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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14화 (414/530)

414화.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

계림 번화가에 위치한 천화객잔은 태평맹 무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딱히 특별한 회합이나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천화객잔 숙수의 솜씨가 뛰어나 태평맹 무인들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다.

태평맹 무인들이 모이자 다른 이들은 자연히 천화객잔을 멀리하게 되었다.

덕분에 천화객잔은 태평맹이 전부 세를 낸 것 같은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객잔에 들어선, 명백히 태평맹의 무인들이 아닌 운현 일행은 때마침 입구 근처에 있던 무인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뭐냐고 했잖…….”

인상을 쓰던 건장한 무인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갑자기 흐릿해지더니 스르륵 눈이 감겼다.

그러고는 무너지듯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털썩.

운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객옹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딴 곳을 쳐다보고, 조관은 의아한 표정으로 운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아하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항장익만 무언가 눈치챈 듯 눈을 빛낼 뿐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사이, 천화객잔의 총관이 웃으며 다가왔다.

그러다 쓰러진 무인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아이쿠, 이분은 왜 여기서 주무시나? 야! 누가 좀 도와 드려라!”

하지만 바쁜 점소이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리던 총관은 곧 운현을 향해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네 분이십니까? 식사는 보시다시피 조금 기다리셔야 합니다만 방은 남아 있습니다.”

“아, 그러면…….”

“멈춰라.”

묵직한 소리가 운현의 말을 끊었다.

슥.

가까운 곳에 있던 젊은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뭇 고급스러운 무복을 입은 그는 운현 일행을 노려보며 말했다.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운현은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옆에 앉은 이들도 의아한 표정으로 일어선 사내를 쳐다보고 있었다.

젊은 사내는 조소를 머금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비록 다른 사람의 이목은 속일 수 있어도 내게는 어림…….”

딱.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그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쓰러지듯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은 그는 곧 고개를 숙였다.

쿵.

사내는 탁자에 이마를 박고 잠들었다.

잠든 사람은 그 사내만이 아니었다.

털썩, 턱.

일행으로 보이던 이들 역시 탁자에, 혹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잠에 빠져들었다.

총관은 놀란 표정으로 그들과 운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이게 무슨…….”

“글쎄요? 아마도 술이 과했나 보군요.”

그렇게 말한 운현은 슬쩍 객옹을 쳐다보았다.

객옹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또 무슨 시비가 일어나면 이번엔 아예 객잔 전체를 잠재워 버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방이 남아 있다고 하셨지요?”

“아, 네. 저렴한 방은 전부 나가서…….”

“제일 좋은 곳으로 주십시오.”

운현의 말에 총관의 표정이 환해졌다.

“알겠습니다! 제가 직접 모시지요.”

총관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일행을 안내했다.

갑자기 잠든 손님들에 대한 의문은 이미 저편으로 날아갔다.

운현은 또 누가 시비를 걸지 않기를 바라며 총관을 따라갔다.

다행히 객옹의 심기를 건드리는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고 총관이 안내한 방은 전망이 매우 좋았다.

덕분에 객옹의 기분은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다.

숙소를 정한 운현 일행은 객잔 밖으로 나왔다.

조관과 항장익은 관청으로 떠나고, 운현은 객옹과 함께 계림의 시가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계림이 명승지로 이름날 만하군요.”

운현은 계림 시가를 돌아보며 새삼 감탄했다.

이국적인 정취와 도시를 둘러싼 봉우리들의 모습은 이 도시만의 독특한 정취를 물씬 전해 주고 있었다.

계림의 유래가 된 계수, 곧 목서(木犀)도 많이 보였지만 때가 아니어서 아쉽게도 꽃은 없었다.

하지만 대신 풍겨오는 냄새가 있었다.

“저건 뭐냐?”

길거리에서 파는 음식을 보고 객옹이 말했다.

무언가 튀긴 것 같은데 냄새가 아주 좋았다.

“모르겠는데요? 한번 먹어 보지요.”

