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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15화 (415/530)

415화. 객잔의 대면(對面)

당문의 문주, 청염군 당천벽은 서탁 위에 놓인 두 장의 용모파기를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젊은 문사와 한 노인의 용모파기였다.

용모파기가 다 그러하듯 명확한 특징이 없는 이상 다 비슷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당천벽은 그 용모파기를 보는 순간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아니, 정확히는 그 노인이 누구인지 알아본 것이다.

어찌 모를 수가 있을까?

그는 바로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이자 당문의 절대고수, 독선이었으니 말이다.

“어떻게 할까요?”

옆에 있던 현무대 대주, 당엽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용모파기를 알아보고 즉시 문주 당천벽에게 가져왔다.

비록 독선을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당문의 주요 직책에 있는 이들은 반드시 독선의 용모파기를 숙지하기 때문이다.

독선은 당문의 살아 있는 전설이다.

정사대전 당시 정사와 피아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공포의 대명사였으며, 삶과 죽음조차 주관한다는 독선에 대해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이 누가 있으랴?

독선의 위명은 당문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가슴 뛰는 영웅담이자 당문의 우월함을 만천하에 똑똑히 보여 주는 살아 있는 증거였다.

그러므로 독선은 당문의 영웅이자 경외의 대상이며 전설이었다.

만일 독선이 공식적으로 당문을 떠나지만 않았어도 독선은 이미 당문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만큼 당문에서 독선이 가지는 위치는 독보적이었다.

비록 무림맹 설립 이후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지만 말이다.

“마땅히 찾아뵈어야지.”

문주 당천벽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문의 큰 어르신께 어찌 예를 표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공식적으로 독선은 당문을 떠났다.

그 말은 당문과 독선이 서로에게 어떠한 의무나 권리도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관계와 개인적인 친분은 다르다.

게다가 어찌 천륜을 끊으라고 강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당문의 사람이, 설령 문주라 하더라도 독선에게 예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누구를 대동하시겠습니까?”

현무대주 당엽이 물었다.

그 물음에서 당엽의 노련함이 묻어났다.

“적을수록 좋지 않겠나?”

당문의 권력을 쥔 사람은 문주 당천벽이다.

그가 다른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아무리 상대가 독선이라 해도 문주의 위엄을 손상시킬 위험을 내재하고 있었다.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을 테니까.”

바스락.

문주 당천벽이 또 다른 용모파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문사가 누구인지 당천벽은 알고 있었다.

아니, 잊을 수가 없었다.

‘창룡검주 운현.’

한때 떠돌던, 그가 검성의 후계라는 소문은 애초에 믿지 않았다.

다만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 신승의 저의가 의심스러웠을 뿐이다.

신승의 사제라 했지만 대단치 않게 여겼다.

자신의 경지가 과거의 환우오천존을 넘본 정도라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림맹이 무너진 이후, 태평맹 용봉지회에서 마주친 운현은 달랐다.

그가 날린 젓가락 하나는 용봉지회 우승자이자 운현을 도발하던 당혁의 오룡검을 단번에 부러뜨렸다.

심지어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해 밀려나던 당혁을 문주 당천벽이 붙들었으나, 몸을 한 바퀴 돌리고서야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그리고 운현이 한 말을 당천벽은 지금도 잊지 못했다.

―아직 하나 더 있습니다만.

으득.

당천벽은 이를 악물었다.

‘능구렁이 같은 놈.’

태평맹 용봉지회의 우승자를 젓가락 하나로 끌어내리고 태평맹의 아미 공략을 검 한 자루로 막아 낸 그는 결국 창룡맹의 맹주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영웅맹을 무너뜨리고 강북을 장악한 일대 정파맹의 맹주로 우뚝 섰다.

사실 태평맹의 강남 공략 역시 창룡맹 탓에 세울 수밖에 없었던 고육지책이 아니던가?

‘감히 네가 이런 식으로…….’

