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401화 (401/530)

401화. 당랑거철(螳螂拒轍)

남경 시내, 청풍명월루.

아직 한낮인데도 운현과 객옹은 청풍명월루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이 누각에서 가장 높고 전망이 좋은 방이었다.

당연히 제일 비싼 곳이기도 했지만 월향은 돈에 대한 것은 입 밖에도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운현과 객옹이 예인이나 기녀를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조용히 차를 음미하거나 혹은 지필묵을 빌려 서찰 같은 것을 쓰는 것이 다였다.

“괜찮겠어요?”

사박, 사박.

복도를 걸으며 연화가 말했다.

“통판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이곳 청풍명월의 주인, 월향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겠지.”

집요하고 탐욕스러운 그 서극윤이 그냥 넘어갈 리는 없었다.

“어떻게 할 건가요?”

월향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글쎄? 정히 어쩔 수 없으면 짐 싸서 다 함께 떠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연화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건 엄청난 시간과 재산의 손해를 의미했다.

통판의 괴롭힘 하나 때문에 감수하기엔 지나치게 큰 희생이다.

하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괜찮아.”

문득 월향이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오라는 데는 없지만 갈 곳은 많거든. 너희 정도야 얼마든지 먹여 살릴 수 있단다.”

월향은 자신 있다는 듯 봉긋한 가슴을 내밀었다.

하지만 연화의 표정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월향이 얼마나 큰 수고와 희생을 감수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예요?”

연화가 턱짓으로 한 방을 가리키며 물었다.

운현과 객옹이 있는 곳이었다.

“피하게 하든지, 도움을 요청하는 게 낫지 않아요?”

“음, 그렇긴 하지만.”

부드럽게 웃으며 월향은 말했다.

“그냥, 어떻게 되나 보고 싶어져서 말이야.”

지금의 상황은 결코 ‘보고 싶어서’라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말하는 월향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후우, 알았어요.”

연화는 그녀의 생각을 바꿀 수 없음을 알았다.

“하지만 저 사람들과 있을 때는 꼭 제 뒤에 계세요.”

월향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염려하는 연화의 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알았어.”

두 사람은 곧 운현과 객옹이 있는 방 앞에 도착했다.

연화는 잠시 심호흡을 한 후 손을 뻗어 방문을 열었다.

달칵.

운현은 이미 고개를 돌려 연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객옹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연화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사박.

그사이 월향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들어서려 했다.

휙.

연화는 즉시 손을 뻗어 월향을 뒤로 잡아당겼다.

“꺅.”

놀란 월향이 작은 비명을 질렀지만 연화는 눈빛 하나 변하지 않았다.

객옹을 주시한 채 연화는 나지막이 말했다.

“항상 제 뒤에 계시라고 말했잖아요.”

그녀는 아직도 객옹을 경계하고 있었다.

연화에게 객옹은 호의나 적의에 무관하게 무조건 가까이 가지 않는 편이 좋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정작 월향은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갑자기 잡아당기지 말라니까아.”

훤히 드러난 어깨를 애써 가리며 월향은 말했다.

그녀의 뺨은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크흠.”

운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정작 사건의 원인이랄 수 있는 객옹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차를 음미하고 있을 뿐이었다.

***

이른 아침, 남경.

부승 서개강은 여느 때처럼 자신의 집무실에서 정무를 시작했다.

각 부처에서 올라온 보고를 살피던 서개강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 전 자신이 명령한 추포령에 대한 보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음?’

서개강은 혹시나 싶어 다른 서류를 살폈다.

하지만 추포령에 대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완전히 누락되어 버린 것이다.

‘감히 추관 주제에…….’

서개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직접 명한 일을 무시해?’

남경의 사법을 담당하는 추관은 평소에도 깐깐하고 반항적이었다.

그래서 서개강의 분노는 더 컸다.

서개강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보좌관에게 말했다.

“가서 추관더러 당장 튀어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보좌관은 고개를 숙이고는 즉시 밖으로 나갔다.

