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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11화 (411/530)

411화. 예월(藝月)

운현 일행이 탄 마차는 관도를 내달려 남경에 도착했다.

어차피 항주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고, 오랜 마차 여행의 여독을 풀 겸 일행은 남경에서 하루를 쉬기로 했다.

감찰어사 조관은 항장익과 함께 언제나처럼 남경 도찰원으로 가고, 운현과 객옹은 청풍명월루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입구로 들어서자 중후한 노년의 인물이 운현과 객옹을 맞이했다.

운현이 그에게 말했다.

“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운 대인이시지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월주님을 도와 이곳에서 총관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총관은 운현과 객옹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월향을 월주라 칭하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예인 출신인 것 같았다.

“이리 오시지요. 주인님께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운현과 객옹은 총관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청풍명월루는 이전보다 더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가는 손님들과 바쁘게 일하는 시녀와 하인 들이 층마다 가득했다.

노년의 총관은 월향의 방 앞에서 발을 멈췄다.

“주인님. 운 대인과 객옹께서 오셨습니다.”

드륵.

문이 열리고 연화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여전히 객옹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태도는 이전보다 한결 부드러웠다.

운현은 가볍게 답례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월향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맞이했다.

사락.

“어서 오세요. 운 대인, 객옹 어르신.”

온화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앉으시지요.”

운현과 객옹은 월향 맞은편에 앉았다.

연화가 차를 가져와 두 사람 앞에 놓자 부드러운 차향이 방 안을 가득 피어올랐다.

달칵.

찻잔을 들며 월향이 물었다.

“가셨던 일은 잘 끝나셨나요?”

“네.”

운현의 대답에 월향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 말씀은…….”

“일은님을 만났습니다.”

월향이 눈을 크게 뜨고 연화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정말 그분을 찾으셨다는 건가요?”

운현에게 월향이 알려 준 것은 ‘대은도, 소은도 되지 못한다’는 말뿐이었다.

그것만으로 어떻게 일은을, 그것도 이렇게 빨리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알고 보니 저와 예전에 인연이 있던 분이더군요.”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월주님의 말씀이 없었더라면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아,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던 월향이 문득 헛웃음을 흘렸다.

“그분이 대인과 인연이 있으셨다니 놀라운 일이네요. 여전히 건강하시던가요?”

“네. 아주 잘 지내고 계십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으니 아주 잘 지내는 셈이다.

어차피 일은을 건드릴 만한 사람도 없으니까.

“……그렇군요.”

미소 짓는 월향의 표정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운현은 지나가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월주님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더군요.”

그녀가 눈을 들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월향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총명하고 아름다워서 능히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하다고요.”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그렇게 평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

놀라는 월향에게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한번 모시고 오겠습니다.”

월향은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달칵.

운현은 찻잔을 들고 잠시 향을 음미했다.

“예인들을 돕는 일은 잘되고 계신가요?”

“네.”

월향은 눈을 들어 운현을 바라보았다.

“우선 믿을 수 있는 이들과 함께 조직을 구성하고 있어요. 그저 마음만 앞선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요.”

운현은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하늘의 뜻을 받은 천자라도 천하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체계적인 조직이 필요하다.

월향을 총명하다고 평한 일은의 말은 정확했다.

“그래서 대인께 부탁드릴 것이 있어요.”

그것은 월향의 첫 번째 부탁이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네. 말씀하세요.”

“저희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요?”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월향을 바라보았다.

월향은 온화한 웃음을 흘렸다.

“대인께서 저희의 보호자시니, 저희의 이름을 정해 주심이 당연하겠지요.”

“그렇군요.”

운현도 웃음을 지었다.

잠시 생각하던 운현이 말했다.

“예월(藝月)은 어떨까요?”

월향은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예월이라면…….”

“네. 예인들을 비추는 달이라는 뜻이지요.”

그건 월향이 월주라 불리는 것과 똑같은 의미였다.

그녀를 향한 경의와 신뢰를 운현은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정말 좋은 이름이네요.”

월향은 살짝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운 대인.”

“천만에요.”

그때였다.

“주인님.”

밖에서 총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월향은 눈살을 찌푸렸다.

방해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는데도 총관이 찾아온 것은 문제가 가볍지 않다는 의미였다.

연화가 즉시 문으로 다가갔다.

사락.

문이 열리고 총관이 작은 소리로 무엇인가 말했다.

연화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월향을 돌아보았다.

“왜?”

월향이 묻자 연화가 말했다.

“어, 그게……. 항경상단의 상단주께서 언니를 뵙기 원한다는데요?”

항경상단은 강소성과 절강성을 아우르는 거대 상단이다.

대도시 남경과 풍요로운 항주를 바탕으로 큰 부를 일구어, 가히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할 정도로 커다란 대형 상단이었다.

월향 역시 항경상단의 상단주를 알고 있었다.

그도 이곳 청풍명월루를 찾아온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저 그것뿐, 지금처럼 따로 찾을 이유는 없었다.

“내가 나중에 연락드리겠다고…….”

“아주 중요한 일이래요.”

연화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항경상단 같은 대형 상단의 상단주가 직접 찾아온 것은 확실히 가벼운 일은 아니었다.

“다녀오시지요.”

운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월향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금방 다녀오겠어요.”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운현의 말에 월향은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연화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운현은 객옹과 함께 차를 음미했다.

“어르신.”

문득 운현이 말했다.

객옹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쳐다보았다.

“왜?”

“사람들은 환우오천존이라 하며 다섯 분을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 하지 않습니까?”

“그랬지. 지금은 아니지만.”

염중부가 실종된 이후, 아니 그 전부터 사람들은 더 이상 환우오천존을 언급하지 않았다.

무림맹이 무너지고 신승이 죽었을 때 환우오천존의 시대는 함께 끝난 것이다.

