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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12화 (412/530)
  • 412화. 역시 어르신입니다

    월향은 운현이 선물한 것들을 거절했다.

    까닭 없이 이런 큰 재물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따지자면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월향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안 됩니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그 마음만 받게 해 주세요.”

    운현은 더 이상 권할 수 없었다.

    까닭 없는 재물을 멀리하는 것은 관리나 문사만의 덕목은 아니니까 말이다.

    “알겠습니다.”

    결국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월향의 호위인 연화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잔뜩 남아 있었지만 월향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운현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저는 이것들의 가치를 잘 모릅니다. 그저 진귀한 것들이라는 사실밖에는요.”

    월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앞에는 항경상단의 상단주가 전해 준 아홉 권에 이르는 책자가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이전에 어르신과도 한번 논의했던 것입니다만, 월주께 이것들의 처분이나 가공을 부탁하고 싶습니다.”

    유명한 서화나 골동품 같은 것은 처분하기도 쉽지 않았고 비취와 산호, 진주 같은 것들은 장신구로 가공할 필요도 있었다.

    “가능한가요?”

    잠시 생각하던 월향이 답했다.

    “네. 가능해요. 서화나 서역의 물건을 원하는 부유한 이들도 많고, 뛰어난 장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으니까요.”

    월향의 인맥이 넓다지만 장인들까지 알고 있는 건 조금 의외였다.

    그러나 월향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위 상류층이라 하는 이들을 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일이랍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부유하고 힘이 있는 이들은 어느 때나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기 마련인 듯했다.

    사실 창룡맹 맹주인 운현이야말로 상류층 중에서도 상류층이겠지만 말이다.

    “그렇군요. 그럼 남아 있는 서화나 귀금속 같은 것들도 모두 이쪽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네? 남아 있는 것들이라니요?”

    운현의 말에 월향이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홉 권의 책자에 적힌 것 말고도 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운현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으로 월향을 바라보았다.

    “네. 더 많은데요?”

    장강을 오르내리는 물류는 어마어마하다.

    그 물길을 장악하고 있던 영웅맹의, 특히 탐욕스러운 염중부가 긁어모은 재보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월향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단기간에 물건이 많이 풀리면 가치가 급격히 떨어져요. 그리고 장인들에게도 제작 시간이 필요하고요. 남아 있는 것들은 되도록 천천히 보내 주세요.”

    ‘천천히’를 강조하는 월향에게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월향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연화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기루를 한 채 지어라.”

    차를 음미하던 객옹이 문득 말했다.

    월향과 연화는 객옹을 돌아보았다.

    “아주 크고 화려한 것으로.”

    그건 또 난데없는 말이었다.

    객옹은 월향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남경이든 항주든 상관없다. 기루여도 주루여도 개의치 않는다. 오직 한 채를 짓되 천하에 소문이 날 만큼 크고 화려해야 한다. 누구든 첫 손가락에 꼽기를 서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건 전혀 생각지 못한, 그야말로 파격적인 요구였다.

    천하에서 제일가는 기루를 세우라니?

    엄청난 재력은 물론 방대한 인맥과 능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못하겠느냐?”

    객옹은 월향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담담하기만 했다.

    월향은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눈을 들었다.

    “할 수 있어요.”

    “좋다.”

    객옹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조건 최고로 써라. 찻잔 하나까지 말이다. 특히 박학다식한 사람일수록 눈이 더 휘둥그레질 정도로 해야 한다.”

    “물론이에요.”

    월향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겉만 화려해서야 어찌 천하제일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제대로 해내면 그 기루는 너에게 맡기마.”

    월향의 눈이 빛났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객옹이 눈앞에서 단언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현이에게 말해라. 어차피…….”

    객옹은 슬쩍 운현을 바라보았다.

    “현이 거니까.”

    월향은 눈을 빛내며 운현을 돌아보았다.

    천하에서 제일가는 기루라니 그야말로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운현은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본래 이것은 객옹의 발상이었기 때문이다.

    정작 객옹은 이제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무심히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

    다음 날, 운현 일행은 월향의 배웅을 받으며 남경을 떠났다.

    관도를 내달린 마차는 곧 항주에 도착했고, 운현은 창룡맹 총단이 건설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 총군사 영호준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서 오십시오, 맹주님.”

    총군사 영호준은 웃는 얼굴로 운현을 반겼다.

    건설 책임자인 대목과 이야기를 나누던 영호준은 운현과 객옹에게 말했다.

    “마침 잘됐군요. 그간의 보고도 드려야 하니 조용한 곳으로 가시지요.”

    세 사람은 이전에 갔던 작은 찻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드러운 차향과 온화한 분위기를 만끽하며 세 사람은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달칵.

    찻잔을 내려놓으며 영호준이 물었다.

    “가셨던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일은은 찾으셨습니까?”

    “네. 만났습니다.”

    영호준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정말입니까?”

    놀라는 반응이 월향과 똑같다고 생각하며 운현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영호준에게 말해 주었다.

    영호준은 연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은과 비무한 내용에 이르러서는 입을 떡 벌리기까지 했다.

    “……맙소사. 대체 그런 분이 어째서 숨어 계시는 겁니까?”

    “말 못 할 사정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허, 말 못 할 사정이라…….”

    영호준은 고개를 저었다.

    “강호 무림에 기인이사가 많다더니 과연 그렇군요.”

    그렇게 말하며 영호준은 찻잔을 들었다.

    “아 참, 말씀하신 대로 남경에 맹주님의 재물 일부를 보냈습니다. 받아들이는 표국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상단에 의뢰해야 했습니다. 적어도 들고 튈 염려는 없겠지요.”

