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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13화 (413/530)
  • 413화. 못 갈 것 없다

    광서성, 계림.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광서성의 도시 계림은 때아닌 무림인들로 번잡했다.

    특히 계림의 번화가에서 마주치는 무인들의 숫자는 말 그대로 무인들로 도시가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을 줄 정도였다.

    그들은 바로 태평맹이었다.

    태평맹 강남 공략의 첫 대상 지역이 바로 이곳 광서성 계림이었다.

    그리고 태평맹은 교통이 비교적 편리하고 물자가 풍부한 이곳 계림을 강남 공략의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림에서 가장 큰 누각에는 태평맹 광서 지부 겸 당문의 지부가 자리를 잡았고, 다른 세가들 역시 크고 화려한 저택을 지부로 삼았다.

    본래 주인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태평맹의 알 바가 아니었다.

    공손세가 계림 지부, 가주 집무실.

    “가주님.”

    외당 당주 공손위가 나지막이 말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공손세가의 가주, 비검 공손월은 눈을 들었다.

    “서찰을 무사히 전달했다는 보고가 왔습니다.”

    “……그래. 고맙네.”

    공손월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외당 당주인 공손위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임 외당 부당주이자 무림맹 대표자였던 공손창이 죽었기 때문이다.

    광서성의 소도시 용주의 문파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다가 눈 먼 화살에 맞은 것이다.

    공손창은 그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간단한 처치만을 했다.

    그러나 다음 날, 공손창은 말을 타고 가던 중에 정신을 잃고 낙마했다.

    고열과 구토를 반복하던 공손창은 온몸이 퍼렇게 되더니 결국 의원이 손쓸 틈도 없이 사망했다.

    사인은 상처의 감염으로 인한 급성 패혈증이었다.

    패혈증은 전쟁터에서는 흔한 사망 원인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단 한 사람, 공손세가의 가주 비검 공손월 외에는 말이다.

    외당 당주 공손위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직도 그것이 사고가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자네는 그것이 사고라 생각하는가?”

    비검 공손월은 강한 눈빛으로 말했다.

    “창이뿐만이 아니네. 남단에서는 추현이 죽었지 않나?”

    공손추현은 전임 외당 부당주이자 태평맹 대표자였다.

    태평맹 가주 회합에 가주 대리로 참석하여 창룡검주 운현과 각을 세웠다가, 총괄군사 당설련의 강력한 항의로 대표자 직위와 외당 부당주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는 강남 공략에서 전공을 세워 이를 만회하려 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공적조차 세우지 못하고 타고 있는 말이 날뛰는 바람에 계곡으로 굴러 떨어져 죽어 버린 것이다.

    광서성의 소도시 남단을 향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 명이라면 불운한 사고라 여길 수 있겠지. 그러나 둘은 아닐세.”

    공손월은 이를 악물었다.

    “강남의 사파들 따위를 상대하면서 어찌 공손세가의 고수들이, 그것도 둘이나 죽을 수 있단 말인가?”

    세가의 제자들도 아닌 외당 부당주 급의 고수가 둘이나 사망했다.

    공손세가의 자존심은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허나 예기치 못한 사고였습니다. 이곳의 지세가 유난히 험하여…….”

    “그래. 사고네.”

    공손월은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당문과 연합하여 강남을 도모하다가 일어난 사고 말일세.”

    공손위는 흠칫했다.

    그는 어째서 가주가 두 사람의 죽음을 이상히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가주는 당문을 의심하는 것이다.

    “허나 두 사건 모두 세가 단독으로 행하던 일이었습니다. 현장에 당문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무슨 상관이겠나? 당문이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는 어렵지 않은 일인 것을.”

    당문은 오히려 자신들이 있었더라면 공손창이 패혈증으로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공손세가가 독선적이라는 비난을 은근히 섞어서 말이다.

    “허나 지금 태평맹을 이탈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미 강남 공략에 발을 깊이 들인 상황이다.

