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검전 리마스터-396화 (396/530)

396화. 달[月]과 난(蘭)

모용미와 모용상아의 방문에 운현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운현은 즉시 두 사람을 서재로 맞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고마워요.”

모용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사박.

모용미는 서재로 들어왔다.

“아, 이럴 게 아니라 후원으로…….”

말하던 운현은 후원의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성과 비무한 후에 아직 복구가 안 된 것이다.

“아, 후원은 안 되겠군요. 지금은 엉망이 되어서…….”

“비무라면 할 수 있겠지.”

문득 객옹이 말했다.

그는 비무 탓에 후원이 망가진 것을 아직도 마음에 두는 듯했다.

모용미는 무슨 말인가 싶었지만 객옹에게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사락.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모용세가의 모용미입니다.”

그녀가 새삼 자신을 소개한 것은 객옹을 향한 배려였다.

모용상아도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모용상아예요! 할아버지 잘 지내셨어요?”

“그래.”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객옹이 말했다.

평소 객옹이 어지간한 사람은 알은체도 안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래도 괜찮은 반응이었다.

“앉으시지요.”

운현은 모용미와 모용상아에게 자리를 권했다.

모용상아가 폴짝 뛰어서 객옹 옆의 의자에 앉고, 모용미도 모용상아 옆에 자리를 잡았다.

운현도 영호준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이 먼 곳까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모용미는 모용세가의 외당 당주다.

그렇지 않아도 바쁠 그녀가 이곳 항주까지 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세가에서 창룡맹에 전할 예물이 있어서요.”

모용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핑계로 왔어요. 상아도 오고 싶어 했고요.”

“그랬군요. 감사합니다.”

운현은 감사를 표했다.

“아니에요. 그리 많은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소저께서 와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모용미는 미소를 머금었다.

가벼운 인사말일 수도 있지만 운현의 말에 오랜 여행의 피로가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오빠, 저건 뭐예요?”

문득 모용상아가 물었다.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책상에 반쯤 펼쳐져 있는 그것은 한 장의 서화였다.

“아, 그건…….”

“어떤 분이 그려 주셨습니다.”

영호준이 웃으며 말했다.

“딱히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모용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운현이 그린 것이라면 모를까, 다른 사람의 서화라면 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모용상아는 그렇지 않았다.

“봐도 돼요?”

“그래. 봐도 괜찮아.”

운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모용상아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작은 손으로 책상 위의 서화를 펼쳤다.

바스락.

우아하게 뻗어 나간 난초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멋있어요.”

모용상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이건 무슨 풀이에요?”

운현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건 난(蘭)이란다. 잎의 모양이 아름답고 향기가 은은해서 기품이 있고 고귀하게 여겨지는 꽃이지.”

“여기 아주 작은 달도 있는데요? 이것만 살짝 색이 칠해져 있어요.”

“아, 달은 보통…….”

“죄송합니다만 먼저 일어서야 할 것 같아서요.”

영호준이 웃으며 말했다.

“후원의 사정이 안 좋으니 차라리 항주 시내로 나가시는 것은 어떨까요? 서호 변은 풍광이 좋고 맛있는 가게도 많으니까요.”

그 말에 반응한 사람은 모용상아였다.

“와! 가고 싶어요!”

영호준은 모용상아에게 눈을 찡긋했다.

“우리 꼬마 아가씨가 간다면 맛있는 당과라도 사 줘야겠는데?”

그 말은 모용상아를 더욱 기대에 부풀게 했다.

모용상아는 운현과 모용미를 돌아보며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가도 돼요?”

운현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모용미를 돌아보며 말했다.

“괜찮겠습니까? 피곤하시면…….”

“괜찮아요. 저도 서호가 보고 싶네요.”

모용미도 웃으며 말하고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객옹도 함께였다.

사박, 사박.

영호준은 빙긋 웃으며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모두가 서재를 나가고 홀로 남은 영호준은 얼른 책상으로 갔다.

그리고 즉시 서화를 둘둘 말았다.