당천벽은 인상을 쓰며 운현의 용모파기를 노려보았다.

무림맹의 몰락이 예정되어 있던 그때, 독선은 문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운현을 택했다.

하지만 당문은 운현을 택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설련은 독선을 떠났고 당문과 독선의 은밀한 연결은 끊어졌다.

그런데 지금 운현이 독선과 함께 이곳 계림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의미는 명확했다.

‘독선의 뜻은 태평맹에 있지 않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운현은 검 한 자루, 말 한마디 없이 태평맹을 뒤흔드는 동시에 당문, 아니 문주인 당천벽 자신에게 비수를 찔러 넣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치가 떨릴 정도로 대담한 도발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당천벽이 말한 ‘불필요한 오해’였다.

“다른 문파들은 알고 있나?”

“그것은 총괄군사에게 확인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현무대주 당엽의 대답은 마땅했다.

“그러지. 어차피 총괄군사도 함께 가야 할 테니.”

문주 당천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륵.

“자네와 나, 그리고 총괄군사만 가는 것으로 하세.”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다.

비록 나중에 소문이 퍼진다 해도 독선과 직접 대면하는 충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니까.

“훗.”

문득 당천벽은 헛웃음을 흘렸다.

당문의 전설이자 자존심인 독선의 존재를 당문의 문주인 자신이 기를 쓰고 은폐하려 하고 있다니 말이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가자.”

펄럭.

화려한 옷을 펄럭이며 당문의 문주, 청염군 당천벽은 집무실을 나섰다.

그의 표정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따각, 따각.

창을 가린 커다란 마차 한 대가 은밀히 태평맹 광서 지부를 출발했다.

마차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천화객잔 앞에서 멈춰 섰다.

달칵.

문이 열리고 세 사람이 마차에서 내렸다.

당문의 문주 당천벽과 현무대주 당엽, 그리고 태평맹 총괄군사 당설련이었다.

당설련의 미모는 길 가던 사람들의 시선을 잠시 끌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곧 천화객잔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탁.

천화객잔의 문이 닫히는 것과 함께 객잔 앞에 걸렸던 오색등이 내려지고 두 사람의 무사가 입구를 막아섰다.

길 가던 행인들은 잠시 의아했으나 무사들의 날카로운 시선에 다들 고개를 돌렸고, 더 이상 천화객잔에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입구를 막아선 두 명의 무사 외에도, 당문의 현무대가 사방에 숨어서 주위를 경계하는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운현 일행은 숙소 안의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계림에서 가장 좋은 방이라는 총관의 장담처럼 숙소는 훌륭했다.

네 사람이 각각 쓸 수 있는 방은 물론, 거실처럼 차를 마실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그만큼 비싼 것은 당연했지만 말이다.

“어르신.”

차를 마시던 운현이 문득 말했다.

“내려가 보시겠습니까?”

감찰어사 조관과 항장익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객옹은 운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쯧.”

객옹은 혀를 찼다.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객옹은 대답을 지체하지 않았다.

“……가자.”

“괜찮으시겠습니까?”

운현이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객옹은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덜컹.

“안 괜찮을 건 또 뭐냐?”

그 대답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영문을 모르는 조관과 항장익을 향해 운현이 말했다.

“잠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 두 분께서는 여기서 쉬고 계십시오.”

“알겠습니다. 대인.”

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칵.

운현과 객옹은 방을 나섰다.

객잔은 조용했다.

초저녁만 해도 시끄럽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다른 손님은물론 지나는 점소이나 총관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벅, 저벅.

두 사람은 천천히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리고 일 층으로 내려가는 커다란 계단 앞에서 멈춰 섰다.

슥.

객옹은 서늘한 시선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텅 비어 버린 일 층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아름답지만 날카로운 눈매의 당설련과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인 당문의 무사, 그리고 당문의 문주인 청염군 당천벽이었다.

사락.

청염군 당천벽이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당천벽이 가문의 어르신께 예를 표합니다.”

