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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10화 (410/530)

410화. 다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자

일은과 객옹, 운현은 저택 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침 저택에 준비되어 있던 여벌 옷으로 일단 갈아입은 후 세 사람은 후원에 앉아 차를 음미했다.

달칵.

찻잔을 들며 객옹이 물었다.

“몸은 괜찮냐?”

“네. 괜찮습니다.”

객옹의 표정은 많이 좋아져 있었다.

“그래서, 얻은 바는 있었느냐?”

“있습니다.”

운현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제가 제 검의 주인임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말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운현과 객옹, 그리고 일은에게는 더없이 큰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운현은 일은을 향해 눈을 돌렸다.

“감사합니다.”

일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감사할 것 없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찻잔을 든 일은은 느긋하게 차를 음미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운현이 물었다.

“어르신께선 누구십니까?”

그것은 객옹도 묻고 싶던 질문이었다.

운현과 객옹의 시선을 받은 일은이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나야 사일천이지. 창룡전의 유일한 학사이자 자네의 선배 말일세.”

“일은이시기도 하지요.”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지. 애초에 내 명호도 아니고.”

찻잔을 쥔 일은은 말을 이었다.

“그보다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그만두게. 갑자기 늙은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보다 연세가 많지 않으신가요?”

“내게 나이는 의미가 없네.”

일은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니 그냥 선배님이라고 부르게.”

“알겠습니다. 사 선배님.”

“아, 그거 가명일세.”

“네?”

운현이 놀라 반문하자 일은은 쓴웃음을 지었다.

“인연이 깊은 분들의 성을 빌려 쓰고 있네. 아직은 밝힐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듣고 있던 객옹이 말했다.

“세상을 등진 은자라지만 이름 정도는 말해도 상관없지 않나? 어디 가서 소문 낼 것도 아니고.”

운현이나 객옹이 말을 퍼트릴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은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닐세. 오히려 내가 하는 행동은 적당히 넘어가는 것 같은데, 이름이나 개념 같은 건 영향이 크더군. 이곳에 고정되어 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라서.”

그게 무슨 의미인지 운현도, 객옹도 이해하지 못했다.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얽매이기 싫다는 뜻이냐?”

신선의 경지에 오르는 등선(登仙)의 길은 좁고 험하다.

그래서 그들은 산과 계곡에, 때로는 조정과 저잣거리에 숨는다.

하지만 일은은 한숨을 쉬었다.

“비슷하긴 하네만, 내게도 남다른 고충이 있으니 그렇게만 알게.”

객옹은 마뜩잖은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말 못 할 사정이란 건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니까.

“일대상인을 놓아두시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까?”

운현이 물었다.

일은은 의아하다는 듯 반문했다.

“내가 놓아두다니, 무슨 말인가?”

“강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어떻게 선배님 같은 분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시 만난 사일천에게서 운현이 느낀 것은 바로 불가해한 경이였다.

하지만 일은은 웃음을 흘렸다.

“그건 자네의 착각일세.”

“착각이라고요?”

운현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은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라서 그렇게 느낀 것이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경지를 짐작하기 힘든 숨은 고수 정도로만 보일 테지.”

‘고수 정도’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일은은 검성과 독선조차 인정한 고수였으니까.

달칵.

찻잔을 놓으며 일은이 말했다.

“깨달음의 경지로 말하자면 자네와 나는 한 걸음 차이일세. 강함으로 따지자면 내가 조금 더 강하다 할 수 있겠고.”

“신나게 두드려 맞은 주제에 말인가?”

객옹이 찻잔을 들며 말했다.

일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언제? 고생은 좀 했지만.”

“흥, 그게 그거지. 그런 주제에 잘도 말했더군. ‘일대상인도 내가 어떻게든 해 주겠다’라니.”

일은은 신음을 흘렸다.

“끙. 그쪽은 어떻게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라서……. 어쨌든 결과적으로 잘되지 않았나?”

하지만 객옹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일은 역시 운현에게 고전을 한 건 사실이라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여하튼.”

운현을 바라보며 일은이 말했다.

