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쓰레기는 치우면 그만이다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운현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그건 오래가지 않았다.
“너는 뭔데 감히 통판 나리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냐!”
장 부총관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는 운현 같은 사람을 이미 여러 번 보았다.
글 좀 배웠다고, 혹은 관과 별것 아닌 연이 있다고 주제를 모르고 나대는 문사들 말이다.
“당장 치도곤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썩 물러서라!”
장 부총관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월향의 손목을 쥐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건 성공하지 못했다.
슥.
운현이 팔을 뻗어 장 부총관의 손을 가로막았다.
장 부총관은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이놈이 진짜……!”
“……공자님.”
월향이 뒤에서 나지막이 말했다.
“감사합니다만 이것은 공자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니에요.”
“……어째서요?”
운현은 고개를 돌려 월향을 바라보았다.
월향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주인은 통판입니다. 그리고 통판의 사촌은 바로 이곳 남경의 부승이에요. 공자께서 자칫 해를 당하실까 염려됩니다.”
운현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부승(付承)이라면 대도시 남경의 총 책임자인 부윤(府尹)의 바로 아래 직위다.
설령 장원 급제를 한 사람이라도 관운이 따르지 않으면 오를 수 없는 직위인 데다가, 남경의 다음 부윤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즉 현 남경의 핵심 실세라는 뜻이다.
통판만 해도 대단한데 남경의 이인자가 뒤를 받쳐 주고 있는 셈이었다.
“흥, 이제야 좀 주제를 깨달았느냐?”
장 부총관이 운현을 향해 빈정거렸다.
통판과 부승은 하늘과 땅 차이다.
설령 믿는 것이 있어서 통판 앞에서 뻗대던 사람이라도 부승이라는 말에는 모조리 꽁무니를 뺄 수밖에 없었다.
장 부총관은 인상을 쓰며 월향에게 말했다.
“그보다 이놈은 뭐냐? 설마 그사이에 기둥서방이라도 들였더냐?”
장 부총관의 눈빛은 사뭇 살벌했다.
마치 부정의 증거라도 잡은 듯 살기마저 등등했다.
“만일 그렇다면 네년은 절대 편히 죽지 못할…….”
“부승이 아니라 부윤이라 할지라도.”
운현이 말했다.
“양민을 마음대로 끌고 갈 권한은 없다.”
장 부총관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운현을 노려보던 그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너 같은 놈이 있었지. 꼴에 진사랍시고 겁 없이 나대던 문사가 말이다. 그놈이 어찌 되었는지 아느냐?”
운현을 눈 아래로 깔아 보며 장 부총관이 말했다.
“그 자리에서 흠씬 치도곤을 안기고 창고에 가둔 후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딱 사흘 만에 아주 고분고분해지더군.”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진 문사는 평생 병을 안고 살게 되었지만 장 부총관은 아무런 질책도 받지 않았다.
외려 문사의 집안에서 제발 풀어 달라며 찔러 준 뇌물까지 받았으니 그가 운현을 우습게 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장 부총관은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권한이라고 했나? 너도 그 꼴이 되면 내가 무슨 권한을 가지고 있는지 아주 잘 알게 될 거다.”
그의 눈동자에 살기가 스쳤다.
“얘들아!”
“네!”
행패를 부리던 하인들이 일제히 답했다.
장 부총관은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죽이지만 마라.”
그 말뜻을 하인들은 바로 알아들었다.
“네, 부총관 나리!”
하인들은 비웃음을 머금으며 각자 허리에 차고 있던 짧은 방망이를 꺼내 들었다.
모서리가 생기도록 깎은 그 몽둥이는 사람을 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살기등등한 그들의 눈빛 역시 한두 번 해 본 모습이 아니었다.
콰직, 와르르.
하인들은 넘어진 의자와 부서진 집기들을 헤치며 운현에게 다가왔다.
기루를 지키던 사내들의 표정이 굳었지만 그들도 감히 부총관의 하인들을 제지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운현은 하인들을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차라리…….’
저들이 영웅맹이나 녹림이라면 오히려 당연히 여겼을 것이다.