운현의 말에 객옹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으로 보아 유명한 곳인 듯했다.

운현은 객옹과 함께 줄을 섰다.

즐거운 마음으로 순서를 기다리며 운현은 번화가를 지나는 사람들을 느긋이 바라보았다.

오랜 여행으로 인한 여독이 저절로 사라지는 듯했다.

***

“으음.”

탁자에 고개를 박고 있던 사내가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그는 머리를 흔들며 몽롱한 정신을 일깨웠다.

“끄응.”

“이게 무슨 일이지?”

때마침 깨어난 일행들도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서로를 돌아보며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우리가 잠이 들었다고? 모두, 한꺼번에?”

일행 중 한 명이 말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그들은 모두 태평맹에 속한 각 문파의 이대제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낌새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이 들다니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놈이다.”

사내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놈? 아까 그 일행 말인가?”

일행들 역시 운현 일행을 기억하고 있었다.

“허나 수작을 부린 것 같지는 않던데…….”

누군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제로 그들은 아무런 기척도 눈치채지 못했다.

잠든 순간조차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사내, 당견승의 확신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독과 암기로 유명한 당문의 이대제자였기 때문이다.

‘분명 암기다.’

당견승은 그렇게 확신했다.

“이봐! 총관! 총관!”

그는 거친 목소리로 천화객잔의 총관을 불렀다.

자신의 이마에 탁자의 무늬가 선명했지만 당견승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

계림, 태평맹 광서 지부.

당문의 일대제자인 당대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정체불명의 고수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이대제자인 그의 사제, 당견승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틀림없습니다. 순식간에 저와 다른 세가의 제자들을 잠재워 버렸습니다.”

“잠재웠다고?”

마비나 중독도 아니고 잠을 재우다니?

대체 어느 고수가 암습을 하면서 그런 자비를 베푼단 말인가?

당대영은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무슨 수법을 쓰더냐?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당대영은 자신의 사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또 낮부터 술을 마셨느냐?”

움찔하는 사제를 보며 당대영은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외지에서 의식을 잃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아직도 모르더냐! 이대제자라는 놈이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해서야 어찌 당문의 제자라 할 수 있단 말이냐!”

“사형! 제가 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당견승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허나 그들은 분명 암기의 고수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와 다른 문파의 제자들까지 동시에 잠재울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사형인 당대영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시끄럽다! 당장 지부로 가서 근신하도록 해!”

당견승은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사형의 말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당견승은 자신의 사형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나 반드시 그자들에 대해 확인해 보십시오. 결코 예사로운 자들이 아닙니다.”

심각한 당견승의 눈빛에도 사형인 당대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당견승은 굳은 표정으로 예를 표하고 물러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당대영은 생각에 잠겼다.

‘정체불명의 고수라…….’

당견승에게 근신을 명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보고를 묵살할 생각은 없었다.

이곳 계림은 태평맹 강남 공략의 거점이자 가장 중요한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다른 문파나 세가가 은밀히 숨어들 가능성은 높았다.

정보를 캐거나 혹은 방해 활동을 하려고 말이다.

“직접 가 봐야겠군.”

그자들에 대한 것은 이미 당견승이 말했다.

어디서 머물고 있으며, 용모가 어떠한지도 알려 주었다.

덜컥.

당문의 일대제자이자 현무대 제삼분대 분대장인 당대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대제자 셋과 이대제자 일곱으로 구성된 제삼분대라면 그 어떤 상대라도 능히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

운현과 객옹은 느긋하게 계림 시내를 돌아다녔다.

유유히 굽이치며 흐르는 이강(離江)과 그 위를 떠다니는 대나무 쪽배들은 선경에 온 것 같은 느긋함을 더해 주었다.

이미 해가 지고 있어서 이강 유람은 다음 날로 미루고, 운현과 객옹은 계림 시내의 한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겉모습이나 평판에 상관없이 그저 객옹이 흥미를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결정한 곳이었지만 맛과 가격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니 거리는 이미 오색 등불로 가득했다.