“자네와 나는 그리 큰 차이가 없네. 다만 남들과 다른 약간의 차이를 자네가 그렇게 인지한 것뿐일세. 오히려 앞으로의 가능성이나 그 너머를 생각하면…….”

일은은 피식 웃었다.

“나는 감히 자네에게 비할 수 없네.”

운현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말씀은 너무…….”

“자네는 옳은 길을 택했네.”

일은은 운현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그 눈빛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제 앞일은 자네가 하기 나름일세.”

객옹이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하기 나름이라니? 천향접을 일 검에 베어 버렸는데도 아직 부족하단 말이냐?”

그 장엄한 천향접을 운현은 베었다.

그런데도 일은은 아직도 나아가야 할 경지가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건 바른 길[正道]이 아니라네.”

“헛소리!”

객옹은 날카롭게 말했다.

정사 중간으로 외면받았던 당문의 독선으로선 그 말에 격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사도니, 외도니 하는 것은 정파의 핑계에 불과하다. 현이가 일대상인을 꺾으면 모든 것이……!”

“그러면 자네는.”

일은이 객옹의 말을 끊었다.

“계속 그 눈빛을 하고 있는 현이를 보겠다는 뜻인가?”

객옹은 흠칫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운현의 서늘한 눈빛이 떠올랐다.

‘악몽’이라는 단어 외에 무엇으로 그때의 느낌을 설명할 수 있을까?

객옹은 대답하지 못했다.

잠시 후, 객옹이 나지막이 말했다.

“……어찌해야 현이가 일대상인을 넘어설 수 있나?”

“모르지.”

일은은 쓴웃음을 지었다.

“말했잖나? 나는 그리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만…….”

슥.

일은은 운현을 바라보았다.

“잠깐 자네의 검을 보여 주겠나?”

그 말은 비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명을 풀어 칼집 채로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북해의 검 미명은 그 아름다운 칼날을 감춘 채 조용히 쉬고 있었다.

일은 역시 자신의 소검을 풀어 탁자 위에 놓았다.

달칵.

두 자루의 검이 나란히 놓였다.

그 모습을 일은은 지긋이 바라보았다.

마치 먼 옛날을 회상하듯이.

“백호전의 책에 이어서 이 검까지 자네에게 닿았다니…….”

일은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문득 눈을 들어 운현을 바라보았다.

“월향을 만났나?”

“네, 그렇습니다.”

청풍명월루의 주인인 그녀에게 단서를 남겨 준 사람이 바로 일은이다.

일은이 그녀에 대해 알고 있는 건 당연했다.

“그 아이는 총명하니 천기를 놓치지 않았을 텐데, 재미있는 일은 없었나?”

운현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있는 일은 아닙니다만 예인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일은의 눈이 빛났다.

“왜 그런 결정을 했지? 세상에 어려운 이들이 예인들만은 아닐 터인데.”

그의 지적은 옳았다.

운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일은은 피식 웃었다.

“하긴 월향이라면 능히 남자의 마음을 움직일 만하지. 아름답고 매력적인 아이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쓴웃음을 지으며 운현은 말했다.

“검성께서 말씀하시더군요. 제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고요.”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도 무익하고, 시도조차 없이 가능성을 논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하였습니다.”

“후후.”

일은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바로 그것이 자네에게 닿은 인연들 중 하나일세. 때로는 그것들을 천명이라고도 하지.”

운현은 눈을 빛냈다.

‘천명(天命)’이라는 단어는 사뭇 의미심장했다.

일은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의 천명은 이미 시작되었네. 그러니 자네가 그 끝에 다다를 때까지 인연의 원은 결코 끊어지지 않을 것일세. 자네의 검이 그러했듯이.”

운현도, 객옹도 일은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의미심장함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운현의 예검이 운명처럼 원을 완성하듯, 그리고 반드시 결과를 가져오는 것처럼 운현을 향한 하늘의 뜻 역시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의미였다.

“혹시 나아가야 할 길을 모르겠거든 한 발 물러서서 주위를 돌아보게. 그러면 자네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걸세.”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운현이 그 말을 부인할 수 있을까?

일은은 눈을 돌려 탁자 위를 바라보았다.