본래 그런 자들이니까.
하지만 통판이니, 부승이니 하는 관원들에게 속했다는 자들이 이럴 수가 있는가?
운현은 굳은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딱.
작은 소리가 기루에 울려 퍼졌다.
언뜻 듣고도 그냥 지나칠 정도였지만 그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윽.”
앞서 다가오던 하인 한 명이 발을 멈추고 인상을 썼다.
그는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감싸 안으며 허리를 굽혔다.
“크으윽, 컥.”
그자만이 아니었다.
대여섯 명의 하인들은 모두가 배를 움켜쥐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끄억. 어억. 컥.”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들은 창자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과 함께 바닥에 나뒹굴기 시작했다.
털썩, 쿵.
조금 전 그들이 쏟아 버린 음식물이 온몸에 묻었지만 하인들은 상관하지 못했다.
숨조차 쉬기 힘든 극심한 격통으로 이미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끄어어억.”
장 부총관과 함께 온 하인들은 바닥을 자신들의 온몸으로 닦으며 부들부들 떨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려 객옹을 쳐다보았다.
“쓸데없는 것들 때문에 심력을 허비하지 마라.”
객옹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쓰레기는 치우면 그만이다.”
그것은 너무나 객옹다운 말이었다.
그리고 운현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 주는 말이기도 했다.
“네. 그렇습니다.”
운현은 담담하게 답했다.
“쓰레기는 치우면 그만이지요.”
그 목소리는 살짝 고양되어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장 부총관이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
갑자기 하인들이 격통을 호소하며 바닥에 나뒹구니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건 그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감히 너희가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성싶더냐!”
“글쎄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월향이 말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장 부총관을 바라보았다.
“다들 뭘 잘못 먹은 것 아닐까요?”
으득.
장 부총관은 이를 악물었다.
“너 이년! 이런다고 네가 나리의 명을 피할 수 있을 듯싶더냐!”
그는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장 부총관은 고개를 홱 돌려 운현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네놈도 마찬가지다! 주제도 모르고 나리의 행사에 끼어들었으니 반드시 물고를…….”
운현은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객옹의 말처럼 쓰레기는 치우면 그만이다.
더 이상 객옹에게만 맡길 생각도 없었다.
다른 사람의 호의에 숨어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는 건 운현의 성격이 아니었다.
슥.
운현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때까지도 무언가 소리치고 있던 장 부총관의 안색이 변했다.
“어, 어어.”
장 부총관의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렸다.
설마 싶었지만 운현의 시선은 서늘하기만 했다.
“컥!”
갑자기 장 부총관이 배를 감싸 안고 인상을 구겼다.
운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 부총관은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렸다.
“너, 너 이놈…….”
그는 운현을 올려다보며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네가 감히 토, 통판 나으리의……. 큭, 으윽.”
장 부총관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두 손으로 배를 감싸 안고 허리를 굽힌 채 뒤로 물러섰다.
바닥을 뒹굴던 하인들도 조금 사정이 나아졌는지 몸을 일으켜 슬금슬금 장 부총관에게로 걸어갔다.
운현과 객옹을 보는 하인들의 눈빛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지, 지금은 돌아가마.”
장 부총관이 고통을 참느라 입술을 깨문 채 말했다.
“하지만 두고 봐라. 내, 내 반드시 너희를……. 꺽.”
말하던 장 부총관은 안색이 파랗게 되더니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쿵.
부총관은 얼굴로 바닥을 받아 버렸다.
하지만 고통을 느끼진 못했다.
이미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부총관 나리!”
“저, 정신 차리십쇼!”
“나리! 나리!”
하인들은 쓰러진 부총관을 보며 부산을 떨었다.
그들은 얼른 부총관을 부축하더니 허겁지겁 기루를 나갔다.
사람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운현은 조용히 객옹에게 고개를 돌렸다.
“제가 해도 됩니다. 어르신.”
“내가 싫다.”
객옹은 손을 내리고는 뒷짐을 졌다.
“저따위 놈에게 네가 직접 손대고 그러지 마라. 보기 싫으니까.”