    여기서 태평맹을 이탈한다면 공손세가가 감당해야 할 피해는 예전에 본가가 불에 탄 것보다 더 컸다.

    “가능하네. 그가 우리를 도운다면.”

    가주가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공손위는 알고 있었다.

    은밀히 가주의 친서를 전달한 창룡맹의 맹주 운현이다.

    “장강의 영향력을 되찾는 것은 세가의 모두가 바라는 일입니다. 허나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우리를 도와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만들어야지.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가주 공손월의 눈빛은 단호했다.

    공손위는 답답한 듯 말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일입니까?”

    슥.

    가주 공손월은 외당 당주 공손위를 쳐다보았다.

    “당문이 노리는 것은 강남만이 아니네. 또 다른 누군가가 죽은 다음에는 이미 늦어 버리고 말 것일세.”

    공손월의 눈빛은 단호했다.

    공손위는 가주의 뜻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다.

    그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과연 우리를 만나고자 할까요?”

    가주의 친서는 운현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과연 그가 대화의 자리에 나올 것인가?

    창룡맹은 이미 강북을, 천하의 중원을 차지한 일대 정파맹으로 우뚝 섰다.

    차라리 이대로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알 수 없는 일이지.”

    가주 공손월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하늘이 우리 공손세가를 버리지 않았기를 바랄 수밖에.”

    탄식하듯 공손월이 말했다.

    그러나 외당 당주 공손위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항주 외곽, 창룡맹 임시 총단.

    운현은 집무실 겸 서재에서 영호준을 만나고 있었다.

    촤락.

    영호준은 서탁 위에 지도를 펼쳤다.

    창룡맹이 있는 항주와 공손세가의 본가가 있는 강서성 주변을 나타낸 지도였다.

    “어디서 만날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도를 바라보며 영호준이 눈을 빛냈다.

    “위치가 가지는 상징성은 물론이고, 상대에 대한 압박 효과도 기대할 수 있으니까요. 자, 그럼 어디가 좋을까요?”

    “소흥으로 오라고 해라.”

    옆에서 차를 음미하던 객옹이 불쑥 말했다.

    소흥은 특산물인 ‘소흥주’로도 유명한, 항주 바로 아래에 있는 소도시다.

    아예 항주로 오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여서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겠지요. 소흥은 엄밀히 말해서 창룡맹도, 공손세가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운현이 물었다.

    “시간이 걸리다니요? 그리 멀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공손세가가 있는 강서성과 창룡맹이 있는 절강성은 바로 접하고 있었다.

    아주 가깝지는 않아도 멀다고 할 수도 없는 거리다.

    영호준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지금은 훨씬 더 먼 계림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이 태평맹 강남 공략의 거점이거든요. 당장은 호남성을 제외한 광서성과 귀주성에 힘을 쏟는 모양새더군요.”

    태평맹이 호남성을 피하는 것은 장강이 호남을 지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창룡맹이 장강의 새로운 주인이라는 것은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니까.

    영호준은 지도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흐음, 공손세가와 창룡맹 총단 사이에는 적당한 곳이 없군요. 은밀하다는 점에서는 작은 도시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차라리 아예 남경이나 계림에서 가까운 장사로 오라고 할까요?”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는 듯 영호준은 눈살을 찌푸렸다.

    운현이 문득 말했다.

    “공손세가의 가주가 계림에 있다면 그곳으로 가는 것이 어떨까요?”

    “네?”

    영호준이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차를 마시던 객옹도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계림은 창룡맹도 공손세가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많은 사람이 움직일 것도 아니니…….”

    일행이라고 해 봐야 이전과 마찬가지로 객옹과 감찰어사 조관, 그리고 호위역인 항장익 정도가 다였다.

    조관은 박 공공의 명으로 운현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고, 운현도 박 공공을 생각해서 그의 동행을 거절하지 않았다.

    “차라리 계림으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객옹도 영호준도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영호준이 말했다.

