눈앞에 있는 운현에게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은 그냥 보내 드리겠습니다. 저는 그저 기루 주인이니까요.”

후우우욱.

운현의 눈동자는 더없이 차가웠다.

조금 전 그 부드럽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서늘한 눈빛으로 세 사람을 내려다보며 운현이 말했다.

“절명비의 책임을 당문에 묻겠습니다.”

그 눈빛에 당설련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운현의 암습과 당문이 직접 연관되었다는 증거 같은 건 없을 터이다.

설령 의혹을 제기한다 해도 핑계나 변명은 무수히 많았다.

그러나 그 어느 것 하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운현이 뜻을 정한 이상 당설련은 그것을 돌이키지 못한다.

훅.

살갗이 에일 듯 차갑던 기운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세 사람을 내려다보던 운현은 몸을 돌렸다.

저벅.

운현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조금 전 객옹이 올라간 바로 그 계단을.

운현의 모습 역시 곧 계단 너머로 사라졌다.

하지만 서늘한 기운은 여전히 객잔 안을 맴돌고 있었다.

“음.”

불편한 신음이 당천벽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제야 당설련은 자신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락.

당설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피가 배어 나올 듯 깨문 입술은 어쩔 수 없었다.

“가자.”

당천벽이 말했다.

세 사람은 천화객잔을 나섰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몸을 실었다.

탁.

따각, 따각.

번화가의 불빛이 창밖으로 지나갔다.

마차는 금방 태평맹 광서 지부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세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현무대주 당엽이 조용히 물었다.

이미 마차는 멈춰 섰지만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문주인 당천벽이 내릴 생각조차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떻게라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당천벽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저 그분이 하신 말씀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독선이 스스로 객옹이라 하면 객옹인 것이다.

‘사슴을 끌고 와 말이라고 해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指鹿爲馬]’는 옛 고사가, 의미는 다르지만 그대로 재현된 셈이다.

“독선께서는 대체 무슨 의도로…….”

“독선이 아니라.”

당천벽이 당엽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객옹일세. 우리가 만난 분은 독선이 아니야. 알았나?”

당엽은 즉시 고개를 숙였다.

문주 당천벽의 말은 이번 일의 파장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아요.”

당설련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는 문주 당천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여전히 당문으로 돌아오실 뜻이 없어요. 안타까운 일이지만요.”

당천벽의 눈살이 살짝 일그러졌다.

독선이 당문으로 돌아오는 것은, 적어도 문주인 당천벽에게는 마냥 반길만한 일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또 하나, 창룡맹에 들어가신 것도 아니에요. 그자와 함께 계시긴 하지만, 아마 할아버지의 또 다른 기행에 불과할 거예요.”

당설련보다 독선의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문주 당천벽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강호 무림의 일에 개입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뜻이냐?”

“네. 분명해요.”

당천벽은 생각에 잠겼다.

독선이 맹이나 문파와 연관되지 않는다면 상황의 변화는 없다.

비록 현무대 제삼분대가 독선의 심기를 거슬러 잠에 빠져들었지만 그 정도의 일은 강호 무림에서 일상다반사다.

물론 일상다반사라 하기엔 독선도, 현무대 제삼분대도 그 무게감이 남다르지만 말이다.

“다른 문파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더냐?”

“아직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어요. 하지만 오래 숨기지는 못할 거예요.”

단목세가나 남해검문은 몰라도 공손세가나 혁련세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독선이 당장 떠날 것이 아니라면 그들이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다.

현무대주 당엽이 말했다.

“객잔 출입을 통제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네.”

당천벽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자칫 독선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었다.

“다만 앞으로 그 객잔에는 당문 사람들의 출입을……. 아니, 이것도 좋지 않군.”

객잔의 출입을 금하면 도리어 호기심을 부추겨 주목을 받을지도 모른다.

“연회를 열도록 하지요.”

당설련이 말했다.

“광서성 공략이 거의 마무리되었으니 공적을 치하하고 사기를 북돋을 때가 되었어요. 태평맹의 이름으로 연회를 열되 각 문파가 모두 참석하도록 하지요.”

조금도 막힘없이 당설련은 말을 이었다.

“특히 당문의 제자들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말예요.”

“흠.”

당천벽은 당설련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태평맹의 이름으로 연회를 열면 당문의 재정 부담도 덜했다.

