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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검전 리마스터-395화 (395/530)
  • 395화.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

    운현이 창룡맹 맹주이자 창룡검주라는 말에 소월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황하던 그녀는 잠시 심호흡을 한 후에야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괜찮습니까?”

    운현이 물었다.

    소월은 운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조용하고 점잖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이 문사가 창룡검주라니,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허세나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손님은 종종 있었지만, 적어도 이들은 아니다.

    애초에 아무 이득이 없는데도 다른 예기를 도와준 사람들이니까.

    “……대단히 강하면서도 음률이 뛰어나신 분을 찾으신다니, 그래서 제 스승님들이 누구인지 여쭤 보셨군요.”

    평상심을 되찾은 소월이 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그분들이라면 혹시 알고 계실까 해서입니다.”

    “혹시 찾으시는 분이 연세가 많으신가요?”

    “……그게, 잘 모릅니다.”

    운현은 어색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분에 대해 아는 것은 소(簫)를 매우 잘하시고, 천하에 비견할 자가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 뿐입니다. 아, 부유하시다는 것도 있군요.”

    “매우 잘하는 정도가 아니다.”

    객옹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의 음률은 나를 소름 돋게 할 정도였다. 음률로도, 그 기세로도 말이다.”

    그 말은 운현은 새삼 일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운현은 소월이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음을 알아차렸다.

    “……혹시 짐작 가는 분이 있습니까?”

    살짝 기대를 품었지만 소월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는 그런 분을 몰라요. 어쩌면 스승님들은 아실지도 모르지만, 쉽사리 알려 주실 것 같지는 않군요. 그런 분이시라면 저라도 입을 다물 테니까요.”

    그런 사람이 아직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스스로 감추려고 함을 의미한다.

    생각이 있는 자라면 절대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소월 자신만 해도 창룡검주를 만난 사실을 함부로 떠들어 댈 생각은 없었다.

    혹여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월주님이시라면 혹시…….”

    “월주님요?”

    갑작스레 언급된 새로운 인물에 운현이 되물었다.

    흔하지 않은 명칭이라 직책인지 명호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월주님이 누구시지요?”

    하지만 소월은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들고 운현에게 말했다.

    “시간을 주시겠어요? 월주님께 연락을 드려서 어떻게 할지 여쭤 보도록 하겠어요.”

    운현은 슬쩍 영호준을 바라보았다.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월이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운현은 소월에게 말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 될 문제 같아서요.”

    “아닙니다. 그만큼 진지하게 생각해 주신다는 뜻이니까요.”

    운현의 말에 소월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창룡맹의 맹주가 예기인 자신에게 이렇듯 정중하게 말하는 것은, 설령 도움을 받기 위한 겉치레라 할지라도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대부분은 예기를 무례히 대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심가장 자제처럼 아예 창기 취급이나 안 하면 다행이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찻잔을 두 손으로 꼭 쥐며 소월이 말했다.

    운현은 부드럽게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서화를 하신다고 하셨던가요?”

    “네. 그리 대단치는 않지만…….”

    “괜찮으면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서화에 관심이 아주 많아서요.”

    말하는 운현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예인들 중에는 서화로 이름을 날리는 경우도 있어서 운현이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여인이 서화를 하는 모습은 아직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소월은 웃으며 말했다.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되네요. 그래도 대인의 말씀이시니 한번 붓을 들어 보도록 하겠어요.”

    그녀의 웃는 모습에 영호준은 속으로 감탄했다.

    예기답지 않은 기품이 느껴지는 소월이 미소까지 지으니 그 미모가 더욱 생기를 발하는 듯했다.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칠현금이 아니라 아름다움만으로도 항주에 비견할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럼 잠시 만요.”

    소월은 일어나서 밖에 있는 시녀를 불렀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지필묵이 준비되고, 방 안에는 곧 묵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사락.

    소월은 종이 앞에 앉아서 붓을 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한 송이의 단아한 꽃 같았다.

    슥, 스륵.

    붓이 흐르고 하얀 종이 위에 난(蘭)이 피었다.

