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화. 창룡검(蒼龍劍)
우웅, 우웅.
나지막한 울림이 객옹의 귀를 간지럽혔다.
객옹은 자신과 일은의 손끝에서 허공이 일렁이는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독기공이 공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객옹과 일은을 주시하는 운현의 눈동자는 은은한 열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천향접이 그 눈빛을 이끌어 냈다는 것은 분명했다.
웅, 우웅, 웅.
허공의 일렁임은 더욱 거칠어졌다.
천향접이 당장이라도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치명적인 죽음의 날개를 말이다.
“……해라.”
일은이 말했다.
“흥.”
객옹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곧 자신의 절기, 천향접을 펼쳐 냈다.
후욱.
묵직한 충격이 두 사람의 손끝에서 터져 나왔다.
‘웃.’
객옹과 일은은 한순간 뒤로 밀릴 뻔했다.
그리고 동시에 무엇인가가 그들의 눈앞에서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화아아악.
휘청했던 객옹은 눈을 부릅떴다.
그것은 바로 천향접이었다.
본래 무형의 기운이었을 독선의 천향접이, 이 순간 모두의 눈앞에 그 모습을 똑똑히 드러낸 것이다.
훙.
높이 떠오른 천향접의 모습은 거대하고도 장엄했다.
마치 하늘을 뒤덮을 듯 펼쳐진, 창백한 붉은빛과 초록빛이 감도는 그 아름다운 날개는 객옹과 일은마저 눈을 빼앗길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모습이기도 했다.
후우욱.
거대한 천향접이 하늘로부터 운현을 향해 천천히 내려앉았다.
마치 운현의 생명뿐 아니라 삶과 죽음 그 모두를 덮어 버릴 것처럼.
그러나 운현의 눈빛은 오히려 열기를 머금었다.
스륵.
미명의 칼끝이 조용히 하늘로 향했다.
‘저것은!’
일은도, 그리고 객옹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백호실전검 제일식, 예검의 시작이었다.
후우우웅.
자신을 뒤덮어 가는 죽음의 날개 앞에서 운현의 검이 천천히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쩌면 너무나 늦은 대응이었는지도 몰랐다.
이미 천향접의 날개는 운현을 향해 드리우고 있었으니까.
후욱.
천향접의 날개가 운현을 완전히 덮어 가던 바로 그때, 운현의 검은 운명처럼 원을 완성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아아악.
창백한 푸른빛이 세상을 뒤덮었다.
사락.
무언가 뺨을 간질이는 느낌에 운현은 눈을 떴다.
아니, 눈을 떴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애초에 감은 적이 없었으니까.
팔락.
작은 불빛이 얼굴 주위를 맴도는 것을 운현은 깨달았다.
운현은 그 작은 불빛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 빛이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하리란 건 이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스륵.
손끝을 맴돌던 불빛은 마치 나비처럼 운현의 손가락에 앉았다.
하지만 곧 다시 떠오르더니 천천히 멀어져 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운현은 문득 불빛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방이 온통 반짝이는 불빛들로 가득했다.
‘이건…….’
운현은 가볍게 손을 뻗었다.
후우우우.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느낌이 손끝에 전해졌다.
빛들은 끊임없이 명멸하며 운현을 감싸 안고 흘렀다.
크고 작은 흐름들이 제각기 어우러지고 혹은 갈라지며 보다 더 큰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운현은 눈을 들어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탄식을 흘렸다.
‘아아.’
흐름은 운현 주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이 닿는 곳, 아니 그 너머 아득한 곳까지 빛의 흐름이 가득했다.
수많은 빛들의 흐름은 함께 어우러지며 거대한 빛의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흐름들조차 더욱 큰 흐름의 일부에 불과했다.
운현의 시야는 물론 감각과 인지를 아득히 초월하여 존재하는 장엄한 빛의 흐름들.
이 도도한 흐름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크다 하지 못했다.
아니, 감히 한 줌의 의미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 경이롭고 장엄한 광경 앞에 운현은 그저 탄식할 뿐이었다.
‘……나는, 이다지도 작았던가.’
그것은 한없는 무의미이자 동시에 절대적인 충족감이었다.
비록 티끌 같을지라도 자신은 이 장엄한 흐름의 일부다.
이대로 영원히 이곳에 머무른다 해도 운현은 만족할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곳이야말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사락.
주위를 맴돌던 빛 하나가 운현의 눈앞에서 작게 반짝였다.
운현은 가만히 손을 뻗었다.
작은 빛은 당연하다는 듯 운현의 손가락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리고 속삭이듯 작은 소리가 운현의 가슴에 전해졌다.
―어디론가 훌쩍 가 버리시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요.
놀라운 일이었지만 운현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운현은 미소를 머금었다.
투정 섞인 말투에 담긴 따뜻한 정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빛은 또 있었다.
―운 학사님은 절대 혼자가 아니에요.
은은하게 빛나는 작은 빛이 운현의 옆에 가만히 떠 있었다.
언제라도 운현의 곁을 지키겠다는 듯이.
반면 운현이 손을 내밀면 도망가는 빛도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서 있으면 어느새 다가와서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시키겠다는 듯 깜빡거렸다.
그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서 운현은 웃음을 머금었다.
훙.
그리고 또 다른 빛이 떠올랐다.
그것은 장난치듯 가벼우면서도 더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빛이었다.
―네 덕분에 잠시 즐거웠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가슴에서 뜨거운 감정이 울컥 솟아올랐다.
그가 어찌 이 목소리를 모르랴?
