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407화 (407/530)
  • 407화. 창룡검주(蒼龍劍主)

    운현과 일은의 두 번째 격돌은 일은의 소맷자락이 찢어지는 것으로 끝났다.

    일은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자네를 상대로 이 정도의 손해는 감수해야겠지.”

    “손해는 제가 본 것 같습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백호실전검 제이식을 펼쳐 내고도 겨우 소맷자락 하나라니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네.”

    일은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 세상에서 자네의 검에 가장 익숙한 사람은 바로 나일 테니까.”

    운현의 눈동자가 빛났다.

    예전 황궁에 있을 때라면 일은이 아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애초에 운현은 수련을 숨기지 않았고, 한때 시녀나 환관 들 입에 오르내리기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운현이 펼친 검은 황궁을 나온 이후에 완성한 것이다.

    비록 개념이나 뼈대는 학사 때부터 가지고 있었다지만 그것만으로 일은이 ‘익숙하다’고 말할 정도일까?

    “백호수련검을 익히셨습니까?”

    어쩌면 그건 어리석은 질문인지도 몰랐다.

    ‘문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일은이 그 내용을 모를 리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일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못했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일은은 말했다.

    “내가 말했지 않나? 다른 사람이 그 책을 얻는다 해도 그저 문연각에 있는 많은 잡서들 중 한 권일 뿐이라고. 나도 예외는 아니라네.”

    일은은 눈을 빛냈다.

    “그래서 자네가 특별한 것이고.”

    “그래. 현이는 특별하지.”

    그건 객옹의 목소리였다.

    쑥스러워진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잘났다는 뜻이 아니니 좋아할 것 없다. 특별하다고 한 것은 힘을 얻고도 그 마음과 행하는 바가 남다르다는 것이지, 타고난 무재라든가 무공의 천재라는 의미는 아니니까.”

    단호한 객옹의 말에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객옹은 다시 일은을 돌아보았다.

    “그래서, 왜 네가 현이의 검에 익숙한 거냐?”

    “다른 분께 많이 당해 봐서라네.”

    일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항상 온화하게 웃으셨지만 그분의 검로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했지.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네.”

    “안 해도 상관없다. 그러면 계속 싸울 건가 아니면 대화를 할 건가?”

    객옹의 표정은 과히 좋지 않았다.

    운현은 그 이유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때문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일은의 대답은 무심했다.

    “벌써 끝낼 수는 없지. 아직 확인해 볼 것도 있고.”

    슥.

    일은이 소검을 들어 올렸다.

    후우우웅.

    초록빛 기운이 일은의 검에 맺혔다.

    그것은 객옹조차 눈썹을 꿈틀할 정도로 완숙한 경지의 독기공이었다.

    운현 역시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초록빛 독기공 때문이 아니었다.

    우우우웅.

    소검을 든 일은의 모습은 일견 평범했다.

    그러나 그를 따라 흐르는 기세는 결코 범상치 않았다.

    그것은 어제 창룡전에서 일은을 보았을 때 느꼈던, 존재 자체가 이해되지 않을 정도의 경이와 놀라움이었다.

    “진심으로 와야 할 걸세.”

    일은이 나지막이 말하며 웃었다.

    “네. 진심으로 가겠습니다.”

    대답하는 운현의 입가에도 희열이 번졌다.

    슥.

    미명의 검 끝이 천천히 하늘로 솟았다.

    하늘로 올린 깃발처럼 운현의 검이 천지간에 서고, 그의 발밑으로 하얀 서리가 번져 갔다.

    츠즈즈즈즈.

    객옹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지금 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은 역시 다르지 않았다.

    “허어, 아무리 내가 진심으로 오라고 했다지만…….”

    말하던 일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어쩔 수 없지.”

    후우욱.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소검에서 초록빛 기세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기세는 소검의 끝을 지나 순식간에 일 장 가까이 뻗어 올랐다.

    객옹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일은의 소검은 더 이상 소검이 아니었다.

