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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403화 (403/530)
  • 403화. 대은(大隱)도 소은(小隱)도 아닌

    다소곳이 앉은 월향의 모습은 온화하고 아름다웠다.

    기품마저 느껴지는 그 자태는 어째서 그녀가 남경에서 여전히 손꼽히는 예기 중 한 명인지 분명히 보여 주었다.

    “몇몇 사람들은 저를 월주라고 부른답니다.”

    월향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제가 청풍명월루의 주인이라서가 아니라, 캄캄한 밤의 희미한 달처럼 그들에게 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에요. 제가 해 준 것은 그저 작은 도움일 뿐인데도…….”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조차 받기 힘든 것이 예인들의 삶이니까요.”

    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예인들이 어렵다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다.

    무한의 기루에서 전대 마두에게 겁탈당할 뻔했던 예향과 항주 취선루에서 뺨을 맞은 소월, 그리고 통판의 부총관에게 노골적인 위협을 당하던 월향의 모습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항주 취선루의 소월을 보셨으니 그 아이가 얼마나 칠현금에 뛰어난지 아시겠지요. 허나 대부분의 예인들은 그 재능을 꽃피우기도 전에 꺾여 버리고 만답니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요.”

    천시받는 예인들 속에서 남자 예인들의 삶은 더욱 어려웠다.

    마치 황궁의 시녀보다 환관들의 생활이 더욱 고달프듯 말이다.

    사락.

    월향의 하얀 손이 그녀의 가슴에 얹혔다.

    “저 또한 은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이 기루를 세우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예인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애쓰고 있어요.”

    운현은 왜 취선루의 소월이 월향을 소개했는지 알 것 같았다.

    월향이야말로 소월이 신뢰하는 진정한 삶의 스승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번에 대인께서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저희는 새로운 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을 거예요. 정말로 감사드려요.”

    월향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운현은 조용히 그녀가 말을 잇기를 기다렸다.

    “예인들 중에는 저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도 많아요. 하지만 한계가 있지요. 저조차 통판의 위협을 어쩌지 못하는데 누굴 도울 수 있을까요?”

    월향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어려움에 빠진 예인들을 돕는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의 곤란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자괴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잠시 침묵하던 월향이 눈을 들었다.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감히 부탁드려요. 저희를 도와주세요.”

    “그러지요.”

    월향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운현이 이렇게 서슴없이 승낙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제가 무얼 해야 합니까?”

    “어, 그게…….”

    당황하던 월향이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어쩌면 값싼 동정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운현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눈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데 고개를 돌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때로는 그 값싼 동정심조차 누군가에게는 아주 절실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건 취선루의 소월이 했던 말이었다.

    때로는 작은 도움이 누군가의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고 말이다.

    월향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네.”

    월향은 고개를 숙였다.

    예기로서 눈물을 보이긴 싫었으니까.

    “그래요. 정말로…….”

    슥.

    연화가 월향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월향을 내려다보는 연화의 표정엔 따뜻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잠시 후, 월향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죄송해요. 잠시 감정이 격해졌군요.”

    따뜻한 찻잔을 두손으로 감싸 쥐고 월향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희가 세상의 모든 예인들을 구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재능을 꽃피우기도 전에 타의에 의해 꺾이는 것만큼은, 적어도 제 손이 닿는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어요. 상대가 무림인이건, 부유한 상인이건, 혹은 권력을 등에 업은 관인이건 간에요.”

    “쉽지 않은 일이겠군요.”

    운현이 말했다.

    “네. 쉽지 않은 일이지요.”

    월향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니까 대인께서 저희의 보호자가 되어 주세요. 저를 도와주신 것처럼요.”

    운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호자라면…….”

    “어려울 때 버팀목이 되어 주시는 분이지요.”

    “그건 창룡맹의 힘이 필요하다는 뜻인가요?”

    “아니요.”

    월향은 고개를 저었다.

    “맹의 힘은 바라지 않아요. 아니, 송구하지만 믿을 수 없어요. 제가 믿는 분은 대인이세요.”

    운현은 월향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도와줬다는 사실을 내색하지도 않았다.

    만일 월향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끝까지 입 밖에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어찌 믿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 저희가 스스로 걸음을 뗄 수 있을 때까지만, 대인께서 저희의 보호자가 되어 주신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스스로 걸음을 뗄 수 있을 때까지’라는 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스스로 일어서겠다는 의지와 계획이 있는 것이다.

    지긋이 월향을 가만히 쳐다보던 운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확실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군요.”

    만일 세상의 모든 예인들을 도와 달라는 것이라면 운현은 거절했을 것이다.

    그건 운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월향이 말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운현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기꺼이 여러분의 보호자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달칵.

    월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운현에게 큰절을 올렸다.

    사락.

    머리 장식이 반짝이며 흔들리고 그녀의 고운 옷자락이 바닥을 덮었다.

    “대인의 은혜가 감히 감당할 수 없사오니 참으로 각골난망입니다.”

    고개를 든 월향이 운현을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고마워요.”

    그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월향의 고운 눈동자는 곧 눈물로 젖어 들고 말았다.

    ***

    “그럼 편히 쉬세요.”

    월향이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운현은 미소로 그녀에게 답했다.

    “감사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계산을 안 했더군요.”

    운현의 말에 월향은 배시시 웃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의 모든 것은 이제 대인의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그건 대단히 파격적인 말이었다.

    옆에 있던 연화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며 월향을 쳐다보는데, 운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감사합니다. 어쩐지 득을 본 기분이네요.”

    그 말에 월향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탁.

    월향과 연화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운현은 객옹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보십니까?”

