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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98화 (398/530)

398화. 안 들립니까?

운현과 객옹은 청풍명월의 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고풍스러운 서화와 색색의 화려한 장식이 잘 어우러진, 기품과 화려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방이었다.

“오, 이건 아주 잘 쓴 글씨네요.”

운현이 서화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차를 음미하던 객옹은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운현은 옆에 있는 도자기를 보며 감탄을 흘렸다.

“이건 색이 대단한데요? 어떻게 이렇게 오색 빛이 흐르는 거죠? 게다가 날아가는 학의 형상이 아주 멋지군요.”

운현은 방에 놓인 조각과 도자기, 서화 들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 화병은 선이 아주 유려하군요. 안 그렇습니까?”

객옹은 찻잔을 든 채 무심하게 말했다.

“건드리지는 마라. 깨지면 귀찮으니까.”

“네. 조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운현은 눈을 빛내며 계속 감상에 몰두했다.

아무렇게나 놓아 둔 것 같은 도자기며 조각 들이 자세히 보니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밖에서 인기척이 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사박, 사박.

객옹이 눈을 들고 운현도 고개를 돌렸다.

달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두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한 사람은 온화하고 우아한 느낌의 원숙한 여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허리에 검을 찬 날카로운 눈매의 젊은 여인이었다.

젊은 여인의 눈동자가 운현과 객옹을 순식간에 살폈다.

그녀의 안색이 단번에 변했다.

휙.

젊은 여인은 즉시 다른 여인의 옷소매를 잡고 강하게 옆으로 잡아당겼다.

“꺅.”

우아하던 여인의 눈이 둥그레지나 싶더니 바로 문이 닫혔다.

탁.

두 여인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객옹을 돌아보았다.

객옹 역시 눈살을 찌푸린 채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밖에서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화야. 갑자기 잡아당기지 말라고 했잖니? 이 옷은 금방 벗겨진단 말이야.”

그건 반쯤 울 것 같은, 사뭇 난처한 목소리였다.

“어쩔 수 없었어요. 진짜 고수란 말예요.”

한껏 낮춘 날카로운 그 목소리는 연화라 불린 젊은 여인의 것이 분명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당황해서 그런지 몰라도 안에서 들으리란 생각은 미처 못 한 듯했다.

“나도 알아. 소월이 고수라고 알려 줬잖니.”

당혹스러운 가운데서도 그 목소리는 애써 차분함을 유지하려 하고 있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는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무리 그래도 저 정도인 줄은 몰랐죠.”

연화라 불린 여인이 여전히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 노인이 작정하면, 저는 못 막아요.”

“그 정도라고?”

“네.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안 됐어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엄청난 고수예요.”

“……연화야.”

차분한 목소리로 여인이 말했다.

“그럼 우리 이야기를 이미 다 듣고 계시지 않을까?”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문이 열렸다.

사락.

온화한 인상을 지닌 우아한 여인이 모습을 나타냈다.

젊은 여인은 여전히 날카로운 눈빛으로 객옹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험이 별로 없는 탓인지 의외로 허술하긴 했지만 실력은 확실히 있어 보였다.

“……실례했습니다.”

사락.

온화한 여인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품과 단아한 느낌은 소월과 무척이나 비슷했다.

여인은 고개를 들었다.

작고 화려한 장신구가 흔들리며 불빛 아래 반짝였다.

“저는 월향입니다. 이곳 청풍명월의 주인이자 소월을 가르친 사람이지요.”

그녀의 자태와 목소리에서는 원숙한 기품이 배어 나왔다.

하지만 소월의 스승이라기엔 매우 젊어 보였다.

운현보다 나이가 많은 건 확실해 보였지만 말이다.

“저는 운현입니다.”

정중한 태도로 운현이 그녀의 예에 답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인 줄은 알고 있지만 도움을 받고자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월향은 문득 그 이름을 어디서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락.

객옹을 향해 월향이 말했다.

“명호를 여쭤도 될까요?”

무림인은 자존심이 세다.

게다가 고수들의 괴팍함은 익히 잘 알려져 있는 것이라서 월향의 태도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객옹이다.”

월향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객옹이 말했다.

그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명호였다.

월향이 의아한 눈빛으로 객옹을 바라보았지만 객옹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슥.

객옹은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했다.

계속 침묵이 흐르자 어쩔 수 없이 운현이 나섰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여러분은 어르신과 아무런 은원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아, 그렇군요.”

월향은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무조건 객옹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연화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객옹은 말 그대로 걸어 다니는 재난이나 마찬가지였다.

은원이건 뭐건 무조건 가까이 가지 않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죄송합니다. 연화가 좀 예민해서요.”

월향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목 주위의 옷깃을 살짝 매만졌다.

그렇지 않아도 어깨가 조금 드러나는 옷이었던지라 운현의 시선은 저절로 월향에게로 향했다.

“크흠.”

얼른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지만 이미 연화의 날카로운 시선과 마주친 다음이었다.

월향은 아무것도 모른 채 운현에게 물었다.

“찾으시는 분이 있다고 하셨지요?”

“아, 네.”

운현은 얼른 대답했다.

“그분은 소(簫)가 대단히 뛰어나시며, 천하에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강한 분입니다.”

월향을 바라보며 운현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분이시지요. 얼굴도, 나이도, 이름조차도요.”

“……무척 특이한 분이시네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월향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물론 눈빛조차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소를 잘 부시는 분이라면 많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천하에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강한 분을 찾으신다면.”

월향은 웃음을 흘렸다.