    아니, 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창백한 초록빛을 뿜어내며 하늘로 솟은 그 섬뜩한 모습은 객옹조차 소름이 돋게 만들 정도였다.

    운현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스륵.

    그의 검, 미명이 허공에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러나 조금도 주저함 없이.

    으득.

    객옹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본능은 당장 저 검을 멈춰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인의 호승심은 죽음을 불사하고 저 검에 맞서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객옹이 이렇거늘 그 앞에 선 일은이야 어떠하랴?

    하지만 일은은 움직이지 않았다.

    우우웅.

    초록빛으로 일렁이는 소검을 든 채 일은은 날카롭게 운현을 주시하고 있었다.

    스륵.

    운현의 검로는 어느새 원을 완성해 가고 있었다.

    바로 백호실전검 제일식, 예검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아악.

    푸른빛이 일은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일은이 기다리던 것은 바로 이때였다.

    사락.

    일 장에 이르던 일은의 검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끼이이잉.

    귀를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일은의 소검이 빛을 뿜었다.

    놀랍게도 일은은 자신의 모든 내력을 소검에, 그것도 칼끝의 한 점에 집약시킨 것이다.

    “하아!”

    일은은 기합과 함께 검을 내질렀다.

    후욱.

    별빛처럼 찬란하게 빛을 뿜는 소검이 세상을 뒤덮는 푸른빛을 향해 쏘아져 갔다.

    그것은 바로 일은의 절기, 월하유성(月下流星)이었다.

    쏴아아.

    자욱하던 흙먼지가 바람에 날려 갔다.

    객옹의 모습은 아예 허옇게 먼지로 덮여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운현과 일은의 모습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으음.”

    일은이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단정하던 그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었고 옷은 길게 찢어져 있었다.

    그건 마치 거대한 짐승이 할퀴고 간 듯 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뿐, 상처를 입거나 피가 배어 나오는 곳은 없었다.

    일은은 헛웃음을 흘렸다.

    “진심으로 오랬다고 다짜고짜 피할 수도 없는 검을 펼치다니…….”

    헛웃음을 머금은 채 일은은 자신의 소검을 쳐다보았다.

    “그나마 검은 무사해서 다행이군.”

    그의 손에 들린 소검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을 내고 있었다.

    일은은 고개를 들어 운현을 바라보았다.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운현이 나지막이 답했다.

    그의 머리카락 역시 온전하지 않았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너덜너덜해진 옷자락은 조금 전의 격돌이 가져온 충격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운현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운현이 물었다.

    잠시 의아해하던 일은은 웃음을 머금었다.

    “자네의 검을 어찌 막았느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일대상인도 운현의 백호실전검 제일식은 막지 못했다.

    운현은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일은은 운현의 예검을 막았다.

    빛을 뿜어내던 그의 소검으로 말이다.

    “막은 것이 아닐세.”

    일은이 말했다.

    “자네의 검……. 무어라 하지?”

    “백호실전검 제일식, 예검입니다.”

    “그래, 예검. 그 예검은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 내지. 자네도 이미 알겠지만.”

    “그렇습니다.”

    예검은 그 무엇보다 먼저 도달하는 검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표현 역시 틀리다고 할 수 없었다.

    “예검을 막을 수 있는 건 예검뿐일세. 그래서 그냥 버텼네.”

    “네?”

    운현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놀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버틸 수도 있는 겁니까?”

    “보통은 못 하겠지.”

    일은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전력을 다해 때려 박으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된다는 게 스승님들의 가르침이셔서.”

    “그건…….”

    객옹의 목소리에 일은이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 말하려던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니께서?”

    일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객옹은 인상을 썼다.

    “크흠.”

    헛기침을 한 후 객옹이 말했다.

    “……자네가 펼친 그 한 수는 뭔가?”

    “월하유성이라 하네. 내 절기지.”

    객옹은 가만히 ‘월하유성’이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리고 툭 던지듯 말했다.

    “독기공의 제어가 제법이더군.”

    그건 제법 정도가 아니었다.

    독기공의 대가인 객옹조차 그런 말도 안 되는 집약은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닐세. 평생 독기공으로 숨을 쉬다 보면 그 정도는 다 하지.”