지난번 취선루에서 운현이 직접 나선 것이 객옹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어르신께서 손쓰시는 건 제 마음이 편치 못한데요.”
“네 마음이야 내가 알 게 뭐냐?”
객옹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뜻 매정한 말이었지만 가슴이 따뜻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운현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객옹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건 아마도 속마음을 들켰기 때문이리라.
사박, 사박.
문득 들리는 걸음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월향이 두 손을 모으고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사락.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머리에 달린 장신구가 반짝반짝 빛났다.
말 없는 객옹 대신 운현이 답했다.
“아닙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들이 무언가 잘못 먹었나 봅니다.”
부드러운 운현의 목소리에 월향은 빙그레 웃었다.
“네. 하지만 곤경을 당한 저를 위해 나서 주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요.”
지긋이 운현을 쳐다보며 월향은 말했다.
“……역시 소월이 그렇게 평할 만한 분이시군요.”
그 말은 단번에 운현의 흥미를 끌었다.
서원에서 서로의 글에 평을 하는 것은 일상사였다.
애써 지은 글은 물론, 지은 사람까지 너덜너덜해지도록 날카로운 비평에 시달려 본 운현으로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저, 평이라면 뭐라고…….”
월향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런 건 소월에게 직접 들으셔야죠?”
운현은 어색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걸 소월에게 알려 달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일단 예가 아닌 데다가, 그 조용한 소월이 말해 줄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걱정이네요.”
월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통판 서극윤은 집요한 자예요. 두 분께서는 어서 이곳을 피하시는 것이 좋겠어요.”
설령 무림의 고수라도 관과 충돌하는 것은 껄끄럽다.
현을 다스리는 지현만 해도 부담스러워 할 터인데 그보다 높은 통판, 게다가 대도시 남경의 부승까지 뒤에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비록 죄지은 것이 없다 해도 마찬가지다.
죄명이야 통판이 주장하기 나름이니 말이다.
하지만 객옹은 물론 운현의 표정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렇군요.”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월향은 살짝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통판만이 아녜요. 아까 말씀드렸지만 이곳 남경의 부승이 통판 뒤에 있어요. 설령 사대정파라 해도 그들과 맞설 순 없답니다.”
그건 운현에겐 새로운 단어였다.
“사대정파요?”
“네. 소림, 무당, 화산, 아미를 일컬어 사대정파라 해요. 당문과 남궁세가, 제갈세가, 혁련세가 그리고 모용세가를 오대세가라 하지요.”
말하던 월향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이건 제가 말씀드릴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무공의 고수에게 사대정파와 오대세가를 가르쳐 주다니, 월향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어쩌면 이 고수는 오래 은거하던 기인인지도 모른다.
“모용세가가 오대세가인가요?”
하지만 운현은 눈을 빛내며 다시 물었다.
월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손세가가 세를 잃은 지금은 보통 모용세가를 꼽더군요. 그보다 오늘이라도 돌아가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통판 서극윤도 집요한 자지만 부승은 더욱 악랄한…….”
“현아.”
문득 객옹이 운현을 불렀다.
더 이상 말은 없었지만 운현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죄송합니다만.”
운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월향에게 말했다.
“지금 식사 됩니까?”
“네?”
월향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건 마치 이른 아침에 불쑥 들어온 손님 같은 말이었다.
지금은 아침이 아니고 이곳은 식당이 아닌 기루지만 말이다.
하지만 월향을 바라보는 운현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다.
“하아.”
월향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곧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해 드릴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운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이곳 음식이 마음에 드신 듯해서요. 아, 양은 많지 않아도 다양하게 준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술은 필요 없고 차는 가장 좋은 것으로요.”
월향은 어색한 표정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어찌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문사의 순진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혹시…….’
객옹은 엄청난 고수라 그럴 수도 있다.
세상사에도 그리 큰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운현조차 아무렇지 않은 건 확실히 의외였다.
부윤이라는 직책까지 서슴없이 입에 담던 그가 남경 부승의 힘을 모를 리 없으니까 말이다.
운현을 바라보는 월향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그녀의 호위이자 의매인 연화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