“잘못 찾아오신 게 아닐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운현 역시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말하던 운현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밖에서 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월향은 연화에게 눈짓을 했다.

연화가 문을 열었다.

달칵.

밖에는 아까 운현에게 말을 걸었던 사내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월향이 물었다.

사내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설명은 필요 없었다.

콰장창.

“꺅!”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들렸다.

요란한 고함 소리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말썽이 생긴 듯했다.

사락.

월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말한 월향은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연화 역시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이 나가고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기루에 올 때마다 말썽이 생기는 걸까요? 우연이라기엔 너무 공교로운데요?”

“강호 무림에서 말썽은 일상다반사다.”

객옹은 무심하게 말했다.

“은거를 해도 말썽이 끊이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이 모이는 곳에 어찌 분란과 다툼이 없겠느냐?”

그 말은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래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기루라곤 평생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가는 곳마다 말썽이라니. 술과 여인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요?”

“술은 죄가 없다. 여인도 그러하고.”

객옹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그냥 세상에 쓰레기가 너무 많은 것뿐이지.”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반박은 하지 못했다.

객옹은 운현보다 더 많은 일들을 보아 왔을 테니까.

“가 볼 거냐?”

“네. 가 봐야지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운현은 말했다.

“일상다반사라고 하셨잖습니까?”

매일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하듯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흠.”

객옹은 탐탁잖은 듯했다.

하지만 그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벅, 저벅.

열린 문 밖으로 운현은 걸음을 옮겼다.

시끄러운 사내들의 고함 사이로, 누군가의 거만한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어허, 이 천한 것들이 감히 누구의 명을 거역하는 것인가? 당장 옥에 갇혀 봐야 눈물을 흘릴 것들이로구나!”

큰 소리를 치지도 않았고 분노로 펄펄 뛰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운현은 벌써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그건 권력을 등에 업은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

기루 일 층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와장창, 쾅.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상을 뒤엎고 행패를 부렸다.

손님들은 벌써 바깥으로 피했고, 시녀와 예기 들은 이 층으로 올라가 불안한 눈빛으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기루의 건장한 하인들은 사내들의 행패를 보면서도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허어, 그러니 어서 나리의 명을 받아들이란 말일세.”

얄팍한 염소수염을 한 사내가 월향에게 말했다.

그는 남경 통판, 서극윤의 부총관 장씨였다.

통판(通判)은 도시의 한 구역을 다스리는 직책인데, 인구 십만의 현을 다스리는 지현(知縣)보다 품계가 더 높았다.

게다가 대도시 남경의 통판은 어지간한 부사보다 더 권한이 커서, 서극윤이 아니라 그 부총관조차 감히 건드릴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장 부총관이 마음 놓고 기루에서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가?”

장 부총관이 사뭇 훈계하듯 말했다.

“나리의 뜻을 고분고분 따르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말이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월향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그런 수치스러운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어요.”

“아니, 나리께서 음풍농월을 하시겠다는데 뭐가 수치란 말인가? 그저 밤에 작은 배를 타고, 단둘이 오붓하게 달구경이나 하시겠다는 것 아닌가?”

통판 서극윤이 그런 식으로 기녀와 예인 들을 농락하고 겁탈한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 부총관은 오히려 뻔뻔스럽게 말했다.

“자네같이 한물간 기녀를 나리께서 어여삐 여겨 주시면 감지덕지해도 모자랄 판에 감히 거절이라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눈빛은 월향의 몸을 연신 훔쳐보고 있었다.

한창때가 지났어도 월향의 미모는 오히려 더욱 완숙해져서, 여전히 남경에서 손꼽히는 예기 중 한 명이었다.

“천한 기녀 주제에 나리께서 오냐오냐 하시니 주제도 모르고 말이야. 쯧쯧.”

장 부총관은 대놓고 혀를 찼다.

아드득.

연화가 이를 갈았지만 검을 뽑지는 못했다.

통판 서극윤의 부총관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간 말 그대로 이 기루가 날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어이쿠, 이년 눈빛 좀 보소. 너 이년! 어딜 어린 것이 함부로 눈을 치켜뜨느냐!”

장 부총관은 연화를 향해 짐짓 호통을 쳤다.

그리고 월향을 돌아보았다.

“자, 이러지 말고 아예 지금 나리께 가세.”

장 부총관은 월향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앗!”

월향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장 부총관은 음흉하게 웃었다.

“어허, 어차피 가게 될 것인데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뭐 있겠나? 혹시 아나? 이러다 나리께서 자네를 첩으로라도 들이실지…….”

월향의 얼굴이 수치로 딱딱하게 굳고 연화의 참을성도 한계에 달했다.

“이익!”

참다못한 연화가 막 검에 손을 가져가던 순간이었다.

“놓으시지요.”

한 줄기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간 기루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저벅, 저벅.

문사 차림의 사내와 한 노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바로 운현과 객옹이었다.

운현은 월향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장 부총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넌 또 뭐야?”

장 부총관이 퉁명스레 말했다.

“어디서 함부로…….”

바로 그때였다.

“으아아악!”

말하던 장 부총관이 화들짝 튀어 오르며 뒤로 물러났다.

갑작스레 자신의 팔에서 격통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장 부총관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상처 같은 건 아무 데도 없었다.

“놓으라고 말했는데.”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장 부총관은 고개를 들었다.

운현은 서늘한 눈빛으로 말했다.

“안 들립니까?”

그건 엄청나게 큰 소리도,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날카로운 소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운현의 그 목소리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 똑똑히 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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