    은은히 흐르는 차향과 묵향 속에, 항주 취선루의 밤은 천천히 깊어 가고 있었다.

    ***

    며칠 후, 항주 외곽 창룡맹 임시 총단.

    운현은 서재에서 영호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강의 수군 훈련은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합니다.”

    영호준이 운현에게 말했다.

    “새로운 시도라고 수군 내에서도 기대가 큰 데다가, 이미 예산까지 정해져서 안 하면 도리어 곤란해질 정도랍니다.”

    “그렇군요. 수군도독께서는 괜찮으신가요?”

    “아주 괜찮습니다.”

    헛웃음을 흘리며 영호준은 말했다.

    “오히려 이번 일로 조정 내 영향력이 커졌다고 좋아하더군요.”

    “아령이는?”

    탁자에 앉아 있던 객옹이 문득 물었다.

    아령은 수군도독 진림의 어린 딸이자, 객옹이 치료해 준 아이다.

    “아주 건강합니다. 어르신.”

    영호준이 공손하게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아령이가 어르신을 뵙고 싶어 한다고, 부디 꼭 한번 방문해 달라더군요. 아령이가 키도 많이 컸다는데요?”

    “음.”

    객옹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현은 조만간 객옹과 함께 수군도독 진림의 저택에 찾아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수군 훈련이 예정대로 시작되면 가장 초조해 할 곳은 사실 공손세가입니다.”

    영호준이 말했다.

    “지금은 태평맹에 속해서 강남 공략을 하고 있지만, 장강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싶어서 안달이니까요. 사실 강남과 장강은 비교가 안 되거든요.”

    강남의 산물이 풍부하다지만 장강은 대륙 남부의 물자들이 움직이는 혈맥과 같은 곳이다.

    공손세가가 영웅맹에 장강을 잃고 가세가 휘청할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장강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싶어 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게 놔둘 남궁세가가 아니지요. 게다가 우리 창룡맹까지 있으니, 제아무리 공손세가라도 힘들걸요? 하하하.”

    영웅맹이 무너졌다고 모든 것이 저절로 과거처럼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과거 공손세가에 보호를 청하던 상단들은 이제 누가 장강의 주인이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 결과 공손세가는, 인접한 일부 지류를 제외하고는 예전 같은 영향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수군 훈련이 시작되면 더 움직이기 힘들지요. 남궁세가의 영향력은 계속 커져 갈 거고요. 그 거만한 공손세가가 어떻게 나올지, 한번 두고 볼까요?”

    사뭇 기대가 되는지 영호준은 싱글싱글 웃었다.

    운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당문과 태평맹은 어떻습니까?”

    “여전히 강남의 사파들을 공략 중입니다. 확장되는 영역만 보면 파죽지세지만, 얼마나 실속이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문파들 간에 어떻게 영역을 나눌지도 문제고요.”

    태평맹은 명분이 아니라 이익을 위해 모인 집단이다.

    사실 어느 집단이건 그렇지 않으랴마는 태평맹은 그 정도가 매우 심했다.

    그러므로 태평맹 문파들 간의 강남 분할은 어쩌면 가장 큰 위험 요소라 할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심가장에 대해서도 조사했습니다. 진예림 부총군사가 이곳 출신이라 사정을 잘 알고 있더군요.”

    사락.

    얇은 서류 한 장을 내려놓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생각보다 나쁜 놈들이었습니다.”

    서류에는 심가장이 영웅맹의 위세를 등에 업고 한 악행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대강 큰 일들만 적은 것인데도 서류 한 장을 빽빽하게 채울 정도였다.

    “안찰사에 연락해서 오늘 새벽에 심가장의 장주를 옥에 처넣었습니다. 며칠 쯤 옥고를 겪고 나면 세 살 때 한 짓도 기억날 겁니다. 이 기회에 철전 한 푼 안 남도록 탈탈 털어 버리죠.”

    운현은 서류를 내려다보며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영웅맹이 무너졌어도 그들의 악업은 아직도 남아 있다.

    어쩌면 이것들이야말로 영웅맹이 남긴 가장 큰 폐해인지도 모른다.

