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화. 일인지하 만인지상
북경 자금성.
박 공공은 문연각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궁과 조정은 물론 천하를 통틀어도 박 공공을 기다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박 공공의 표정은 사뭇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문연각 앞의 장방형 호수를 바라보던 박 공공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눈에 익은 한 문사가 전각 모퉁이를 돌아 이곳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운현이었다.
슥.
박 공공은 뒤에 서 있는 태감과 금의위 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은 즉시 박 공공에게 예를 표한 후 물러갔다.
물러갔다 해도 멀리 가지는 않겠지만 상관없었다.
그저 박 공공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족했다.
두 손을 모은 박 공공은 빠른 걸음으로 운현에게 걸어갔다.
탁탁탁.
박 공공의 입가에는 벌써 미소가 번져 가고 있었다.
“운 학사님.”
“아, 박 공공.”
운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래 기다렸나? 굳이 기다릴 필요는 없었는데.”
“괜찮습니다. 어차피 한가했으니까요. 창룡전은 여전하지요?”
“여전했네. 건물도, 사람도 말일세.”
박 공공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렇겠지요. 그곳은 특별히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했으니까요. 물론 건드리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만…….”
창룡전은 자금성 안에 있는 외딴섬과 같은 곳이다.
그곳에 눈길을 돌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고맙네.”
운현이 박 공공에게 말했다.
박 공공은 고개를 저었다.
“천만에요. 그보다 문연각에는 가 보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운현은 눈을 들어 문연각을 바라보았다.
황실 서고인 문연각.
잡서들과 함께 보냈던 나날들이 눈앞에 스쳐 갔다.
그러나 지금 운현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조금 전 만난 사일천, 곧 일은과 나눈 대화였다.
“……제가 그 책을 찾아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운현은 조용히 일은에게 물었다.
조금 전 일은은 백호전 학사의 책, ‘보고서’라 부르던 책을 찾아낸 유일한 사람이 바로 운현이라고 말했다.
“그건 그 책을 숨기셨다는 의미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네. 숨기고자 했다면 아무도 범접치 못할 곳에 묻었을 것이고, 드러내고자 했다면 문연각의 잡서들 사이에 두지 않았을 테니까.”
일은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사실 자네가 듣고 싶은 건 그 책이 ‘문서’인가 하는 것 아닌가?”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아닐세.”
일은은 순순히 답했다.
운현이 나지막이 탄식을 흘리는데 일은이 말을 이었다.
“허나 이제는 ‘문서’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
운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되었다고요?”
“그렇다네.”
일은의 말을 운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황제가 거하는 곳이 황궁이겠나, 아니면 황궁에 거하는 사람이 황제겠나?”
그의 말은 조금 난데없었지만 운현은 그 의미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제가 이 자리에 섰기 때문에 그 책을 ‘문서’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군요. 황제가 거하는 곳은, 설령 그곳이 초가삼간일 지라도 황궁이라 불려야 마땅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지.”
일은은 말을 이었다.
“자네가 ‘문서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제 그 책은 능히 ‘문서’라 불릴 수 있을 걸세. 허나 다른 사람이 그 책을 손에 쥔다면 여전히 문연각에 쌓인 잡서들 중 하나일 뿐이겠지.”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것 아닐까요?”
“인과는 항상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네.”
일은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때로는 결과가 원인을 만들어 내기도 하지. 사람들도 종종 말하지 않는가? ‘나는 이것을 위해 이제껏 살아온 것이다’라고 말일세.”
태어나면서부터 삶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삶의 목적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자신이 태어난 이유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 된다.
비록 다른 사람은 납득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운명이라고 하지.”
운현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운명’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덮어 버릴 생각도 없었다.
“일대상인과 대적하는 것이 제 운명이라는 말씀입니까?”
“아니네.”
일은은 고개를 저었다.
“내 어찌 타인의 운명을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마는 자네의 운명은 그보다 더 먼 곳에 있네.”
부드러운 표정으로 일은이 말했다.
“내가 아는 어떤 분처럼 말일세.”
“운 학사님.”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운현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박 공공이 눈을 깜빡이며 운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굳이 문연각까지 들어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네.”
“그러신가요? 후후후.”
웃음을 흘리며 박 공공이 말했다.
“이렇게 있으니 마치 옛날로 돌아온 것 같군요. 가끔 저 안쪽 구석자리에서 졸고 계시기도 했었는데요.”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표정은 밝았다.
“그렇군. 옛날로 돌아온 것 같아.”
새삼 운현은 문연각을 돌아보았다.
고색창연한 건물도, 섬세하게 장식한 돌계단도 예전의 그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옛날로 돌아온 듯 느껴지는 것은, 변하지 않은 문연각 때문이 아니라 여전히 그대로인 박 환관이 옆에 있기 때문이다.
의형 일충현의 빈자리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느끼게 해 주는 것처럼.
“운 학사님.”
박 공공이 나지막이 말했다.
“황궁으로 돌아오지 않으시겠습니까?”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박 공공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운 학사님께서는 전하의 뜻을 충분히 완수하셨습니다. 황군을 일으키는 일 없이 영웅맹을 무너뜨리지 않으셨습니까? 게다가 영웅맹의 수괴들도 모조리 잡아들이셨고요.”
운현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염중부는 잡지 못했다네. 일대상인과 그 무리들도 그러하고.”