서개강은 인상을 쓴 채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한 번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줘야겠군.’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추관 정도는 얼마든지 날려 버릴 수 있다.

이 기회에 남경을 실제로 다스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단단히 각인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

아랫사람이란 언제든지 딴생각을 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흥.”

툭.

서개강은 서류를 던져 놓고 곧 도착할 추관을 기다렸다.

하지만 추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보좌가 가져온 것은 ‘추포령은 부윤의 명에 의해 취소되었다’는 믿을 수 없는 말뿐이었다.

“뭐라고?”

와락 눈살을 찌푸리며 서개강이 되물었다.

“분명 부윤의 명에 의해 취소했다고 했더냐?”

“네, 그렇습니다.”

보좌는 고개를 깊이 숙이며 말했다.

부윤은 남경의 최고 책임자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무를 부승 서개강에게 맡기고, 관직에서 물러날 날만 기다리던 그가 대체 왜 갑자기 개입한단 말인가?

보좌는 서개강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또한 추관은,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은 부승께 아무것도 할 말이 없으니 뵐 필요도 없다 하였습니다.”

으드득.

서개강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추관의 방자함을 혼내 주는 건 두 번째 문제였다.

덜컹.

서개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윤을 만나야겠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서개강은 말했다.

그 목소리에 상급자에 대한 공경 같은 건 털끝만큼도 없었다.

달칵.

서개강은 부윤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오, 부승 아닌가?”

난초를 돌보던 부윤 주덕일이 웃음을 지으며 서개강을 맞이했다.

그는 남경의 최고 책임자인 부윤이라기보다는 동네의 온화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실제로 반쯤은 그랬다.

대부분의 정무를 부승 서개강에게 맡기고 집무실에서 난초나 매만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쪽으로 와서 앉게.”

“……감사합니다.”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서개강은 자리에 앉았다.

주덕일은 화분의 위치를 살짝 정돈한 후, 찻주전자를 들어 차를 따랐다.

또르르륵.

“차가 자네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 허허허.”

“날이 좋은데 어찌 집무실에만 계십니까? 어디 나들이라도 가시지요.”

툭 던지듯 서개강이 말했다.

그건 부윤 주덕일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하는 일 없이 지낸다고 비꼬는 말이었다.

“허허, 노는 것도 다 힘이 있을 때 얘기지. 이 나이 되면 하루하루 말썽 없이 지나는 게 그저 유일한 바람이라네.”

달칵.

찻잔을 놓은 주덕일이 서개강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바쁜 자네가 여기까지 무슨 일인가?”

“제가 내린 추포령을 거두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서개강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상대를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돌려 말하는 것도, 상급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도 없었다.

하지만 주덕일은 빙긋이 웃었다.

“후후, 추포령이라…….”

찻잔을 들어 올리며 그가 말했다.

“지금 자네가 그런 걸 신경 쓸 때인가?”

서개강의 눈썹이 꿈틀했다.

후룩.

주덕일은 소리를 내며 차를 마셨다.

서개강은 눈살을 찌푸린 채 물었다.

“그게 무슨…….”

“그간 인심을 많이 잃었더군.”

달칵.

주덕일이 찻잔을 내리며 말했다.

“규정에 어긋난 지시도 자주 내리고, 아랫사람들에게도 꽤나 무례하게 굴고 말이야. 추관에게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며 소리를 친 적도 있다던데.”

서개강은 툭 뱉듯이 말했다.

“모함입니다. 저를 시기하는 자들이 악의적으로 퍼뜨리는 말이지요.”

증거 같은 것도 없고 증인도 나서지 않을 것이다.

설령 누군가 내부 고발을 하더라도 상관없다.

지금 주덕일이 말한 모든 건 명백한 불법이라기엔 상당히 애매한 것들이니까.

“관의 예산을 착복하고 양민에게 누명을 씌워 죽인 것도 말인가?”

주덕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서개강은 주덕일의 눈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나이 많은 주덕일의 눈빛은 그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음흉한 늙은이 같으니.’

