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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04화 (404/530)

404화. 노자는 주사 아래 숨었다[老聃伏柱史]

서찰의 내용을 확인한 운현은 즉시 객옹과 함께 방을 나와 기루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월향을 찾은 운현은 서찰에 관해 그녀에게 몇 가지를 더 확인한 후 기루를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운현과 객옹, 조관, 항장익은 마차를 타고 북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대인.”

조관이 나지막이 말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운현은 고개를 들었다.

“급히 박 공공을 만나고자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묻는 조관의 표정은 사뭇 걱정스러웠다.

그제야 자신이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운현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영웅맹이 무너진 것에 대해 정식으로 보고를 해야 할 때도 되었고…….”

따가닥, 따가닥.

흔들리는 마차에서 운현이 말했다.

“일은의 정체에 대해 짐작 가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조관뿐 아니라 객옹도 눈을 빛냈다.

운현은 분명 월향의 서찰과 말에서 단서를 잡은 듯했다.

하지만 옆에서 같이 보고 들은 객옹은 전혀 짚이는 바가 없었다.

“짐작 가는 것이 있다고?”

“네, 그렇습니다.”

“서찰에 적힌 내용에서 알아차린 것이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월향에게 자세한 내막을 확인해 보았지만 그녀가 일은을 만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고 일은의 행방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직접 보았으니 혹 알아차린 것이 있을까 했지만, 눈앞에 있는데도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신비한 인물이었다고 했다.

과거 객옹조차 일은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면 대은(大隱)은커녕 소은(小隱)조차 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냐?”

“표현은 그렇게 했지만, 대은도 소은도 아니라면 그것은 곧 중은(中隱)이라는 의미입니다.”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중은이라고?”

“옛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작은 은자는 숲과 언덕에 숨고, 큰 은자는 조정과 저잣거리에 숨는다[小隱隱陵藪 大隱隱朝市]는 것이지요.”

“그 구절은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조관이 말했다.

“진정한 은자는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의미로서, 등잔 밑이 어둡다는 뜻으로도 자주 인용되는 명구입니다.”

“조 대인의 말대로입니다. 그리고 후대의 또 다른 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운현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나는 소은도, 대은도 되지 못하니 차라리 중은이 되어 사관으로 숨어 살겠노라[不如作中隱 隱在留司官]고 말입니다.”

사관(司官)은 대개 하급 관인을 일컫는 말이다.

객옹은 눈을 빛냈다.

운현이 무엇을 알아차렸는지 객옹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일은이 관직에 있단 말이냐?”

“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따각, 따각.

말발굽 소리가 마차 안을 울렸다.

객옹은 회한 서린 눈빛으로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문득 조관이 말했다.

“그래서 대인께서 박 공공을 뵈려는 것이군요. 천하의 모든 하급 관인들을 조사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 될 테니 말입니다.”

천하는 넓고 방대하다.

고급 관료들도 그 수가 적지 않은데, 하물며 하급 관인들이라면 천하에 그 수가 가히 모래알처럼 많을 터였다.

“아닙니다.”

운현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천하의 하급 관인들을 모두 조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객옹이 물었다.

“처음에 말씀드린 옛 시에는 또 다른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노자는 주사 아래 숨었다[老聃伏柱史]라는 글귀입니다.”

“주사라니?”

“옛 관직의 이름 중 하나입니다. 주(周)나라 때 왕실의 장서실을 맡아 보는 관직인데, 당시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한직이었으나…….”

“결론만 말해라.”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객옹이 말했다.

운현은 얼른 답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황궁 서고인 문연각을 담당하는 관직입니다.”

“황궁!”

객옹은 탄식처럼 말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런 곳에 있으니 누구도 모를 수밖에. 게다가 황궁 서고의 관리라니…….”

“그러면 당장 문연각의 모든 학사와 관리 들을 감찰해야겠군요.”

조관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래. 그렇게 했다간 일은이 어딘가로 숨을지도 모른다.”

객옹도 운현에게 동의했다.

하지만 운현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쓴웃음을 지으며 운현이 말했다.

“옛 시에 그런 구절이 있다고 하여 일은이 반드시 그곳에 있으리란 보장은 없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제 추측일 뿐이지요. 아니, 사실은 억측일지도 모릅니다.”

대은이나 소은이라는 말은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다.

그러니 옛 시의 구절마다 본래 의도되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는 건 작위적이고 성급한 일이었다.

객옹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그래도 시도는 해 볼 만하지 않느냐? 우리에게 다른 단서가 없으니…….”

“일은의 정체에 대해 짐작 가는 것이 있다고,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요?”

담담한 목소리로 운현은 말을 이었다.

“조정에 숨은 이를 대은이라 하지만 한직이나 미관 말직은 따로 중은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제 짐작입니다만…….”

운현의 눈동자가 강하게 빛났다.

“일은은 아무래도 제가 아는 사람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운현의 말에 객옹이 눈살을 찌푸렸다.

일은의 정체가 운현이 아는 사람이라니?

조관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지 모르는 항장익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황궁에는 문연각 말고도 또 다른 서고가 있습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한 서고가 운현의 기억 속에 떠올랐다.

당시에는 형편없는 책들만 있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감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서고는 황태자의 개인 서고였기 때문이다.

“바로 창룡전이지요.”

“네가 학사로 있었다던 곳 말이냐?”

객옹의 말에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이제는 오래전 이야기였지만 그때의 일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했다.

어찌 운현이 그곳을 잊을 수 있으랴?

“제가 황궁을 떠날 때 창룡전의 선배 학사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운현이 말했다.