    “영악하게 이해타산에만 집착하는 아이는 아니다.”

    객옹은 찻잔을 들며 무심히 말했다.

    “창룡맹의 위세나 힘을 원하지 않고 너 개인의 보호를 바랐으니까.”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객옹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허나 결코 미련한 아이도 아니지. 네 힘도 지위도 권력도 아닌 네 마음을 원했으니 말이다.”

    운현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만, 제 호의를 원한 것은 확실히 의외였지요.”

    “또한 대단히 치밀하고 현실적인 아이기도 하다. 무작정 도움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더냐?”

    잠시 차를 음미한 객옹은 말을 이었다.

    “주요 도시에 기루를 세워 세를 키우고, 예술품 매매를 통해 귀족층에 영향력을 확보한다는 착안은 그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전문적으로 예인을 키우겠다는 것도 좋은 생각이지. 풍요로운 시대에는 누구나 오락 거리를 찾기 마련이니까.”

    월향은 운현과 객옹에게 그녀가 이제껏 해 온 일들과, 앞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모두 말했다.

    보호자가 되겠다고 말한 운현에게 그녀가 숨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군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의 말을 듣다가 생각난 것이 있다.”

    객옹은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예전에 당문에서 기루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려던 적이 있다.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데다 기루에서 나오는 이야기라는 것이 결국 떠도는 소문 수준이라 폐기되었지.”

    그건 손녀 당설련이 해 준 이야기였다.

    당시 당설련은 뻔한 결과조차 예측하지 못한 당문의 어른들을 비웃었다.

    그런 정보라면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허나 만일 대상을 특정한 계층으로, 예컨대 부유한 상인이나 고위 관료들로 한정한다면 제법 괜찮을 것도 같구나.”

    운현은 눈을 크게 떴다.

    객옹의 말은 확실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사람이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객옹이 말했다.

    “중심이 될 사람이 없으면 그 어떤 조직이라도 와해되기 마련이다. 반면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는 사람만 있다면 설령 도적 떼와 유랑민들이라 해도 나라를 세우지 않더냐?”

    그 말에 운현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조직 앞에서 개인은 무의미하기도 하지만, 때로 단 한 사람 때문에 조직의 명운이 갈리기도 한다.

    “월주는 이상적이다. 꿈을 절대 포기하지 못할 정도로. 그러면서도 똑똑하지. 아마 현실에 맞서서 영리하게 싸울 수 있을 게다.”

    운현은 살짝 놀랐다.

    사뭇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객옹의 말은 엄청난 칭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군요.”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방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런 기루를 사려면 얼마나 들까요?”

    “왜?”

    “일전에 총군사가 말하기를 예산이 세상을 지배한다던데, 기루가 몇 채 더 있으면 훨씬 낫지 않을까 해서요.”

    제아무리 청풍명월루가 남경에서 손꼽힌다 해도, 이것 단 하나뿐인 것과 여러 기루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은 크게 다르다.

    잡을 수 있는 기회는 물론이고 감내할 수 있는 위험 부담까지 말 그대로 천지차이인 것이다.

    “그렇겠지. 허나 기루의 가격 같은 건 모른다. 적어도 은자 몇 냥으로는 안 되겠지.”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은자 몇 냥은 너무했다.

    “염중부가 옮기던 짐마차에 가치 있는 것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영웅맹의 모든 것을 실은 염중부의 짐마차 오십 대는 운현에게 하사되었다.

    운현은 대강의 목록만 받은 채 총군사 영호준에게 맡겨 놓은 상태였다.

    “그 중에 여덟 대 정도면 꽤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여덟은 재물을 번다는 것과 비슷한 발음이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숫자였다.

    “아홉으로 해라. 오래가는 것이 더 좋으니까.”

    아홉은 오래 산다는 단어와 소리가 유사했다.

    “그럼 총군사에게 마차 아홉 대를 보내라고 하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귀중품이나 예술품 같은 것도 있던데 같이 처분을 맡기면 좋겠군요.”

    “그러든가.”

    객옹은 더 이상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운현은 아홉 대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운현은 물론 객옹도 몰랐다.

    염중부가 영웅맹에서 가장 귀하고 값진 것들만을 모아 실은 오십 대의 짐마차는, 단 한 대만으로도 청풍명월루를 몇 채는 살 수 있을 정도로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보다 열어 봐야 하지 않겠느냐?”

    객옹의 시선은 운현 앞에 놓인 얄팍한 서찰에 향해 있었다.

    “네. 열어야지요.”

    사락.

    운현은 서찰을 들었다.

    이 안에 어쩌면 일은에 대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사뭇 긴장이 되었다.

    서찰을 꺼내던 운현은 멈칫했다.

    “왜?”

    객옹이 물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혹시 ‘남의 말은 믿을 것이 못 된다’라고 쓰여 있는 건 아닌가 해서요.”

    객옹은 눈살을 찌푸렸다.

    중요한 순간에 무슨 소리냐는 질책이었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하고 천천히 서찰을 열었다.

    바스락.

    서찰이 펼쳐지고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빛났다.

    “……역시.”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월주는 일은에 대해 알고 있었군요.”

    서찰에는 단아한 필체의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운현이 찾는 사람은 바로 ‘일은’이며, 예전에 그를 만난 적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그의 행방이나 정체에 대해서는 월향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언젠가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그분을 일은이라 하지만 자신은 대은(大隱)은커녕 소은(小隱)조차 되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

    눈살을 찌푸리며 객옹이 물었다.

    그러나 운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찰에 쓰인 그 단아한 서체를, 운현은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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