“그렇게 하지.”

“허나 다른 문파들이 그분과 얽힐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현무대주 당엽이 말했다.

사소한 시비가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당장 현무대 제삼분대가 쓰러진 것도 사소한 시비 탓이 아니었던가?

이곳 계림에서 태평맹 무사들이 안하무인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엽의 염려는 당연했다.

하지만 문주 당천벽이나 당설련에게는 아니었다.

“그걸 왜 우리가 신경 써야 하지요?”

당설련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엽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독선이 다른 문파 사람들과 말썽이 날지도 모르는데 왜 신경 써야 하냐니?

“그분은 독선이 아니고 객옹이셔요.”

당설련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누구든지 독선을 만났다고 주장하려면 먼저 자신이 만난 사람이 독선임을 증명해야 할 거예요.”

당엽은 당설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한마디로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묵살하겠다는 뜻이다.

“허나 소문이 퍼지면…….”

“소문요?”

당설련은 피식 조소를 흘렸다.

그 눈빛은 마치 그 정도밖에 안 되느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언제는 소문이 없었나요? 당문이 태평맹을 일으킨 것이 독선께서 계셨기 때문인가요? 다른 문파들이 우리 당문에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려 한 것이, 한두 번이던가요?”

당설련의 눈동자는 불꽃이 튀는 듯했다.

“당문이 걱정되신다면 입을 닫고 계세요. 그게 최선이니까.”

그녀의 독설은 가차 없었다.

현무대주 당엽은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당설련의 말처럼 지금은 그것이 최선이니까.

문주 당천벽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후의 일은 총괄군사에게 맡기지.”

“네.”

사락.

당설련은 고개를 숙였다.

“기꺼이 문주님의 뜻을 받들겠어요.”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

하지만 아직 말해야 할 것은 남아 있었다.

―절명비의 책임을 당문에 묻겠습니다.

창룡검주 운현의 음성과 그 서늘한 눈빛이 눈앞에 생생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해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달칵.

문이 열리고 문주 당천벽이 마차에서 내렸다.

굳은 표정의 현무대주 당엽도, 그리고 날카로운 눈매의 총괄군사 당설련도 밖으로 나왔다.

쏴아아아.

계림의 밤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당설련은 어딘가를 돌아보았다.

그곳은 객옹이 머물고 있는 천화객잔 방향이었다.

―건강해라, 연아야.

연민의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객옹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할아버지도 건강하세요.’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되뇌이며 당설련은 고개를 돌렸다.

자박.

당당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태평맹 총괄군사이자 당문의 눈꽃, 당문설화 당설련으로 돌아와 있었다.

***

다음 날, 이른 새벽.

운현은 천화객잔 뒷편의 공터에 서 있었다.

새벽 안개가 세상을 뒤덮고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기묘한 봉우리들은 마치 선경(仙境)에 들어선 것 같았다.

밤은 이미 그 힘을 잃었지만 해는 아직 뜨지 않았고, 그저 가끔 들리는 새벽 새소리 외에는 세상 전부가 고요 속에 잠들어 있었다.

달칵.

객옹이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차향을 음미하는 객옹은 운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객옹이 있는 것만으로도 운현은 편안함을 느꼈다.

스릉.

운현은 미명을 뽑았다.

어슴푸레한 빛 아래서도 미명의 칼날은 그 아름다움을 뽐내듯 반짝였다.

운현은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후우우웅.

부드러운 흐름이 운현을 휘감았다.

마치 스치는 바람처럼 가볍던 그것은 이내 곧 거대한 흐름이 되고, 세상을 지나는 별들의 흐름이 되었다.

하늘도, 땅도, 그리고 모든 이들의 운명도 그 안에서 빛을 발하며 흘러가고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새로운 세계, 그러나 결국 깨어나야만 했던 그 광경이 지금 운현의 눈앞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사락.

운현은 검을 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북해의 검 미명이었으나 그의 마음에 세운 검은 미명이 아니었다.

후욱.

운현의 검이 허공을 가르고 움직였다.

두려움도 주저함도 없었다.

미명은 어느새 창룡이 되어, 세상을 감싸 안고 흐르는 그 도도한 흐름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결코 주저함 없이.

백호수련검이되 더 이상 백호수련검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운현의 검로.

그것은 바로 창룡검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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