주덕일의 내심을 짐작할 수 없는 서개강은 턱을 치켜들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요. 황상의 은덕을 입은 제가 어찌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만일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저는 기꺼이 황법에 따라 벌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누군가의 음해라면.”

으득.

서개강은 주덕일을 노려보며 말했다.

“반드시 응분의 대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을 서개강은 숨기지 않았다.

서개강 자신이 한 짓은 아무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니 할 일은 하나, 자신을 향해 이를 드러낸 자들을 파멸시키는 것뿐이다.

“후후후. 그래, 그렇지.”

주덕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흘렸다.

지긋이 서개강을 쳐다보던 주덕일이 문득 말했다.

“부럽군. 자네의 그런 패기가 말이야. 혹자는 권력욕이 과하다 할 수도 있겠으나 어찌 보면 관리로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향상심 아니겠는가?”

미소를 머금은 채 주덕일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절대 맞서지 말아야 할 것도 있다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지나가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자연재해 같은 상대 말일세.”

서개강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지?’

그는 주덕일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의아한 서개강의 귓가에 주덕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나는 항상 다른 사람을 내세운다네. 수십 년 관직 생활을 지내며 터득한 요령 같은 것이지. 비겁하지만, 마차 앞을 막아서는 사마귀 꼴이 되는 것보다 나을 테니까.”

사마귀는 포식자다.

상대를 산 채로 씹어 먹는 사마귀의 모습은 잔혹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 사마귀가 아무리 고개를 세우고 적의를 불태운다 하더라도 구르는 마차 바퀴를 멈출 수는 없다.

그래서 당랑거철(螳螂拒轍)은 무모함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서개강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쯧쯧. 자네도 참…….”

짐짓 안타까운 표정으로 주덕일이 말했다.

“세상에 거스를 사람이 없어서 하필 박 공공의 심기를 거스른단 말인가?”

덜컥.

순간 서개강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박 공공이라니?

동창 병필태감이자 도찰원을 한 손에 쥔, 황실과 조정의 절대 실세라는 박 공공이 왜 여기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그, 그게 무슨…….”

덜컹.

주덕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경의 총 책임자인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서개강에게 말했다.

“그동안 나 대신 수고했네. 잘 가게.”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슥.

주덕일은 몸을 돌리고 다시 난초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서개강은 당혹과 혼란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 앉아 있어 봤자 변하는 것은 없었다.

서개강은 몸을 일으켰다.

휘청.

‘윽.’

순간 서개강은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서개강은 한 손으로 의자를 붙잡고 일어섰다.

고개를 돌려 주덕일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등을 돌린 채 서개강을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뭔가, 뭔가 잘못된 걸 거야.’

오해나 착오가 틀림없다.

자신이 박 공공의 심기를 거스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서개강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부윤의 집무실을 나섰다.

복도로 나온 그가 막 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서라.”

문득 들려온 그 목소리는 서늘했다.

서개강은 불안한 느낌을 애써 다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복도에 상급 무관의 복식을 한 두 명의 낯선 무관이 서 있었다.

“네가 서개강이냐?”

서개강은 흠칫 몸을 떨었다.

평범한 상급 무관이 부승에게 이런 말투를 쓸 리가 없다.

“나, 나는…….”

서개강이 무엇인가 말하려던 때였다.

슥.

신분패 하나가 서개강의 눈앞에 들이밀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이 없는 서개강은 그 신분패에 뭐라고 쓰였는지 보지 못했다.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동창에 소속된 무관임을 증명하는 패였다.

증거 따위는 물론 법률조차 개의치 않는 초법적 사찰 기관, 저승사자보다 더 무섭다는 바로 그 동창이 서개강을 찾아온 것이다.

“가자.”

설명은 없었다.

그저 짧은 한마디를 내뱉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말에 서개강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동창 앞에서 서개강의 철저한 ‘주변 관리’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들은 증거도, 증인조차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턱.

무관의 강인한 손이 재촉하듯 서개강의 어깨를 잡았다.

그 순간 서개강은 발밑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 딛고 있던 바닥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나락이 그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