“후우, 우리 맹주님 정말…….”

영호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숨겨도 모자랄 판에 설명까지 해 주고 있다니, 영호준은 어이가 없었다.

아마도 운현 본인은 그저 평범한 서화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蘭)이 주로 속세에서 벗어난 기품과 고귀함을 상징한다는 것과, 달이 즐거움을 뜻한다는 것을 듣는다면 모용미는 무언가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영호준이 보기에 그녀는 의외로 감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서화를 그린 사람이 ‘소월’이라는 예기임을 안다면 더더욱 말이다.

“위험해. 위험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영호준은 얼른 서화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다.

이런 서화를 처음 받아 보았는지 운현은 서재에 걸자고까지 했지만 아무래도 그건 반대해야 할 것 같았다.

“총군사님. 안 가십니까?”

문득 운현이 밖에서 얼굴을 내밀고 말했다.

“지금 갑니다.”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내 사람을 건드리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귓가에 생생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영호준은 얼른 운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항주, 서호.

운현과 모용미는 서호의 호숫가를 걷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과 아름다운 호수의 경치는 항주의 정취를 한껏 전해 주었다.

“이곳은 참 오랜만이네요.”

찰싹이는 서호의 물결을 보며 모용미가 말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일렁였다.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그러시군요. 처음 오셨을 때가 언제지요?”

운현이 물었다.

모용미는 고개를 돌려 운현을 보았다.

“무림맹 용봉지회 때요. 운 학사님을 만난 것도 그때였지요.”

“아, 저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소저께서 보여 주신 검식은 참으로 아름다웠지요.”

“네?”

예기치 못한 칭찬에 모용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운현은 당황하며 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 그게 그전까지는 여협들의 무공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아, 그러셨군요.”

모용미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내심 아쉬움이 스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운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분명히 기억합니다. 부드러운 검식 속에서도 단호한 결의가 드러나는 검로였지요.”

용봉지회 기간 중, 새벽 수련을 위해 비무대로 간 운현은 파진한과 모용미를 만났다.

결국 수련은 못 했지만 운현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모용미의 검식을 볼 수 있었다.

“글을 보면 그의 사람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검로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소저의 검은 참으로 곧고 아름다웠습니다.”

사람은 속여도 칼은 감추지 못한다.

검로는 칼을 통해 드러나는 그의 인간성이자 인격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주저하면 그의 검로가 무디어지고, 탐욕으로 가득하면 그의 칼 또한 그러하다.

운현이 본 모용미의 검로는, 그녀의 아름다운 몸짓은 차치하고서라도 매사에 곧고 분명하며 주저함이 없었다.

“그, 그런가요?”

“네, 그렇습니다. 정말로요.”

운현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보았던 모용미의 아름답고 유연한 동작이 눈앞에 생생했다.

모용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뺨이 붉게 물들었지만 운현은 미처 보지 못했다.

사박, 사박.

모용미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그녀가 조용해지자 운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저?”

“아, 그러고 보니.”

깜짝 놀란 모용미는 얼른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후, 후원은 어쩌다 그렇게 된 건가요?”

“아, 그건 검성 어르신과 비무를 하는 바람에…….”

탁.

모용미가 발을 멈췄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운현에게 되물었다.

“검성 어르신이라고요?”

“아, 이건 모르시겠군요. 사실은…….”

운현은 영웅맹이 무너지던 때의 일을 모용미에게 말해 주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창룡맹 모든 문파에 전해졌지만, 검성이나 암천무제에 대한 것은 모용미도 처음 들었다.

모용미의 표정은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군요.”

“네. 검성께 대한 것은 일부러 밝히지 않았습니다. 어르신께서 원치 않으실 듯해서요.”

다른 사람이라면 알리지 못해 오히려 안달이었을 것이다.

자그마치 검의 하늘, 검성 이검학이 찾아와 함께 머물렀던 데다가 그와 비무를 하고도 패배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검성이 다시 찾아올 것이라니, 놀랄 부분이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어지러울 정도였다.