    “괜찮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그곳은 태평맹이 강남 공략의 거점으로 삼는 곳입니다.”

    “우리가 태평맹과 싸우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운현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와 사사로운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예전에는 성도에 있는 태평맹 총단에도 갔었으니까요.”

    영호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운현은 사천성 성도, 그것도 태평맹 총단을 직접 방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 운현은 창룡맹의 맹주이지 않은가?

    “그래도…….”

    “못 갈 것 없다.”

    객옹이 문득 말했다.

    “황궁도 거리낌 없이 드나드는데 계림 정도야 못 갈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천하 그 어디라도 현이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다.”

    단호한 어조로 객옹이 말했다.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그렇습니다.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요.”

    그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객옹과 영호준이 반대를 하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계림으로 가는 것이 결정되었다.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손세가에는 이렇게 알리겠습니다. 맹주님께서 직접 접촉을 하실 테니 기다리라고 말입니다. 표현이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무난하겠지요.”

    상황을 정리한 영호준이 웃으며 말했다.

    “잘됐군요. 계림은 산수가 빼어나고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하다고 하니 느긋하게 보고 오시기 바랍니다.”

    영호준은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저는 이곳 항주에서 풍류 대신 열심히 일이나 하고 있겠습니다.”

    사실 항주는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이라 하여 천당에 비교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그런데 정작 이곳 항주에서 느긋하게 풍류를 즐기긴커녕 일에 치여 살아야 하니 그 답답함이야 오죽할까?

    “가끔 쉬시면서 하시지요.”

    운현이 말했지만 영호준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는 헛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바스락.

    영호준은 탁자에 폈던 지도를 거뒀다.

    “가시면 저 대신 안부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부요?”

    되묻던 운현은 순간 깨달았다.

    태평맹이 있는 계림에 간다는 건, 당설련과 마주칠 수도 있다는 의미라는 것을 말이다.

    ‘아.’

    문제는 또 있었다.

    계림에는 당연히 당문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운현은 객옹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객옹은 무심히 차를 음미하고 있을 뿐이었다.

    ***

    항주에서 계림으로 가는 길은 간단치 않았다.

    운현 일행은 배를 타고 장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배는 무한을 지나 악양에 이르러 ‘하늘과 땅이 호수 위에 떠 있다’고 노래한 동정호로 들어섰다.

    운현 일행은 대도시 장사에서 배를 내렸다.

    그리고 마차로 관도를 달려 남쪽으로 향했다.

    따각, 따각.

    며칠이 지나자 주변의 경관이 확연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평범하게 펼쳐진 논밭 너머로 손가락처럼 솟은 기묘한 봉우리들이 나타난 것이다.

    아침 안개 속에 보이는 경치는 굽이굽이 흐르는 물길과 어울려 마치 신선들의 세계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는 여러 개의 봉우리 사이로 펼쳐진 한 도시에 다다랐다.

    목서(木犀)라고도 불리는 향기로운 꽃나무인 계수가 온 성에 가득한 곳[滿城玉桂成林], 광서성의 아름다운 도시 계림에 도착한 것이다.

    운현 일행이 탄 마차는 천천히 계림으로 들어섰다.

    말로만 듣던 계림의 정취는 참으로 놀라울 정도였다.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이국적인 옷차림과 물건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칼을 찬 무인들이었다.

    마차가 번화가로 들어서자 말 그대로 무인들이 어디나 가득했다.

    태평맹 소속 무인들은 물론, 그들에게 협력하는 중소 문파와 낭인 무사들이 계림의 번화가를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당문의 무복을 입은 사람들도 보였다.

    운현은 슬쩍 객옹을 보았지만 객옹은 언제나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따각, 따각.

    그사이, 마차는 계림에서 가장 큰 객잔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운현 일행은 객잔으로 들어섰다.

    촤락.

    주렴을 젖히며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식 냄새가 밀려왔다.

    그리고 거친 목소리가 운현 일행에게 날아들었다.

    “너희는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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