“계림의 산수가 천하에서 첫째[桂林山水甲天下]라더니, 밤거리도 아주 볼만하군요.”

운현은 계림의 밤거리를 보며 감탄했다.

잘 알려진 명승지라 그런지 계림의 밤거리는 생각보다 화려하고 휘황찬란했다.

게다가 고개를 들면 기묘한 봉우리들 위로 별빛이 가득한 밤하늘이 보였다.

운현은 객옹과 함께 밤의 계림을 거닐며 낮과는 또 다른 풍취를 만끽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숙소인 천화객잔 바로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음.”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며 발을 멈췄다.

운현도 멈춰 섰다.

천화객잔 안쪽에서 낯선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올 때만 해도 분명히 없었던 그 기운은, 비록 운현과 객옹을 향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분명 어떤 종류의 긴장과 경계였다.

“쯧.”

객옹은 혀를 찼다.

그리고 가볍게 한 손을 내저었다.

마치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날벌레라도 쫓듯이.

훅.

하지만 그 가벼운 손짓에 한 줄기 기운이 일어나는 것을 운현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기운은 정확히 천화객잔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객옹이 말했다.

“들어가자.”

운현은 객옹과 함께 천화객잔으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객잔 총관과 점소이들의 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무사님!”

“아니, 갑자기 왜…….”

점소이들과 총관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멀쩡히 탁자에 앉아 있던 당문의 무사들 십여 명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잠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술은커녕 점소이가 가져온 차에도 손조차 대지 않았는데 말이다.

“어, 어떻게 할까요?”

점소이가 총관에게 물었지만 그 역시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런 그들 옆으로 운현과 객옹이 지나갔다.

저벅, 저벅.

두 사람을 주목한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당문의 무사들이 곯아떨어진 기묘한 광경을 보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같은 태평맹이면서도 평소 으스대던 그들의 모습은 좋은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빨리 의원이라도 부르게.”

손님 중 누군가 말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총관은 점소이 한 명에게 의원을 부르라 일렀다.

그리고 총관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태평맹 지부로 향했다.

제때 알리지 않으면 덤터기를 쓸지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손님들은 잠든 당문의 무사들을 보며 수군거렸다.

그렇게 객잔 식당이 시끄러운 동안에도 운현 일행의 방이 있는 삼 층은 그저 아무 일도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

객잔 총관의 보고를 받은 태평맹 지부, 특히 당문 광서 지부는 발칵 뒤집어졌다.

당문의 현무대 제삼분대 전원이 천화객잔에서 원인 모를 잠에 빠졌기 때문이다.

당문은 즉시 그들을 지부로 옮겼다.

그 보고는 지체 없이 태평맹 총괄군사, 당설련에게 전해졌다.

“뭐라고?”

집무실에 있던 총괄군사 당설련은 수하를 바라보았다.

“현무대 제삼분대가 전부 잠에 빠졌어?”

“네. 지금 의원들이 살펴보고 있으나 깨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당설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잠에 들었다지만 깨어나지 않는다면 의식불명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어디서? 누구에게 당한 거야?”

“천화객잔입니다. 상대의 정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대제자인 당견승이 용의자의 용모파기를 진술했습니다.”

바스락.

수하가 두 장의 용모파기를 탁자에 올려놓았다.

순간 당설련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견승은 네 명 중 두 명 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문사 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그러나 당설련은 더 이상 수하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온화해 보이는 특색 없는 문사와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인 노인의 용모파기는,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당설련은 입술을 깨물었다.

“또 누가 이 사실을 알지?”

그녀의 눈동자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수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현무대 대주입니다.”

현무대 제삼분대의 일은 당연히 대주에게 보고된다.

당설련은 이를 악물었다.

노련한 현무대의 대주가 이 용모파기를 못 알아볼 리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시간, 당설련의 예상처럼 두 장의 용모파기는 이미 당문의 문주인 청염군 당천벽 앞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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