    “수고하셨습니다. 마침 말이 났으니 총군사께서도 사정을 알고 계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운현은 월향과 있었던 이야기를 간략하게 해 주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객옹과 영호준에게는 숨길 것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를 들은 영호준은 눈을 빛냈다.

    “맹주님.”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영호준이 말했다.

    “평생 따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운현은 살짝 당황했다.

    영호준은 흥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제 소원이 바로 기루 주인과 친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천하에서 손꼽히는 기루의 주인이라니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뜁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지은 건 아닙니다만…….”

    짓기는커녕 이제 막 이야기만 나온 상황이다.

    하지만 영호준은 흥분과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기루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신다는 발상도 매우 탁월합니다. 물론 너무 안일하게 문제를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만 어차피 결과가 나와 보면 알겠지요.”

    본래 객옹의 발상이었다고 말하려던 운현은 입을 다물었다.

    괜히 영호준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곳은 어땠습니까?”

    “아주 좋습니다. 다들 노동의 기쁨을 제대로 맛보고 있지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군요. 위로의 의미로 식사라도 한번 같이하는 것이 어떨까요?”

    “비싼 걸 사 주신다면야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건 그렇고…….”

    영호준은 품에서 얄팍한 서찰을 꺼냈다.

    바스락.

    “이런 것이 며칠 전에 왔습니다.”

    영호준은 운현에게 밀봉된 서찰을 건넸다.

    서찰 겉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사람을 통해 전해 왔더군요. 맹주님께 온 것이라 열어 보지 않았습니다.”

    “다음부터는 먼저 보셔도 됩니다. 지나치게 사적인 것만 아니라면요.”

    긴급한 문제라면 운현보다 오히려 영호준이 알아야 했다.

    영호준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네. 다음부터는 그리하지요. 말씀하신 대로 아가씨들에게서 온 서찰은 제외하고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서찰을 열었다.

    서찰을 읽어 내려가던 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입니까?”

    운현은 영호준에게 서찰을 건네며 조용히 말했다.

    “공손세가의 가주가 저를 만나기 원하는군요.”

    “너를?”

    “공손세가요?”

    객옹과 영호준이 동시에 말했다.

    공손세가는 과거 무림맹 십팔대 문파였으며 지금은 태평맹에 속해 있다.

    “네. 따로 장소를 정하고 그곳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영호준이 서찰을 살피는데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비검 이놈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보고 싶다면 마땅히 자기가 이곳으로 올 것이지 감히 누구더러 오라 가라 해?”

    비검은 공손세가의 가주 공손월의 별호다.

    객옹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영호준이 서찰을 보며 말했다.

    “창룡맹도, 공손세가도 아닌 곳에서 만나자는 이야기군요. 그러면 엄밀히 말해서 오라 가라 하는 건 아닌데요?”

    “마찬가지다.”

    객옹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나나 이검학이 상대였다면 비검이 감히 그따위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건 그렇지요. 어르신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치는 영호준의 모습에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영호준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허나 맹주라는 위치가 자존심만 내세울 수도 없는 자리지요. 설령 무례한 상대라도 천하의 안위를 위해서 웃으며 만나야 하는 것이 바로 맹주의 책무가 아니겠습니까?”

    영호준의 말은 옳았다.

    그러나 객옹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천하의 안위 따위는 황제나 신경 쓰라고 해라. 그런 무례한 놈은 박살을 내 버리면 그것으로 족하다. 현이에게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무림인으로서 객옹의 말은 지극히 정당했다.

    “하긴 그렇군요.”

    영호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해 보면 차라리 그게 더 효율적일 수도 있겠습니다. 강호 무림의 안위를 위해서도요.”

    운현은 당황했다.

    온건파로 보이던 영호준이 갑자기 강경파로 선회를 해 버렸다.

    서찰 한 통 잘못 보낸 탓으로 비검 공손월은 삽시간에 대역 죄인으로 몰리고 있었다.

    운현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진정한 예의는 겉모습이 아니라 그 마음가짐에 있다고 했습니다. 형식보다는 의도를 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대화를 하자는 것이니까요.”

    “대화라고?”

    객옹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건 박살을 내 준 후에 하면 더 잘된다.”

    “역시 어르신입니다.”

    영호준이 맞장구를 쳤다.

    “본래 현실 인식을 제대로 시켜 줘야 대화가 매끄럽게 흘러가는 법이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던 영호준이 은근히 목소리를 낮췄다.

    “……상대가 아무것도 모르고 나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다가 갑자기 철퇴를 ‘쾅!’ 내리치면 아주 속이 시원할 테니까요.”

    말하는 영호준의 입가엔 음흉한 미소마저 걸려 있었다.

    본래 도사 출신인, 아니 현재도 엄연히 화산의 매화검인 그가 저런 말을 하다니.

    운현은 아무래도 영호준의 업무가 너무 과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흠, 그것도 나쁘지 않군.”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슥.

    운현을 돌아보며 객옹이 물었다.

    “갈 거지?”

    “네.”

    쓴웃음을 지으며 운현이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손세가의 가주가 만나자는데 서찰이 마음에 안 든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알았다. 가자.”

    객옹이 말했다.

    서찰 한 통으로 가문이 박살날 위기까지 몰렸던 공손세가는 객옹의 한마디에 간신히 유예를 얻게 되었다.

    “아, 저도 참으로 가고 싶습니다만 할 일이 너무 많아 안타깝군요.”

    정말로 아쉽다는 듯 영호준이 말했다.

    “부디 어르신의 엄정한 판단과 단호한 처분을 기대합니다.”

    진지한 눈빛으로 그렇게 말한 영호준은 찻잔을 들었다.

    달칵.

    영호준은 속이 시원한 듯 미소를 지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멋진 그 미소가, 어쩐지 매우 사악해 보인다고 운현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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