“허나 그들이 더 이상 나라의 우환이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황실이 우려한 것은 자칫 강호 무림을 잘못 건드려 온 천하가 시끄러워지고, 그 결과 황실의 위엄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운현이 아무런 분란도, 다툼조차도 없다시피 영웅맹을 무너뜨렸으니 황실은 더 이상 강호 무림에 대해 염려할 것이 없었다.
“이제 그들은 잔당에 불과합니다. 설령 그자들이 무언가를 도모한다 해도 사소한 분란밖에 안 될 것입니다.”
황실은 천하 권력의 정점이다.
크고 작은 민란이나 지역 분쟁 같은 것은, 적어도 황실의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사소한 분란에 불과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하려는 일은 절대 사소한 것이 아닐세.”
“사소합니다.”
박 공공이 단호하게 말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시면 천하의 그 무엇이라도 사소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권력을 쥔다는 의미니까요.”
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황태자가 언급했던 내각대학사나 전각대학사는 가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부를 만한 자리다.
게다가 박 공공이 함께하는 한 운현에게 불가능한 일은 사실상 없다.
“정히 그자들이 마음에 걸리신다면 추포령을 내리고 잊으십시오. 천하의 모든 관군이 그들의 뒤를 쫓을 것입니다. 운 학사님께서는 그보다 더 의미있는 일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네가 나를 너무 과하게 보는군.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닐세.”
“운 학사님은 너무 겸손하시군요. 어차피 누군가는 앉아야 할 자리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낫지요.”
박 공공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운현이 사양한다 해서 자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분명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과연 그가 운현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다른 사람에겐 몰라도 박 공공에겐 절대 아니었다.
“무림의 일은 그만하면 족합니다. 그러니 이제 이곳으로 돌아오시지요.”
박 공공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운현은 지긋이 바라보았다.
“……고맙네.”
운현은 온화한 미소로 말했다.
“내가 자네를 만난 것은 참으로 분에 넘치는 복일세.”
박 공공은 빙긋 웃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으시겠다는 뜻이군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전하께 말씀드렸듯이 내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네.”
“알겠습니다.”
박 공공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야 뭐, 늘 운 학사님의 뜻에 따를 뿐이니까요.”
운현은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운현이 박 공공에게 휘둘리는 것이 더 많았다.
박 공공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만 운 학사님께서 서찰 한 장 보내지 않으시고 어디론가 훌쩍 가 버리시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조금 염려는 됩니다만…….”
그건 왜 서찰을 자주 보내지 않느냐는 투정에 다름 아니었다.
대놓고 한숨을 쉬는 박 공공에게 운현은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말게. 내게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반드시 그 전에 자네에게 말할 테니까.”
박 공공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이시지요? 약속하신 겁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박 공공은 웃음을 흘렸다.
“후후훗. 그나마 좀 위안이 좀 되는군요.”
장난스러운 그 미소가 너무나도 따뜻해서, 운현의 입가에도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
운현은 마차를 타고 북경 교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박 공공이 마련해 준 이 저택은 대단히 비밀스럽고 안전한 곳이라고 했다.
그곳 후원에서 객옹이 운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벅, 저벅.
“어르신.”
후원으로 들어서며 운현이 말했다.
객옹은 운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가 일은이더냐?”
“네, 그렇습니다.”
객옹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가 너를 피하지 않았다니 다행이구나.”
달칵.
운현은 객옹 맞은편에 앉았다.
“피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너를 기다렸다고? 대체 왜?”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운현은 나지막이 말했다.
“운명에 대해 말하더군요.”
쏴아아.
부드러운 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잠시 침묵에 잠겼던 객옹이 다시 물었다.
“그리고?”
“내일 이곳으로 찾아온다고 했습니다.”
객옹의 눈이 크게 떠졌다.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제 검을 보고 싶다고요.”
황궁 한복판에서 검을 나눌 수는 없다.
일은이 찾아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 그렇구나.”
객옹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천하의 객옹조차도 일은이 찾아온다는 말에는 흥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슥.
객옹은 눈을 들었다.
그리고 운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겨라.”
“네?”
갑작스러운 말에 운현이 놀라 반문했다.
하지만 객옹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네가 나를 꺾었는데 일은에게 진다면 내가 그자보다 아래라는 뜻이 되지 않느냐? 나보고 그런 치욕을 당하란 말이냐?”
“아니, 그게…….”
일은이 더 강하다는 사실은 검성 이검학은 물론 객옹조차도 이미 인정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치욕이라니?
“지난번에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일은이 어르신보다 강하다고요.”
“내가 언제?”
객옹은 정색을 했다.
“그건 이검학이 한 말이다. 나는 일은이 강하다고만 했을 뿐이지.”
운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생각해 보니 ‘일은이 우리 중 가장 강하다’고 한 사람은 검성 이검학이었다.
객옹은 그저 일은이 대단히 강하다고만 했고.
하지만 어차피 같은 의미 아니었던가?
“그가 강한 것과 내 위인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객옹은 사뭇 심각했다.
“그러니 반드시 일은을 이겨야 한다. 알겠느냐?”
“저, 하지만…….”
“말은 필요 없다.”
단호한 어조로 객옹은 말했다.
“이겨라. 무조건.”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미 웃음으로 얼버무리기엔 한참이나 때를 놓친 후였다.
객옹의 눈동자는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