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402화 (402/530)

402화. 월향의 대답

남경.

남경부 앞에 커다란 방문(榜文) 한 장이 붙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방문이 붙는 곳이었지만 이 방문만큼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자그마치 남경의 부승 서개강이 파직당하고 투옥된 사실이 공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부승이?”

“이게 무슨 일이지?”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수군거렸다.

부승 같은 고위 관료가 파직당한 것은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대도시 남경의 실세이자 다음 부윤이 확실하다던 그가 어떻게 하루 만에 죄인이 되었는지 사람들은 놀라고 궁금해했다.

그러나 내막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모를 꾸몄다던가, 양민을 죽이고 사욕을 채웠다던가 하는 소문도 무성했지만 그저 추측일 뿐이었다.

그 탓에 서개강의 사촌인 통판 서극윤 역시 파직당하고 옥에 갇혔다는 사실은, 그 부총관과 하인들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렇게 대도시 남경의 부승과 통판은 하루아침에 실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소식은 즉시 청풍명월루에도 전해졌다.

“언니!”

연화가 빠른 걸음으로 월향에게 걸어오며 말했다.

“소식 들었어요?”

“연화야.”

월향은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큰 소리 내지 말라고 했잖니. 걸음도 가능하면 얌전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연화는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놀라지 마세요. 그 통판과 부승이…….”

“나도 들었어.”

월향이 나지막이 말했다.

“아, 그래요?”

연화는 살짝 김이 빠진 듯했지만 곧 눈을 빛내며 말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일까요? 혹시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요?”

“글쎄? 나도 모르겠구나. 아직 흘러나온 이야기도 없고.”

기루는 온갖 비밀과 소문들이 떠다니는 곳이다.

술과 풍류에 취한 사람들은 가슴속에 묻어야 할 이야기들도 쉽게 밖으로 꺼내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

당장 이번 일의 내막을 알 방법은 없었다.

“어쨌든 잘됐어요.”

연화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더 이상 그놈에게 시달리지 않아도 되잖아요.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최악의 경우까지 각오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그것도 통판만 아니라 부승까지 단번에 날아갈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래.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월향은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연화가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요?”

연화가 의아한 표정으로 월향이 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바로 운현과 객옹이 있는 방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다른 손님이 그분들을 찾아왔지요?”

지금 운현과 객옹은 손님과 함께 있다.

여유 있는 집안의 공자 같은 차림이었지만 연화는 그의 눈빛과 분위기가 사뭇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시 무림인일까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월향이 말했다.

“아니. 아마도 관인일 거야.”

월향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보아 왔다.

게다가 남경에는 관인이 흔해서, 운현과 객옹을 찾아온 손님의 독특한 분위기를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관인이다. 그것도 일반 관료나 무관이 아닌, 남다른 관직에 있는 사람 말이다.

“그래요? 무림 고수에게 관인이 찾아오다니, 신기한 일이네요.”

연화는 무심하게 말했다.

하지만 월향은 운현과 객옹이 있는 방에서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

감찰어사 조관은 바깥을 쳐다보며 말했다.

“경치가 좋은 곳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운현은 빙긋 웃었다.

하지만 곧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보다 추포령만 거둬도 되었을 텐데요.”

“그럴 수 없었겠지요.”

조관은 운현은 돌아보며 말했다.

“감히 대인께 대한 추포령을 내리려던 자이니, 동창으로선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박 공공께서 크게 노하기라도 하시면 동창의 남경 지부는 말 그대로 날아가 버리고 말 테니까요.”

결과적으로 동창의 대응은 적절했다.

황궁에서 이 일을 보고받은 박 공공의 표정이 무참하게 일그러지고 있었으니까.

“통판에 대한 감찰은 도찰원에 건의했습니까?”

“네. 허나 이미 동창으로 넘어간지라 그쪽에서 조사할 것입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랫사람을 시켜 무고히 양민을 끌고 가려 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진사(進士) 된 자를 때리고 창고에 가둔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감히 나라의 사대부에게 패악을 저질렀으니 반드시 전모를 밝혀 그 죄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전시를 통과한 진사는 설령 관직에 임명받지 못하더라도 엄연한 사대부요 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지식 계급이다.

황법에 의해 정식으로 재판을 받지 않고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통판과 그 부총관의 행동은 심각한 범죄 행위였다.

“알겠습니다. 반드시 그리되도록 하겠습니다.”

조관은 운현의 뜻을 받들었다.

“감사합니다. 어사대인께서 수고를 하시겠군요.”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조관은 새삼 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승이 추포령을 내리려는 사실은 남경부에 있던 조관에 의해 즉시 운현에게 전해졌다.

만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특별감찰어사의 신분과 박 공공의 위세를 앞세워 남경부를 발칵 뒤집었을 것이다.

아무리 특별 감찰어사로서 운현의 책무가 영웅맹과 일대상인에 대한 것이라 해도 명분이야 어떻게든 만들기 나름이다.

설령 전혀 무관하다 해도 그 행동을 탓할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월향이라는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영웅이 되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운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인께서 육부의 관직에 오르셨다면 청렴하고 올곧은 관리가 되셨을 겁니다.”

조관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운현은 통판의 혐의에 대한 도찰원의 감찰과, 자신에 대한 불법적인 추포령의 철회만을 요청했다.