나란히 놓인 미명과 소검을 바라보는 일은의 표정은 온화했다.

“검을 보여 줘서 고맙네.”

“천만의 말씀입니다.”

달칵.

일은은 자신의 소검을 들었다.

운현 역시 미명을 들어 올렸다.

손에 쥔 미명에서 어쩐지 희미한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그때 문득 객옹이 물었다.

“그 검도 자네 모친의 것인가?”

“그렇다네. 무리하게 빌려온 것이었네만.”

일은이 웃으며 말했다.

“이 두 검이 서로 만났음을 아시면 어머니께서도 기뻐하실 걸세.”

무언가 사연이 있는 듯했지만 객옹은 묻지 않았다.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며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객옹은 찻잔을 들며 무심결에 말했다.

“그래. 하늘에서 기뻐하시겠군.”

일은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멀쩡히 살아계신 남의 어머니를 왜 갑자기 돌아가신 분으로 만드나?”

“뭐라고?”

이번에는 객옹도 놀랐다.

그는 찻잔을 들어 올리다 말고 되물었다.

“자네 모친이 아직도 살아계신단 말인가?”

그건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객옹이 반문했지만 일은은 오히려 퉁명스럽게 말했다.

“당연히 살아계시지. 비록 이 세상엔 안 계시지만…….”

“뭐라고?”

이번에는 객옹의 눈매가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지금 나하고 농담하자는 건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객옹이 말했다.

죽음과 삶을 관장하는 독선의 기세가 뭉클뭉클 번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일은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농담이라니? 그런 말을 하고도 그냥 넘어갈 줄 알았나?”

사뭇 살벌한 눈빛으로 일은이 말했다.

그에게서도 날카로운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후우우욱.

조용하던 후원에 폭풍 같은 기세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난감해진 사람은 운현이었다.

‘이런…….’

객옹과 일은을 번갈아 보며 운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사박.

총군사 영호준의 두 번째 충고였던, ‘혹시라도 어르신들이 싸울 때는 절대 끼어들지 마십시오. 섣불리 중재한다고 나섰다가는 양쪽에서 욕먹습니다.’라는 목소리가 운현의 귓가에 또렷이 울리고 있었다.

***

다음 날, 북경 외곽.

운현 일행이 탄 마차는 북경을 떠나고 있었다.

며칠간 머물렀던 대도시 북경이 관도 너머로 멀어지고 있었지만 내다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운현은 물론 감찰어사 조관과 항장익도 침묵을 지켰다.

객옹이 눈살을 찌푸린 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각, 따각.

단조로운 말발굽 소리만 울려 퍼지기를 얼마나 했을까?

“대체 그놈 뭐냐?”

객옹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품 있고 멋진 새 옷을 입고 있었지만 객옹의 기분은 매우 좋지 않았다.

“아니, 이 세상에 안 계시다면서 나한테 그렇게 화를 내? 천하에 고약한 놈 같으니…….”

아직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 객옹은 거친 숨을 내뿜었다.

운현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분도 뭔가 사정이 있으시겠지요.”

“무슨 사정? 그놈의 말 못 할 사정 말이냐?”

객옹은 화를 숨기지 않았다.

“이리저리 돌리면서 숨기는 건 어찌나 많은지, 세상을 피해 숨은 사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숨기고 있는 놈 같더구나.”

그 말에 운현은 동의했다.

확실히 일은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은자(隱者)와는 달랐다.

운현은 문득 검성 이검학이 한 말이 떠올랐다.

검성은 ‘일은은 우리와 다른 곳에 서서 다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다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자.’

어쩌면 그건 정확한 통찰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불가해한 경이와도 같은 일은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말이다.

“그래도 보기 좋더군요.”

“뭐?”

객옹이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운현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르신께서 그렇게 편하게 말씀하시는 건 오랜만이라서요.”

일은과 함께 있는 객옹의 모습은 마치 검성을 대하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친밀해 보였다.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흥.”

객옹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더 이상 화를 내지도, 무어라 하지도 않았다.

따각, 따각.

마차는 남쪽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갔다.

그리고 운현은 일은이 해 준 말들을 조용히 되새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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