    객옹은 눈을 부릅떴다.

    ‘숨을 쉰다’는 것은 무인에게 그 의미가 남다르다.

    독기공으로 숨을 쉰다는 건 생명의 근간을 이루는 진원지기 자체가 독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슥.

    일은이 손을 뻗어 객옹의 말을 끊었다.

    “그보다.”

    그는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자네, 마음에 거리낌이 있더군.”

    운현은 물론 객옹도 흠칫했다.

    일은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사람은 속여도 자신의 검은 속이지 못하네. 자네의 검 끝에는 분명 두려움이 머물러 있었어. 어째서인가?”

    운현은 침묵했다.

    하지만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심마 때문입니다.”

    일은은 눈살을 찌푸렸다.

    “심마?”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일충현 교두님의 딸이 문왕에게 납치된 적이 있습니다.”

    일은이 어찌 금군교두 일충현을 모르랴?

    그의 표정이 살짝 굳는데 운현이 말을 이었다.

    “저는 그녀를 구하려 했습니다. 허나 제 불찰로 인하여 저는 그만 극독에 중독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운현의 불찰이라고만 할 수는 없었다.

    운현의 발 앞에 문왕이 던진 머리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순간을 떠오르게 한 데다가, 그것이 일아영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암습을 당한 직후에야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다행히 해독은 할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저는 한동안 내력을 일으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아니,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운현의 눈동자가 강하게 빛났다.

    “내력이나 검기가 아니더라도 한 자루 검이 있다면 천하의 그 무엇이든 베지 못할 것이 없음을 말입니다.”

    후웅.

    한순간 그때의 감각이 다시 돌아오는 듯했다.

    운현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저는 다행히 아영 소저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눈앞에 일충현 형님의 딸이 쓰러져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무감(無感)이었다.

    운현을 배신한 이서연의 독기 어린 눈빛도, 문왕의 시신을 안고 절규하던 인태상도, 심지어 쓰러진 일아영의 모습조차 운현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누구든 간에 운현은 한 치의 동요조차 없이 베어 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심마라 한 것이로군.”

    일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무언가 생각하는 듯 일은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문득 물었다.

    “자네가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가?”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제 소중한 사람들에게 제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니지. 그건 오히려 필요한 것이네.”

    “네?”

    의아해하는 운현에게 일은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신의 학대가 사랑이라고 믿고 있는 어리석은 부모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제발 모든 이들이 자네의 그런 걱정을 좀 본받았으면 하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자네의 두려움은 그것에 있지 않네.”

    일은은 단호하게 말했다.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괴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바로 그 가능성이 자네는 두려운 걸세.”

    운현은 이를 꽉 악물었다.

    어쩌면 일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같은 의미의 말이 아닐까?

    “뭐, 말로만 해서는 모르겠지.”

    일은은 허공에 가볍게 검을 뿌렸다.

    휙.

    그의 소검이 햇빛 아래 반짝였다.

    일은은 운현을 향해 소검을 겨누었다.

    “해 보게. 내력도, 검기도 없이 모든 것을 베었다는 그 경지. 할 수 있지?”

    운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지금도 그 경지가, 그 무감의 세계가 운현을 부르고 있었으니까.

    “허나…….”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게.”

    일은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만일 심마에 갇혀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자네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의 안전은 내가 책임지지.”

    객옹의 눈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러나 일은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일대상인.”

    운현도 객옹도 순간 멈칫했다.

    일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쪽도 내가 어떻게든 해 주겠네. 자네가 심마에 갇혀 돌아오지 못한다면 말이야.”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일은을 바라보았다.

    그 말이 거짓이나 허세가 아님을 운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일은에게서 느껴지는 그 불가해한 존재감이, 그 경이로운 기세가 그의 진심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제 걱정할 것은 아무것도 없네. 그러니 자네는 단 하나만 생각하게.”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일은은 말했다.

    “자네가 바로 검의 주인일세. 창룡검주(蒼龍劍主).”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