“꼭 심산유곡에 있어야만 세상을 피해 숨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마차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운현의 말처럼 그것은 어쩌면 억측이거나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객옹도, 그리고 조관도 운현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이 바로 일은일 거라는 생각을 말이다.

따각, 따각.

운현은 조용히 기억을 되새겼다.

황궁에서 보냈던 수많은 나날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이 또렷이 떠올랐다.

권력의 중심인 자금성 안에 있으면서도 노골적으로 천시받을 만큼 한직이었던 창룡전.

그 창룡전의 단 둘뿐이었던 학사 중 한 사람이자 운현의 유일한 선배였던 그는 바로 학사 사일천이었다.

***

눈앞에 ‘창룡전’이라 새겨진 현판이 보였다.

커다란 현판에 날아갈 듯 새겨진 그 글씨는 운현에게 남다른 감회를 떠올리게 했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보았고 심지어 심드렁해지기까지 했지만 그 세 글자는 운현에게 한때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오랜 기간 그것은 멍에와 굴레였으며, 이제는 잊을 수 없는 인연이기도 했다.

창룡검주라는 명호도 바로 여기서 가져온 것이니 정말로 깊은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감회에 젖어 있던 운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달칵.

그리 크지 않은 문을 지나 운현은 안으로 들어섰다.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이 운현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눈앞에 그가 있었다.

언제나처럼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서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학사는 바로 사일천이었다.

십여 년의 세월을 함께하고도 마지막까지 대하기가 쉽지 않았던 사람.

그가 아직도 이곳 창룡전에 있었던 것이다.

슥.

사일천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운현을 보고 놀라지도, 의아해 하지도 않았다.

“오랜만이군.”

담담하기까지 한 그 목소리는 예전과 너무나 똑같았다.

마치 시간이 과거로 되돌아간 것처럼.

운현은 살짝 헛웃음을 흘렸다.

“오랜만입니다.”

사일천을 똑바로 바라보며 운현이 말을 이었다.

“일은님.”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을 알아보지 못할 수가 있었을까?

매일 아침 십여 년간이나 이 사람을 보면서도 어떻게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수가 있었을까?

운현은 허탈감마저 느꼈다.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사일천은 마치 불가해한 경이를 보는 듯 오싹하기까지 했으니까.

“자책할 필요 없네.”

사일천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검성이나 독선조차 내 진면목을 꿰뚫어 보지 못했으니까. 자네가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면 아마 내 정체를 알아차렸을지도 모르지.”

황궁을 나가서 만난 검성 이검학은 운현이 처음으로 만난, 진짜 고수라고 인정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 이검학조차 일은의 정체를 알 수 없었으니 운현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그보다 자네가 여기에는 어쩐 일인가?”

사일천이 말을 이었다.

“강호 무림의 일대 종사로 우뚝 서서 천하를 종횡하며, 절세의 가인들과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기도 바쁠 텐데 말일세.”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또 어디서 나온 이야기입니까?”

“아닌가? 강호 무림에는 그런 소문이 자자하다던데.”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사일천이 말했다.

그의 말도 따져 보면 아주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운현이 겪은 그 많은 일들이 그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일이던가?

“저는…….”

운현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막상 말하려니 문득 목이 메어 왔다.

그 많은 시간들을, 그 소중하고도 안타까운 인연들을 무어라 말해야 할까?

“……그냥, 그럭저럭 지냈습니다.”

그 말 속에 담긴 사연의 무게를 운현도, 사일천도 모르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음을 가라앉힌 운현이 문득 물었다.

“……혹시 불영님의 시신을 수습하셨습니까?”

와불선사가 말하기를 선풍도골의 노인이 신승 불영의 시신을 소림에 전해 주었다고 했다.

혹 그 노인이 일은이 아닐까 운현은 추측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일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내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네.”

낮은 목소리로 사일천이 말했다.

“그래도 결국은 자신이 이겼다며 실실 웃더군. 정말……, 그 친구다운 일이지.”

신승은 두 태상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끝까지 시간을 끄는 데 성공했고, 빈사의 상태에 이르러서도 그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넘겨주지 않았다.

결국 신승은 두 태상이, 심지어 신승을 해치웠다는 성취감조차 갖지 못한 채 철저히 빈손으로 떠나게 만든 것이다.

바로 운현을 구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랬, 군요.”

운현은 제대로 말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가슴에서 솟아오른 슬픔은 이내 뜨거운 눈물이 되어 운현의 두 뺨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운현은 옷소매로 가만히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저를 계속 지켜보고 계셨습니까?”

“가끔 소식만 확인하는 정도였네.”

사일천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은 나를 ‘일은’이라 말하지만 내게도 해야 할 책무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자네에 대해서는 신경 써서 듣고 있었지.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나?”

미소를 머금으며 사일천이 말을 이었다.

“자네는 백호전 양 학사님의 책을 찾아낸 유일한 사람이니 말일세.”

운현은 눈을 크게 떴다.

사일천, 아니 일은이 말하는 ‘책’이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무림 방파에 전승되는 무공 근원의 통전적 접근에 관한 보고서.]

제대로 읽기조차 힘든 그 제목을 운현은 단번에 떠올릴 수 있었다.

대출조차 안 되는 문연각에서 그야말로 마르고 닳도록 읽어서 나중에는 자다가도 그 내용을 줄줄 암송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처음에는 그저 ‘보고서 검식’이라고 불렀던, 백호수련검 십이식이 기록된 책이 바로 그 ‘보고서’가 아니던가?

사일천은 운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더 이상 학사 사일천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일은의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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