당문의 문주는 가문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권력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천벽은 고개 숙이기를 서슴지 않았다.

독선은 당문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자존심이었기 때문이다.

뒤에 서 있던 현무대주 당엽도 즉시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쿵.

그는 감히 입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맙소사.’

처음으로 마주한 독선의 눈빛은 그가 왜 공포의 대명사인지 똑똑히 알게 해 주었다.

현무대주인 자신조차,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독선의 무서움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 서늘한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당장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끓을 정도였다.

사락.

당설련이 한 송이 꽃처럼 내려앉았다.

그녀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자 머리에 달린 은빛 장식이 파르르 떨리며 빛났다.

그리고 고개를 든 당설련의 눈동자는 눈물로 글썽이고 있었다.

“……할아버지.”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잠시 침묵하던 객옹은 천천히 발을 옮겼다.

계단 위까지 객옹을 오게 한 것은 자신의 혈연을 부인하지 못함이되, 계단을 내려가게 한 것은 당설련의 눈물이었다.

저벅, 저벅.

객옹은 커다란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려갔다.

운현은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그때까지 문주 당천벽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였다.

현무대주 당엽은 감히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턱.

객옹이 계단을 하나 남기고 멈춰 섰다.

“고개를 들어라.”

당천벽은 고개를 들었다.

현무대주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말이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객옹은 당천벽에게 말했다.

“네가 내 얼굴을 볼 생각을 다 했구나.”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법을 따라 시선을 살짝 내린 당천벽이 답했다.

“가문의 어르신이자 환우오천존의 한 분이신 독선께 감히 무례를 행할 수는 없습니다.”

“흥.”

객옹은 코웃음을 쳤다.

“독선이 누구냐?”

당천벽의 눈썹이 살짝 경련했다.

“독선도, 약선도 나는 모른다.”

약선은 독선의 또 다른 별호다.

비록 독선이라는 별호가 그를 대표하기는 하지만 그는 독선이자 동시에 약선이기도 했다.

“허나…….”

“나는.”

당천벽의 말을 끊으며 객옹이 말했다.

“객옹이다.”

당천벽의 표정이 굳었다.

낯선 별호보다, 독선이 스스로 객옹을 자처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의미심장했다.

그것은 곧 독선이 운현을 택한 것을 돌이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할아버지.”

가냘픈 그 목소리는 당설련의 것이었다.

객옹은 당설련을 돌아보았다.

당설련은 눈물이 그렁그러한 눈으로 독선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운현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날카롭고 치명적인 매력을 뿜어내던 당설련이 지금은 순진무구한 소녀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돌아오셔도 되잖아요.”

그건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신승 불영은 죽고 철혈사왕 염중부는 행방을 알 수 없다.

검성은 오직 검에만 미친 자이며 일은은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으니 환우오천존 중 남은 사람은 실질적으로 독선뿐이었다.

더구나 당설련은 이미 화산지약에 대해 알고 있었다.

설령 독선이 여전히 화산지약을 지키려 한다 하더라도 당문으로 돌아오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화산지약은 오존과 그들이 속한 세력의 적대를 금할 뿐이기 때문이다.

무림맹이 무너지고 영웅맹이 사라졌으니 이제 누가 독선이 하고자 하는 바를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독선과 당문은 천하제일인이자 천하제일문이 될 수도 있었다.

그저 마음만 먹는다면 말이다.

하지만 객옹의 대답은 그녀의 기대와 달랐다.

“……연아야. 너는 아직도 나를 모르는구나.”

쓸쓸한 목소리로 객옹이 말했다.

당설련은 귀를 의심했다.

독선이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불영은 자신의 약속을 지켜 죽어서야 비로소 소림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나더러 그보다 못한 놈이 되라는 말이냐?”

운현은 순간 뜨거운 무엇이 가슴에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돌아가지 않는다.”

객옹은 담담히 말했다.

“나는 객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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