    “반드시 그렇게 해 주십시오.”

    굳은 얼굴로 운현은 말했다.

    “영웅맹에 빌붙었던 자들은, 적어도 이곳 항주에는 절대 발을 디딜 수 없도록 말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영호준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운현의 뜻을 받들었다.

    “취선루에서 연락은 없습니까?”

    운현이 물었다.

    소월은 월주에게 답장을 받는 즉시 운현에게 연락하기로 했다.

    “아직 없습니다. 아, 그리고 관에 소속된 악사들의 명단을 조관 어사에게 요청했고, 유명한 예인들에 대한 조사도 시작했습니다.”

    소월이 말한 ‘월주’가 일은을 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운현은 이전에 영호준과 논의한 대로, 관에 소속된 악사와 명성이 높은 예인 들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허나 쉽지 않습니다. 남궁세가에도 협조를 요청했지만 예인들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을 겁니다.”

    창룡맹은 각 문파의 지부를 통해 첩보를 공유한다.

    하지만 예인들에 대한 것까지 파악하고 있을 리는 없었다.

    차라리 다른 문파나 상단에 대한 것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그렇군요. 어쨌든 수고해 주십시오.”

    “네. 그리고 말이 났으니 드리는 말이지만 다들 맹주님의 방문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저요?”

    운현이 의아한 눈빛으로 영호준을 쳐다보았다.

    영호준은 빙긋 웃었다.

    “창룡맹 맹주이신 데다 천하제일의 고수시잖습니까?”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취선루에서 소월이 한 말이었다.

    “저는…….”

    “물론 농담입니다.”

    영호준이 얼른 말했다.

    “하지만 아주 농담만은 아닙니다. 맹주님께서 방문하시는 것만으로도 문파들에는 큰 힘이 될 겁니다.”

    어깨를 으쓱하고 영호준은 말을 이었다.

    “아니면 아예 신비주의 노선으로 가시는 것도 나쁘진 않겠군요.”

    “그건 싫습니다.”

    운현은 고개를 저었다.

    와룡헌에서 신승이 어떻게 지냈는지 아는 운현으로선 그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은 쉽지 않겠군요. 어차피 총군사께서 함께 가셔야 할 텐데 지금은 총단 건설에 정신이 없지 않습니까?”

    실무는 영호준이 담당한다.

    운현이 문파들을 방문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영호준이 반드시 동행해야 했다.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문파들을 방문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지요.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탁.

    서류를 덮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운현은 한숨을 쉬었다.

    “해야 할 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군요.”

    “창룡맹은 이제 시작이니까요.”

    영호준의 표정은 담담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수고를 하는지 알고 있는 운현은 담담할 수 없었다.

    “미안합니다. 총군사께 너무 많은 짐을 지게 해서요.”

    “힘든 건 사실이지만 재미있으니 괜찮습니다.”

    씨익 웃으며 영호준은 말을 이었다.

    “남 고생시키는 것도 은근히 괜찮더군요. 어려움은 나누면 반이 된다더니, 정말 그런가 봅니다.”

    운현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영호준 탓에 진예림이나 담소하가 투덜거리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나중에 함께 식사라도 해야겠다고 운현이 생각하던 때였다.

    저벅.

    “맹주님.”

    저택을 관리하는 총관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운현은 의아했다.

    총관이 손님을 서재로 모시고 온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 제가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영호준이 웃으며 말했다.

    “분명 기뻐하실 것 같아서요.”

    달칵.

    그사이, 서재의 문이 열렸다.

    “아!”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건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단아한 미모의 젊은 여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운 학사님.”

    모용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운현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모, 모용 소저…….”

    “운 오빠!”

    낭랑한 목소리가 운현의 시선을 끌었다.

    운현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작고 귀여운 아이를 발견했다.

    탁탁탁.

    운현은 급히 몸을 낮췄다.

    팍.

    “오빠! 잘 지냈어요?”

    모용상아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운현은 자신도 모르게 빙긋 미소를 지었다.

    ‘벗이 있어 멀리서 찾아오면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는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선현의 말씀이 가슴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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