‘하긴 운 학사님이라면…….’

모용미는 헛웃음을 흘렸다.

정사대전 당시 죽음의 대명사였던 독선과도 멀쩡히 함께 다니는 사람이 바로 운현이다.

한때 운현은 검성의 후계자로 알려질 정도였으니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암천무제나 일대상인에 대해 전하지 않은 것은.”

운현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제가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건 근거 없는 막연한 느낌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운현이 본 일대상인은 무공만으로, 혹은 세력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결코 아니었다.

그와 대등한 경지에 오르지 않으면 그를 이해할 수도 없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예측하지 못한다.

마치 바둑에서 상대의 한 수가 어떤 의미이며 무슨 결과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온전히 제가 감당해야겠지요.”

그렇게 말한 운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쏴아아아.

바람이 불었다.

운현의 머리카락이 서호의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문득 모용미는 가슴이 조여 왔다.

이대로 그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머나먼 곳으로 말이다.

“운 학사님은…….”

“네?”

운현은 고개를 들어 모용미를 쳐다보았다.

순수하고 곧은 운현의 눈빛은 모용미가 처음 서호에서 그를 보았을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절대 혼자가 아니에요.”

운현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러니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려 하지 마세요. 제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모용미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꼭 그러쥔 손이 그녀의 심정을 말해 주는 듯했다.

“아닙니다.”

운현이 빙긋 웃었다.

“소저는 제게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아주 기쁩니다.”

말하는 운현은 환하게 웃고 잇었다.

모용미가 온 것은 창룡맹에 모용세가의 예물을 전하기 위해서다.

굳이 그녀가 직접 오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운현의 말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어쩐지 쓸쓸해 보여서 모용미의 가슴은 더욱 아파 왔다.

“저는…….”

그녀가 막 무어라 말하려 할 때였다.

“언니!”

탁탁탁탁.

운현과 모용미는 고개를 돌렸다.

모용상아가 한 손에 당과를 들고 뛰어오고 있었다.

“이거 봐! 할아버지가 사 주셨어!”

팍.

달려온 모용상아는 모용미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뒤에서 객옹과 영호준이 천천히 걸어왔다.

객옹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고, 영호준은 운현을 향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언니 것도 있어! 두 가지 맛인데 뭘 먹을 거야?”

모용상아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모용미를 올려다보았다.

모용미는 빙긋 웃으며 모용상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정말 좋겠구나.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는 했니?”

“응!”

고개를 끄덕이던 모용상아가 운현에게 당과를 내밀었다.

“운 오빠 것도 있어요! 아, 언니 고르고 난 다음에요.”

운현과 모용미가 웃었다.

찰싹이는 서호의 물결과 시원한 바람 속에, 다섯 사람은 그렇게 잠깐의 여유를 만끽했다.

***

사흘 후, 창룡맹 임시 총단 저택.

모용미와 모용상아는 오래 머물지 못했다.

외당 당주인 모용미가 바쁜 중에 어렵게 시간을 낸 것이어서, 두 사람은 사흘 만에 세가로 돌아가야 했다.

같이 왔던 세가의 호위무사들과 함께 모용상아와 모용미는 마차에 올랐다.

운현은 모용미에게 말했다.

“조심해서 가십시오.”

“네, 운 학사님.”

모용미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운현을 ‘운 학사’라 부르는 이는 많지 않다.

그만큼 소중하고 또 귀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오빠, 안녕! 할아버지도 안녕히 계세요!”

모용상아는 작은 손을 창밖으로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운현도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객옹은 그저 덤덤히 지켜볼 뿐이었지만 시선은 돌리지 않았다.

따각, 따각.

마차는 금방 멀어졌다.

모용상아가 열심히 손을 흔드는 모습도 점점 작아져서 마침내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사락.

운현은 손을 내렸다.

겨우 며칠 같이 있었을 뿐인데도 막상 두 사람이 떠나니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쓸쓸함에 잠길 시간은 없었다.

그날 저녁, 취선루의 소월에게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