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청풍명월
항주, 취선루.
운현은 객옹, 영호준과 함께 취선루로 들어섰다.
“어머, 어서 오세요.”
기녀 연홍이 환하게 웃으며 세 사람을 반겼다.
영호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자네는 언제 봐도 아름답군. 그간 잘 있었나?”
“저야 늘 잘 있지요. 매화검께서 언제 오실까 기다리느라 잠을 못 이루는 걸 빼면요.”
새침하게 영호준을 한번 흘겨보고 나서, 연홍은 객옹과 운현에게 예를 표했다.
사락.
“다시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홍은 웃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월이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세 사람은 연홍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취선루의 일 층은 여전히 젊은 남녀들로 가득했다.
운현이 보기엔 아직 어려 보이는 이들도 많아서 새삼 세월이 흘렀음을 실감했다.
“심가장에선 그 후에 별말 없던가?”
문득 영호준이 연홍에게 물었다.
앞서 걷던 연홍이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음을 흘렸다.
“무슨 말이 있겠어요? 장주가 투옥되는 바람에 당장 살길을 찾느라 정신이 없을 텐데요. 심가장이 날아가니까 그들과 어울려 못된 짓을 하던 자들도 숨을 죽이고 눈치만 살피고 있어요. 덕분에 항주 거리가 아주 쾌적해졌답니다.”
“그런가? 오랜만에 안찰사가 일을 제대로 했군그래.”
영호준의 말에 연홍이 빙긋 웃었다.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지만 이번 일 뒤에 창룡맹이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 창룡맹도 이전 영웅맹처럼 횡포를 부리지 않을까 걱정하던 사람들은 ‘과연 정파맹’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차피 무림인들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도 없지는 않았으나 창룡맹이 실제로 가져온 분명한 차이 앞에서는 힘을 얻지 못했다.
사박, 사박.
걸음을 옮기며 연홍이 물었다.
“혹시 창룡맹에서는 기루를 보호하시지 않나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영호준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이곳 문파들의 일이 없어지잖나? 예전처럼 적당한 문파를 골라서 계약을 하도록 하게. 잘 모르겠으면 내가 추천해 줄 수도 있고.”
“그렇군요. 알겠어요.”
탁.
연홍은 방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곳입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감사합니다.”
운현의 말에 연홍은 미소를 머금었다.
“천만에요.”
운현과 객옹, 영호준은 안으로 들어갔다.
시녀들이 가벼운 음식과 차를 내오고 방 안에 차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아 차를 음미했다.
그리고 곧 소월이 들어왔다.
사박, 사박.
소월은 차분한 걸음으로 걸어와 운현과 일행들 앞에 섰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락.
소월은 공손히 예를 표했다.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단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은 그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어려 있는 미소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답이 왔기에 연락을 드렸습니다.”
“우선 앉으시지요.”
운현이 자리를 권했다.
소월이 앉자 운현은 이전처럼 그녀 가까이에 찻잔을 두려 했다.
하지만 운현이 찻잔을 놓기 전에 소월이 손을 뻗었다.
슥.
그녀의 가늘고 흰 손이 찻잔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소월이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운현은 살짝 당황했다.
“아, 천만에요.”
찻잔을 건네받은 소월은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
그리고 운현을 향해 미소 지었다.
“향이 아주 좋네요.”
운현이 가져온 차도 아니라서 조금 애매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달칵.
찻잔을 놓으며 소월이 말했다.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월주님께 어찌해야 할지 여쭈어 보았어요. 월주님께서 직접 대인을 만나 뵙고자 하시더군요.”
“오, 그래요?”
운현의 안색이 밝아졌다.
관에 소속된 악사나 유명한 예인을 찾는 일에 별 진전이 없었던 터라 소월의 말은 반갑기만 했다.
“다행이군요. 그럼 월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남경이에요.”
남경이라면 항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물론 아주 가깝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얼마 전 임시 총단이 있었던 무한처럼 먼 곳은 아니다.
“남경의 청풍명월이라는 기루에 가셔서 월향을 찾으세요. 그분이 바로 월주님이세요.”
“자네가 월주라고 부르는 이유가 따로 있나?”
문득 영호준이 물었다.
월주라는 호칭은 확실히 독특했다.
“그건 저희끼리 그분을 부르는 호칭이에요. 월주님께 도움을 받은 예인들요.”
소월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희는 무력하거든요.”
당대에 이름을 날리는 예인들도 있다지만 대부분의 예인들은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혹여 말썽이라도 나면 기루는 예인을 보호하기보다 스스로의 안위를 택했다.
그러니 소월의 말처럼 예인들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항주의 소월이 소개했다고 하시면 월주께서 아실 거예요. 대인께 대해서는 무림의 고수시며, 예인 중에 찾고자 하는 분이 있다고만 전했어요.”
소월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답을 하고 싶은데 혹시 무언가…….”
소월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필요 없어요.”
운현은 의아한 눈빛으로 소월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이렇게 수고를 해 주셨는데…….”
“제가 한 것은 다만 대인의 뜻을 월주님께 전해 드린 것뿐예요.”
조용한 목소리로 소월은 말했다.
“그저 가끔 음률을 듣고 싶으실 때 찾아 주시면, 그것으로 족해요.”
소월의 눈빛은 단호했다.
운현은 더 이상 묻는 것이 실례임을 알았다.
“알겠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운현은 말했다.
“그럼 지금 연주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소월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네, 기꺼이요.”
그녀는 밖에 있는 시녀를 불렀다.
칠현금이 들어오고 곧 연주 준비가 끝났다.