“다른 고수들은 없나요?”

“흥.”

객옹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없겠느냐? 본래 강호 무림은 드러나지 않은 고수와 기인 들이 무수하다. 당장 나만 해도 너 같은 사람이 튀어나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흠, 고수라…….”

객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사대전 당시 환우오천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들 중 단 한 사람만으로도 문파의 운명이 갈릴 정도였으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객옹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문파의 장로급들을 보면 당시 환우오천존이 남긴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능히 짐작할 만했다.

“무림맹이 설립된 이후에도 각 문파들은 검기발현의 절정고수들을 키우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때로는 가주와 장문인의 자리마저 내려놓은 채 말이다.”

새로이 시작된 무림맹의 시대는 노련한 정치적 감각과 유연한 교섭 능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수의 필요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중요해졌다.

아무리 정치적 교섭이니, 연합이니 해도 결국 강호 무림은 무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성립된 곳이기 때문이다.

“절정고수의 경지에 오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당연히 모두가 성공하지는 못했지. 하지만 성과를 거둔 곳도 분명히 있다.”

“어디입니까?”

“첫째는 소림, 무당, 화산, 아미다. 그들의 저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아미는 태평맹에 곤란을 겪지 않았습니까?”

객옹은 피식 웃었다.

“그것은 북해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아미와 당문만 놓고 보자면 문제는 조금 다르지.”

운현은 객옹의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아미의 은거 고수였던 천수 신니의 경지는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다만 당문이 ‘아미와 당문만’ 부딪히는 상황을 만들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두 번째는 소위 말하는 거대 세가들이다. 특히 남궁세가는 주목할 만하지.”

남궁세가의 선대 가주 뇌검 남궁진천은 환우오천존 외에 처음으로 검기를 발현한 고수다.

비록 암천무제에게 패하였으나 그는 검기를 뿜어내는 절정고수들의 시대가 시작된 것을 만천하에 알렸다.

“아쉽군요. 뇌검께서 돌아가셨으니 말입니다.”

“철검이 있지 않느냐?”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분은 스스로 뇌검보다 못하다 하셨습니다.”

객옹은 피식 웃었다.

“뇌검을 본 적이 있느냐?”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말만 들었을 뿐 운현은 한 번도 뇌검 남궁진천을 본 적이 없었다.

객옹은 단언했다.

“보았다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과거의 뇌검보다 오히려 지금 철검의 경지가 더 높다.”

그는 운현과 함께 남궁세가를 방문했을 때 가까이에서 철검을 본 적이 있었다.

또한 신승도 철검에 대해 평하기를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다.

“이들 외에도 드러나지 않은 자들은 더욱 많을 것이다. 강호 무림은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곳이니까. 물론 그렇다고 네 눈에 찰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하던 객옹이 불쑥 물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일은께서 하신 말씀이 있잖습니까?”

“무엇 말이냐?”

일은은 많은 말을 했다.

그보다 더 많은 것들을 숨기긴 했지만.

“나아가야 할 길을 모르겠거든 한 발 물러서서 주위를 돌아보라고 말입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거라는 것 말이냐?”

“네.”

운현은 진지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저는 그 말의 뜻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탁탁탁.

문득 들린 소리에 객옹과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벌컥 열렸다.

“우, 운 대인!”

문을 연 사람은 월향이었다.

언제나 온화하고 우아하던 월향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놀라고 있었다.

얼굴은 살짝 상기된 데다가 그녀의 품에는 방금 전까지도 없었던 얇은 책자가 들려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또 쓰레기냐?”

운현과 객옹이 물었다.

“아, 아니요. 쓰레기가 아니라……. 쓰레기요?”

“치워 버려야 할 인간들이 왔냐는 말이다.”

월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자박, 자박.

월향은 거침없이 운현 앞으로 다가와 품에 안고 있던 책자를 탁자 위에 펼쳤다.

팔락.

운현은 책을 보지 못했다.

월향이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질였기 때문이다.

그사이 뒤따라 들어온 연화가 문을 닫았다.

달칵.

운현은 어색하게 몸을 뒤로 뺐다.

“저기, 조금 떨어지시는 편이…….”

하지만 월향은 아랑곳 않고 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항주의 운현이라는 분이 이것들을 저희에게 보내셨다는데, 운 대인께서 하신 것인가요?”

발갛게 상기된 월향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운현은 눈을 둘 곳이 없었다.

“그, 그게 무슨…….”

“그렇다.”

대답은 객옹이 했다.

월향은 놀란 표정으로 객옹을 쳐다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항경상단의 상단주가 직접 건네준 책자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품들이 적혀 있었다.

금과 은은 물론 각종 보옥과 값비싼 진주들, 유명한 서화와 머나먼 서역의 진귀한 물건들까지 그야말로 이 청풍명월루를 몇 채는 살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항경상단의 상단주가 직접 찾아와 상황을 설명하고 목록을 확인해 줄 정도였으니 말이다.

달칵.

놀라는 월향과 연화는 아랑곳없이 객옹은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무심히 말했다.

“그런데 그게 전부라더냐?”

“네?”

월향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확실히 전부라는 말은 없었다.

‘항주의 운현이라는 분이 보내셨다’길래 목록을 보다 말고 뛰어왔으니까.

“전부인지 확인해라. 그게 다라면 염가 놈도 생각보다 욕심이 없었다는 뜻이니까.”

얄팍한 책자를 흘깃 바라본 객옹은 태연히 차를 음미했다.

월향과 연화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객옹을 쳐다보는 사이, 운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애써 상체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사락.

월향은 운현을 돌아보았다.

바로 코앞에서 월향의 눈동자가 아름답게 빛났다.

“이건 받을 수 없어요.”

월향은 단호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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