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일은(一隱)
북경 교외의 저택.
운현과 객옹이 머무는 저택에 마차 한 대가 멈춰 선 것은 아침 해가 중천에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달칵.
마차에서 내린 사람은 사일천이었다.
기다리던 운현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어서 오십시오.”
“고맙네.”
사일천은 문득 운현의 안색을 살폈다.
“괜찮나? 피곤해 보이는데.”
“아, 갑자기 뭘 좀 배우느라…….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비무 대책이라며 객옹이 해 준 독기공에 대한 강론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어차피 운현은 독기공을 익힐 수 없는 데다가, 독기공의 고수인 객옹과 이미 비무를 해 본 운현에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알았네. 아, 잠깐만.”
사일천은 마부에게 삯을 치르고 마차를 돌려보냈다.
따각, 따각.
마차가 떠나자 운현은 사일천에게 말했다.
“들어가시지요.”
사일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운현과 함께 저택으로 들어섰다.
저벅, 저벅.
“자네 집인가?”
저택을 둘러보며 사일천이 물었다.
“아닙니다. 박 공공이 잠시 쓰게 해 준 곳입니다.”
“집은 좋은데 황궁에서 너무 멀군.”
사일천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마차를 장만한다 해도 길이 막힐 테고, 결국 가까운 게 최고인가…….”
무언가 계속 중얼거리는 사일천의 모습을 보며 운현은 웃음을 머금었다.
이렇게 보면 예전에 알고 지낸 평범한 선배 학사인데, 실은 그가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인 ‘일은(一隱)’이니 말이다.
“객옹께서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독선 말입니다.”
“그런가?”
사일천은 무심한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 인상 고약한 독선도 오랜만이군.”
저벅, 저벅.
두 사람은 후원으로 들어섰다.
객옹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잘 지냈나? 일선(一仙).”
먼저 일은이 말했다.
일선은 환우오천존의 한 사람인 독선을 일컫는 말이다.
객옹은 인상을 쓴 채로 말했다.
“……일은이냐?”
“그래. 내가 일은이다.”
담담한 목소리로 일은이 말을 이었다.
“화산 이후로는 처음이로군. 그렇지 않은가?”
객옹은 여전히 일은을 노려보았다.
운현은 ‘독선의 인상이 고약하다’고 일은이 말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화산에서도 분명 객옹은 저렇게 일은을 쳐다보았을 테니 말이다.
“이상하군.”
객옹이 말했다.
“네가 일은이라는 것은 알겠다. 천하에 너 같은 자가 또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허나 그렇다기엔 지나치게 젊다.”
“아, 그것 말인가?”
일은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슥.
운현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일은의 얼굴이 나이 든 노인의 모습이 되었기 때문이다.
희고 긴 눈썹에 하얀 수염까지, 마치 속세를 벗어난 듯한 선풍도골의 노인이 눈앞에 서 있었다.
손을 쓸어내리는 그 한 동작으로 일은은 자신의 얼굴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 것이다.
“으음.”
객옹은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그건 일은이 단번에 모습을 바꿨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전과 지금, 그 어느 쪽에서도 객옹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일은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 애초에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실재인지 허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 세상사 아니던가?”
객옹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어색한데요.”
문득 운현이 말했다.
일은과 객옹의 시선이 운현을 향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위화감이 느껴집니다.”
그건 마치 무언가가 살짝 덮인 듯한 느낌이었다.
일은은 웃음을 흘렸다.
“역시 알아보는군.”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 올렸다.
슥.
선풍도골의 노인이 사라지고 사일천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래. 이것이 내 모습일세.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말일세.”
객옹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화산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자신은 여전히 일은에게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자책할 필요 없네.”
일은이 객옹에게 말했다.
“자네와 나는 그저 다를 뿐이니까.”
“흥.”
객옹은 코웃음을 흘렸다.
“자책한 적 없다. 내가 왜 무의미한 자책 따위를 한단 말이냐?”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잠시 회한에 잠겼을 뿐, 자책에 빠질 시간이 있다면 상대에게 지풍이라도 한 방 더 날리는 사람이 바로 객옹이다.
“그렇군. 내가 어리석은 말을 했네.”
일은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그러면 이제 자네의 검을 보여 주겠나?”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일은이 물었다.
“네.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눈을 빛내며 운현이 말했다.
그것은 창룡전에서 그가 ‘검을 보여 달라’고 했을 때부터 이미 준비되어 있던 대답이었다.
세 사람은 저택 뒤의 공터로 자리를 옮겼다.
본래 후원에서 하려 했으나 객옹이 반대했고, 운현도 박 공공이 머물게 해 준 저택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현과 일은이 마주 서고, 객옹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쏴아아.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갔다.
운현은 자신의 검, 미명을 들고 있었지만 일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괜찮습니까?”
일은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네.”
슥.
일은은 한 손을 들어 올려 운현을 향했다.
“언제든지 오게.”
“네.”
운현은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일은을 앞에 두었다는 흥분도,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한 놀라움도 차분히 가라앉았다.
운현은 검을 뽑았다.
스릉.
“그럼, 가겠습니다.”
말하는 것과 동시에 운현이 한 발을 앞으로 대디뎠다.
그리고 크게 검을 그어 내렸다.
후욱.
그건 무척이나 단순한 검로였다.
하지만 지켜보던 객옹은 알 수 있었다.
저 검은 피해서도, 막아서도 안 된다는 것을.
스륵.
일은은 두 손을 뒤로 하며 가볍게 운현의 검을 피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운현의 검은 생각지도 못한 기이한 검로를 그리며 일은을 향해 짓쳐 들었다.
‘음!’