고작 통판의 부총관이 주인의 위세를 믿고 함부로 패악을 저지른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다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국가의 권력을 경솔히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아마 현직에 있었다면, 융통성이 없다며 위아래로 원성을 사서 일찌감치 짐을 싸야 했을 겁니다.”

그 말이 그저 농담이 아님을 잘 아는지라 조관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곳엔 더 계실 겁니까?”

“당분간은 있으려 합니다.”

운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위험이 사라졌으니 다시 차분한 대화를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군요.”

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수군도독이 왜 안 오느냐고 항의 아닌 항의를 했습니다. 딸이 날마다 조른다더군요.”

노련한 수군도독도 딸자식은 이기지 못하는 듯했다.

운현은 객옹에게 물었다.

“시간이 적당하니 오늘 갔다 오는 것이 어떨까요?”

마침 큰일도 끝났으니 여유가 있었다.

객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러면 지금 함께 가시지요.”

운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객옹도 일어서고 세 사람은 함께 방을 나섰다.

달칵.

방을 나오자 계단 앞쪽에 월향과 연화가 서 있었다.

월향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가시는 건가요?”

운현은 미소로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저녁 후에 다시 돌아오려 합니다.”

“그러시군요.”

월향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시면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와 할 이야기가 있던 운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락.

월향이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녁에 다시 뵙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운현도 그녀에게 답례를 하고, 세 사람은 넓은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연화는 여전히 객옹을 경계하고 있었지만, 월향의 시선은 운현의 뒷모습에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

수군도독 진림의 딸, 아령은 운현과 객옹의 방문을 대단히 기뻐했다.

겉으로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객옹도 그리 불쾌하진 않았는지 꼭 달라붙은 아령을 피하지 않았다.

오후 내내 아령과 함께 지낸 운현 일행은 진림의 권유에 따라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아쉬워하는 진림과 아령을 뒤로하고, 운현 일행은 다시 남경 시내로 향했다.

돌아온 운현과 객옹을 맞이한 것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청풍명월루였다.

“사람이 많아졌군.”

객옹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방 바깥에서 음악과 웃음소리가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군요.”

대답하던 운현은 문득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말을 떠올렸다.

통판이 사라지자 활기가 넘치는 이곳의 모습은 어쩐지 공교롭기까지 했다.

달칵.

찻잔을 들던 운현은 문득 방 밖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조용히 문이 열렸다.

사락.

곱게 차려입은 월향과 날카로운 눈빛의 연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으로 들어오려던 월향은 순간 흠칫하며 연화를 돌아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목 주변 옷깃을 만지는 월향의 모습에 운현은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으흠.”

자신의 실태를 깨달았는지 월향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사박, 사박.

그녀의 걸음은 단아하고 기품이 느껴졌다.

운현과 객옹 앞에 선 월향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머리장식이 불빛 아래 흔들리며 반짝였다.

“청풍명월의 주인인 월향이라 합니다.”

그녀의 인사는 새삼스러웠다.

운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무언가 말하려는데, 월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강호 무림에 그 명성이 높으신 창룡검주님을 뵙게 되어.”

천천히 고개를 들며 월향이 운현에게 말했다.

“참으로 영광이에요.”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숨기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운현의 말에 월향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니에요. 대인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의 이름을 감추지 않으셨으니까요. 그저 제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뿐이지요.”

눈앞에 보이는 젊고 온화한 인상의 문사와, 강호 무림에 소문이 자자한 창룡검주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혹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해도 그저 동명이인으로 여기고 말 것이다.

신승의 사제이자 일대 정파맹인 창룡맹의 맹주는, 보통 사람에게는 마치 구름 위의 신선 같은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우선 앉으시지요.”

운현이 자리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월향은 가볍게 감사의 예를 표한 후 운현과 객옹의 맞은편에 앉았다.

바스락.

문득 월향이 품에서 얇은 서찰을 꺼냈다.

“이것은 일전에 물으신 것에 대한 제 대답입니다.”

월향은 얇은 서찰을 운현 앞에 내려놓았다.

운현이 물었다는 것이라면 하나뿐이다.

‘소(簫)를 대단히 잘 불고, 천하에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강한 사람을 아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운현은 물끄러미 그 서찰을 쳐다보았다.

예전에 물을 때는 말을 돌리던 그녀가 왜 갑자기 대답을 주는 것일까?

“어째서인가요?”

“첫째는 대인께서 저희를 어려움에서 건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월향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통판 서극윤과 부승 서개강의 파직은 대인께서 하신 일이지요?”

그것은 어렵지 않은 추측이었다.

운현이 창룡검주이자 창룡맹의 맹주임을 깨닫는 순간, 이 모든 일이 그가 한 일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비록 운현이 특별 감찰어사라는 것을 모르더라도 말이다.

“조금 다릅니다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서 있던 연화는 살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월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역시 그랬었군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했느냐고 월향은 묻지 않았다.

운현은 월향에게 말했다.

“첫째라고 하셨는데, 둘째는 무엇인가요?”

월향은 운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가 불빛 아래 반짝였다.

“지금부터 제가 드릴 말씀을, 어떠한 조건이나 전제 없이 들으시길 원해서예요.”

그건 운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볼모로 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그 답을 적은 서찰을 운현에게 먼저 내어 준 것이다.

운현은 가만히 월향을 쳐다보았다.

아름답고 기품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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