소월은 단아한 자세로 칠현금 앞에 앉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현 위에 살포시 얹었다.
사락.
지긋이 감은 그녀의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손이 현을 울리기 시작했다.
땅, 따랑.
이전과 달리 독주였지만 칠현금의 음률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운현은 그녀의 연주에 금방 빠져들었다.
객옹 역시 지긋이 눈을 감고 곡을 음미했고, 영호준은 차를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씻어 내고 있었다.
소월의 칠현금 연주는 세 곡이나 이어졌다.
수고한 그녀를 위해 운현은 다시 차를 권했고, 연주한 곡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운현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칵.
“연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현이 소월에게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더 듣고 싶지만, 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아니에요. 제가 오히려 감사드려요.”
소월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운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마지막 곡은 살짝 애잔한 느낌도 나더군요. 저는 음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가슴을 울리는 좋은 연주였습니다.”
운현의 말에 소월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저벅.
객옹과 운현은 방을 나갔다.
뒤따르던 영호준이 문득 발을 멈췄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네.”
영호준은 소월에게 말했다.
소월은 의아한 눈으로 영호준을 바라보았다.
“자네도 알겠지만 총단이 완성되면 개파대전 비슷한 것을 열 예정이네. 각계각층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오겠지.”
그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창룡맹이 개파대전을 연다면 천하의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당연히 사람들이 몰리고 화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공연을 할 생각일세. 연회 같은 데서 연주하는 것 말고 정식 순서로 말일세.”
영호준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관심이 있으면 자네에게도 부탁할까 하네. 아, 물론 대우는 확실하게 해 줄 거고. 어떤가?”
소월은 눈을 반짝였다.
예인으로서 어찌 그런 자리를 마다할까?
연회에서 흥을 돋우는 것이 아니라 정식 공연이라면 오히려 바라마지 않던 일이었다.
“좋네요. 그리하지요.”
“그럼 나중에 연락하지.”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고 영호준은 방을 나갔다.
이 정도면 운현이 하려던 보답으로서는 충분할 것이다.
아무리 소월의 연주가 뛰어나도 기루에서 그녀에게 주는 돈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같이 가시지요.”
벌써 계단을 내려가는 운현과 객옹을 향해 영호준이 말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사뭇 느긋하기만 했다.
***
다음 날 아침, 항주 창룡맹 임시 총단.
운현과 객옹, 그리고 감찰어사 조관과 항장익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남경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영호준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맡은 바 책무가 중하다 보니 어쩔 수가 없군요.”
하지만 영호준은 전혀 안타까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옆에 서 있는 진예림과 담소하를 보고는 말을 이었다.
“저까지 없으면 이분들의 업무가 지나치게 많아질 테니 말입니다.”
담소하와 진예림의 표정은 구겨져 있었다.
무언가 불평을 하고 싶었지만, 영호준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아는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감찰어사 조관이 담소하에게 말했다.
“내가 없는 동안 맹과 조정 사이의 연락을 잘 부탁하네.”
“……네, 알겠습니다.”
혹시나 싶던 담소하의 표정이 실망으로 물들었다.
조관의 호위로 함께 가는 항장익이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영호준은 담소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자, 오늘도 열심히 일해 보세. 아, 부총군사께서도요.”
진예림은 인상을 썼지만 침묵을 지켰다.
말해 봤자 본전도 못 건질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운현이 영호준과 진예림, 담소하에게 말했다.
“네.”
“다녀오세요.”
“잘 다녀오십시오.”
그들의 배웅과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가닥, 따가닥.
운현과 객옹, 감찰어사 조관과 항장익을 실은 마차는 남경을 향해 쭉 뻗은 관도를 힘차게 내달렸다.
***
운현 일행은 남경에 도착했다.
숙소를 정한 후에 조관과 항장익은 보고를 위해 남경부로 향했다.
그리고 운현은 객옹과 함께 소월이 말한 청풍명월이라는 기루를 찾아 번화가로 나갔다.
남경의 번화가는 항주보다 더 크고 번잡해서, 지나는 사람이나 마차도 많고 화려한 가게와 높은 누각도 사방에 즐비했다.
“저기로군.”
먼저 찾은 사람은 객옹이었다.
운현이 고개를 들자 커다란 현판에 ‘청풍명월’이라는 글자가 날아갈 듯한 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이 높은 누각이 바로 소월이 말한 기루였다.
“들어가자.”
“네.”
운현은 객옹과 함께 기루로 발을 옮겼다.
촤락.
화려한 구슬로 만든 주렴을 젖히고 들어서자 화사한 불빛과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직 낮인데도 기루 안에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예인들의 기예를 즐기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이곳 남경이 부유하고 화려한 도시라는 의미였다.
운현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제가 본 기루 중에 제일 크고 화려한데요?”
“몇 곳이나 봤는데?”
객옹이 물었다.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여기까지 세 곳입니다. 다 어르신과 같이 갔었던…….”
“실례합니다.”
누군가 운현의 말을 끊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빙긋 웃으며 운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사내가 물었다.
손을 앞으로 모으고 정중한 자세를 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사뭇 위압적이었다.
하지만 운현은 오히려 사내가 말을 걸어준 것이 반가웠다.
다른 사람은 위압적으로 느낄지 몰라도, 운현에겐 아주 정중한 태도로 보였기 때문이다.
“월향이라는 분을 찾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웃으며 운현은 말했다.
“계신가요?”
사내의 눈썹이 꿈틀 경련했다.
하지만 운현의 표정은 그저 편안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