어떻게 그를 잊을 수 있으랴?
사락, 사락.
그사이에도 무수한 빛들이 사방에서 생겨나고 사라져 갔다.
끊임없이 빛나고 소멸하는, 그 수조차 짐작할 수 없는 작고 미세한 불빛들.
그것은 너무나 허무하면서도 동시에 가슴 벅찰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아……!’
그 순간 운현은 깨달았다.
작은 불빛들은 아주 짧은 순간 존재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연약한 그 빛들은 분명 저 경이롭고 장엄한 흐름의 한 부분이었다.
‘……사람은.’
가슴이 메어 왔다.
그것은 곧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이토록 소중하고 아름다웠던가.’
운현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운 대인.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그 목소리를 운현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 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뺨에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래도 운현은 미소 지었다.
“고맙네. 독고 제.”
운현은 고개를 들어 장엄한 빛의 흐름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슥.
어느새 그의 검 한 자루가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 검은 미명도, 낙일도, 목검조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형태는 물론 이름조차 없던 운현 마음속의 검이었다.
―그러니 자네는 검을 다스리는 자가 되게.
희미한 목소리가 운현의 가슴에 전해져 왔다.
어떻게 운현이 그 말을 잊을까?
어찌 그 때를 잊을 수 있을까?
우웅.
그 순간 운현의 검이 변화했다.
이름도 형태도 없던 마음의 검이 날카로운 칼날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운현의 의지 그 자체였다.
“그래, 나는…….”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을 내려다보며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창룡검의 주인이다.”
***
칭.
자그마한 쇳소리에 운현은 눈을 떴다.
어쩌면 그저 눈을 깜빡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현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일은과 객옹이 작은 소검을 함께 쥔 채 바로 코앞에서 운현의 검을 막아서고 있었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마치 결사의 각오라도 한 듯 눈살을 와락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던 운현이 물었다.
“……뭐 하십니까?”
객옹의 눈썹이 꿈틀했다.
“……현이냐?”
미심쩍은 듯한 표정으로 객옹이 물었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바로 코앞에서 운현을 보면서도 ‘현이냐?’고 묻다니, 그것도 객옹이 말이다.
“제가 아니면 누구겠습니까?”
헛웃음을 흘리며 운현이 말했다.
객옹은 눈살을 일그러뜨린 채 운현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문득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후우우우.”
한숨은 일은의 입에서도 흘러나왔다.
일은은 안도한 듯 말했다.
“……드디어 끝났다.”
운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비무가 끝났다는 뜻일까 생각하는데, 객옹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내년부터 오늘을 내 생일이라 해도 되겠군.”
운현은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여전히 두 사람에게 검을 겨누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 죄송합니다.”
운현은 뒤로 물러서며 미명을 갈무리했다.
스릉.
미명이 작은 소리를 내며 그 모습을 감췄다.
일은과 객옹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치 운현이 완전히 검을 거둔 것을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일은이 소검을 거두고, 객옹이 툭 던지듯 운현에게 물었다.
“네가 뭘 했는지 기억은 하냐?”
“아……. 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객옹이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뭘 했는데?”
“비무를 했는데요?”
운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가 철전과 난홍십이엽을 베고, 검결지로 소검을 흘렸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에 두 분의 천향접을…….”
말하던 운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벤 것도 같은데, 그다음은 잘 모르겠군요.”
객옹은 헛웃음을 흘렸다.
벤 것도 같은 것이 아니라 베었다.
펼쳐 낸 객옹 자신조차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유형화된 그 거대한 천향접을 운현은 일 검에 베어 버렸다.
바로 그의 백호실전검 제일식, 예검으로 말이다.
그리고 운현은 열기가 사라진 서늘한 눈빛으로 객옹과 일은을 향해 짓쳐 들었다.
마치 더 이상은 볼 것조차 없다는 듯이.
객옹과 일은에게 운현의 검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최악의 결과를 각오한 그 마지막 순간, 운현이 거짓말처럼 검을 멈춘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미명과 소검의 칼날이 닿으며 낸 작은 쇳소리였다.
“허.”
객옹은 나지막이 탄식했다.
그리고 운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가자. 여기선 더 이상 할 일도 없으니.”
운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은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엉망이 되어 있었다.
“차를 마셔야겠다.”
객옹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비무가 끝났으니 있을 이유도 없었다.
“네. 그렇게 하지요.”
말하던 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두 분 옷은 어쩌다 그렇게…….”
사실 두 사람의 옷은 이미 옷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운현이 잘라 버린 철전 조각이 여기저기 구멍을 낸 데다가, 천향접의 여파로 너덜너덜 찢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무에서 나눈 검로만 기억하는 운현으로선 그렇게 물어본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일그러진 두 사람의 눈살이었다.
특히나 객옹의 표정은 대단히 심각했다.
운현은 얼른 말했다.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사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객옹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필요 없다.”
“나는 사 주게.”
그건 일은의 목소리였다.
“이왕이면 좋은 것으로.”
객옹은 못마땅하다는 듯 일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일은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옷이라도 받아야지, 안 그러면 손해가 너무 막심하지 않나?”
“마침 저도 옷을 사려던 참이었습니다.”
운현은 이때다 싶어 얼른 말했다.
사실 운현의 옷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이 기회에 두 분의 옷도 함께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객옹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거절은 하지 않았다.
그제야 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항주를 떠나기 전 총군사 영호준이 슬그머니 말해 준, ‘어르신들은 마음이 상하면 오래가니 무조건 빨리 푸는 게 최고입니다’라는 충고가 귓가에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