일은의 표정이 굳었다.
그것은 일은의 대응을 완벽히 예측한 듯한 검로였다.
조금 전의 일검을 피한 동작이 오히려 족쇄가 되어, 운현의 검 앞에 자신을 가져가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일은은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한 번 더 피하려면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다음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말 그대로 외통수에 몰려 버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일은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럴 수는 없지.’
일은은 허리 뒤로 돌리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이 푸른 옥빛으로 물들며 나지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우웅.
지켜보던 객옹이 순간 눈을 크게 부릅떴다.
‘저것은!’
그것은 분명 독기공이었다.
일은이 독기공을 익혔을 것이라는 객옹의 추측이 옳았던 것이다.
짓쳐 드는 미명의 칼날을 향해 일은은 서슴없이 손을 뻗었다.
칭.
맨손과 칼날이 맞부딪히며 짧은 충격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일은은 세상이 빙글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일은은 즉시 다른 손을 품에 넣었다.
피피핏.
날카로운 기세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카앙.
운현의 검 미명이 그중 하나를 걷어 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가 객옹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쉬익.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섬뜩한 기세를 흘리며 날아오는 그것을 향해 객옹은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맨손이었다.
퍽.
객옹의 손은 멀쩡했다.
어느새 그의 손에 붉은빛의 독기공이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륵.
객옹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철전 하나가 은은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사박.
그사이 일은이 땅에 내려섰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운현에게 말했다.
“미안하네. 몇 합 정도는 공격하지 않으려 했는데 나도 모르게 손을 쓰고 말았군.”
그건 선배로서 베풀려고 했던 일종의 배려였다.
하지만 첫 일합이 끝나기도 전에 손을 쓰고 말았으니 일은도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되면 일단 무엇이든 날리고 보라는 게 스승님들의 가르침이셨거든.”
“막무가내로군.”
객옹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하지만 일은은 놓치지 않고 객옹을 돌아보았다.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만…….”
객옹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거친 세상을 살아가려면 반드시 새겨들어야 할 좋은 충고지.”
일은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운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훌륭하군. 내가 예전에 당한 것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운현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혹시 검성과 비무를 하셨습니까?”
검성 이검학은 운현의 이 검을 받아 냈다.
‘태극혜검과 인연이 있었다’고 말했으나 본질적으로 운현의 검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일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이번엔 내 쪽에서 가겠네.”
슥.
그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나지막한 울음이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우우웅.
객옹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어느새!’
낮은 울음을 흘려내고 있는 그것들은 바로 사방에 떠 있는 작은 철전들이었다.
철전들은 푸른 옥빛 기운을 머금고 팽이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허공에 떠 있었다.
조금 전 사방으로 날린 철전들은 그저 임기응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심하게.”
탓.
일은은 운현에게 대답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싶은 순간 이미 일은은 운현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콰과곽.
일은의 손에는 어느새 작은 소검이 쥐어져 있었다.
허공에서 회전하던 철전들도 운현을 향해 사방에서 쏘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운현은 당황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츠즈즈즈.
운현의 발밑으로 하얀 서리가 번져 나갔다.
그리고 운현의 검, 미명이 조용히 움직임을 시작했다.
스륵.
마치 바람이 불고 세월이 흐르듯 운현의 미명은 하나의 검로를 그려 나갔다.
그 무엇보다 부드럽고 연약해 보이지만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검.
그것은 백호실전검의 두 번째, 바로 유검(柔劍)이었다
후우웅.
운현의 검은 짓쳐 드는 철전들을 스쳐 지났다.
그리고 그때마다 섬뜩한 기세를 품은 철전들은 거짓말처럼 그 방향을 바꾸었다.
스스스슥.
놀랍게도 십여 개가 넘는 철전은 아무런 결과도 내지 못하고 운현을 지나쳐 버렸다.
목표를 잃은 철전들이 무서운 기세로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쉭.
철전 하나가 객옹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하지만 객옹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눈은 일은의 소검과 막 부딪히려는 운현의 미명에 못 박혀 있었다.
스윽.
아니나 다를까? 운현의 검은 그대로 일은의 소검을 지났다.
일은의 소검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듯이.
꾹.
객옹이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었다.
이대로라면 일은의 패배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슥.
일은의 왼손이 운현의 검 끝에 닿았다.
두 손가락을 세워 검결지를 취한 일은이 미명의 검끝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댄 것이다.
일은은 자신의 검결지를 부드럽게 옆으로 움직였다.
사락.
놀랍게도 미명의 검 끝은 일은의 검결지를 따라 흘렀다.
그것은 비록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미명의 검 끝을 일은에게서 돌리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검결지와 미명이 일은에게서 벗어난 순간.
콰앙.
검결지가 검 끝을 떠나는 것과 동시에 폭음이 울려 퍼졌다.
운현의 검과 일은의 검결지에 내재되어 있던, 비록 검기처럼 형상화되지는 않았으나 분명히 존재하던 내력이 그제야 터져 나갈 곳을 찾은 것이다.
콰과과곽.
폭풍 같은 기세가 사방을 휩쓸었다.
나뭇가지가 태풍을 만난 듯 흔들리고 풀잎과 흙먼지가 이리저리 휘날렸다.
하지만 객옹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살은 찌푸렸지만 객옹은 운현과 일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잠시 후, 흙먼지가 천천히 가라앉고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단하군.”
일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에게는 상처 하나 없었다.
운현의 유검을 피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왼쪽 소매는 그렇지 못했다.
슥.
일은은 왼손을 들었다.
찢겨져 너덜너덜해진 옷소매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거, 비싼 건데.”
일은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이 물씬 묻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