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천하제일은 아닙니다
취선루의 소란은 금방 정리되었다.
운현과 객옹, 영호준은 연홍의 안내에 따라 취선루 삼 층의 한 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세련된 장식으로 꾸며진 전망이 아주 좋은 방이었다.
본래 취선루가 사방이 트인 형태의 건물이어서, 넓은 창밖으로 항주의 번화가와 서호의 야경이 내려다보였다.
향기로운 미주와 식욕을 자극하는 요리 몇 가지가 상 위에 차려지고, 곧 두 사람의 예기와 한 사람의 남자 악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악기를 든 시녀들도 함께였다.
그중에 한 젊은 예기가 운현 일행에게 다소곳이 예를 표했다.
사락.
“소월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긴 속눈썹과 단아한 인상이 사뭇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옷차림은 예기답게 화사했지만 그리 과하지 않아서 오히려 정갈한 느낌을 줄 정도였다.
“오, 자네가 소월인가?”
영호준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도 소월은 처음 보는 듯했다.
“아주 유명하더군. 이곳 취선루에 오자마자 자네 이름을 들었을 정도라네. 하하하.”
그 말에 운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듣긴 했다. 심가장의 자제가 난리를 치며 찾은 사람이 바로 소월이었으니까.
“제 탓으로 애매히 봉변을 당한 이들을 도와주셨다 들었습니다.”
소월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흔한 미소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모습에선 고고한 기품마저 느껴졌다.
다른 기녀들이나 예기와는 분위기부터가 아주 달라서, 왜 심가장 자제가 그토록 난리를 쳤는지 이해가 갈 정도였다.
“감사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라네.”
영호준이 빙긋 웃었다.
“바로 이분이시지.”
소월이 시선을 돌려 운현을 보았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월은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운현은 그녀의 분위기가 어쩐지 대궁주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닙니다. 소저를 위해 한 것이 아니니 감사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허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고개를 들고 소월이 말했다.
“때로는 그 작은 도움이, 누군가의 목숨을 구하기도 하니까요.”
운현은 할 말이 없었다.
의형 일충현과 의제 독고랑, 신승 불영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메어 오는 이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운현은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말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운현 자신이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운현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헌데 자네는 무엇을 잘하는가?”
영호준이 물었다.
소월은 조용히 답했다.
“금(琴)과 시에 능하고 서화를 조금 합니다.”
“능하다면 어느 정도지? 이곳 취선루에서 손꼽을 정도인가?”
“항주에선 저와 비견할 자가 없습니다.”
“오, 자신만만하군.”
영호준은 감탄하듯 말했다.
예기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실 음악이란 주관적 판단이 많이 개입되기에 우열을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이 최고라고 단언하는 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허나 자네가 항주 모든 예인들의 음을 들어 본 것도 아닐 텐데? 그렇지 않나?”
영호준의 말은 사뭇 시비조였다.
예인의 자존심인지, 혹은 젊은 나이의 혈기인지 소월의 눈빛도 달라졌다.
“그건 제 스승님들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표정은 살짝 굳어 있었다.
하지만 영호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스승님들께서 그렇다 하셨으면 당연히 그런 것이겠지.”
빙긋 웃음을 지으며 영호준이 말했다.
“그럼 그 대단한 솜씨를 좀 볼 수 있겠나?”
살짝 기분이 상했지만 그녀 역시 예인이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며 소월은 대답했다.
“……네, 그리하지요.”
소월은 고개를 돌려 악기를 들고 온 시녀들에게 눈짓을 했다.
시녀들은 곧 연주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준비라고 해 봐야 악기 받침대를 놓는 것이 끝이었다.
이곳엔 이미 연주를 위한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락.
시녀들이 가져온 악기는 칠현금과 슬(瑟) 그리고 소(簫)였다.
슬은 칠현금과 비슷한 형태의 현악기지만 현이 더 많고 음색이 칠현금과 잘 어울려서 ‘금슬’이라는 단어가 있을 정도로 자주 연주되는 악기였다.
문사 차림의 남자 악사가 소를 들고 또 다른 예기가 슬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소월이 가장 앞쪽의 칠현금 앞에 앉았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소월은 칠현금 위로 손을 뻗었다.
사락.
살짝 고개를 숙이고 지긋이 눈을 감은 그녀의 모습은 사뭇 고고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곧 연주가 시작되었다.
따랑―.
칠현금과 슬의 음색이 함께 어우러지며 흐르고, 소의 음색이 그 위에 음률을 더했다.
운현은 소월과 두 사람의 연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음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저들의 연주가 훌륭하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따뜻한 찻잔을 감싸 쥔 채 운현은 그들의 연주를 음미했다.
객옹은 물론 영호준도 말없이 음률에 귀를 기울였다.
금과 슬, 소의 음률은 방 안을 가득 채우며 흘러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항주의 야경과 서호의 밤 풍경은 그들의 연주에 더욱 흥취를 더했다.
마치 가을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따라라랑.
작은 음과 함께 연주가 끝났다.
그들의 합주는 생각보다 제법 길었다.
“하아.”
소월은 깊은 숨을 내쉬며 천천히 손을 거뒀다.
연주에 온전히 몰입해 있던 그녀의 이마에는 살짝 땀이 배어 있었다.
사락.
소월은 영호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떠셨는지요?”
“대단히 훌륭했소.”
영호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 스승님들께서 항주에서 비견할 자가 없다고 하실 만하오.”
말하는 영호준의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소월의 입가에도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보며 운현은 내심 감탄했다.
영호준의 화술, 특히 소위 말하는 밀고 당기기는 보통이 아니었다.
과연 항주에서 풍류 공자로 이름을 날릴 만했다.
“좋은 연주였습니다.”
운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훌륭한 연주에는 제대로 감평을 하는 것이 선비의 예다.
“음률이 청명하고 아주 아름다웠습니다. 조금은 애잔하고 쓸쓸해서, 마치 가을바람이 부는 듯하더군요.”
소월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운현은 몰랐지만 그건 소월이 표현하고자 한 느낌 그대로였다.
“이 곡을 알고 계셨나요?”
“아니, 처음 듣습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운현이 말했다.
음악에 대해 조예가 없는 건 선비로서는 그리 자랑이 못 된다.
“그러셨군요.”
소월은 운현을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녀가 전하고자 했던 바로 그 느낌을, 운현은 한마디 설명도 없이 알아차린 것이다.
“감사합니다.”
소월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운현은 객옹을 쳐다보았다.
“어르신께서는 어떠셨습니까?”
“좋군.”
객옹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나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르다.”
운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소월이 일은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운현은 소월에게 고개를 돌렸다.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아, 다른 뜻은 아니고…….”
“네, 괜찮아요.”
운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월이 말했다.
소월은 다른 예기와 악사에게 눈짓을 했다.
그들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운현 일행에게 예를 표하고 밖으로 나갔다.
슬은 시녀들이 다시 정리해서 가지고 나갔지만 칠현금만은 남겨 두었다.
사락.
소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로 오시지요.”
운현은 자리를 권했다.
소월이 운현 앞에 다가와 다소곳이 앉았다.
그런 소월을 바라보던 운현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영호준이 운현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크흠.”
헛기침을 하며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운현이 소월을 계속 쳐다보고 있으니 무언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뭐라고 해도 결국 변명이 되어 버릴 터라, 운현은 대신 소월에게 말했다.
“차를 드릴까요?”
풍류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술 한 잔을 권하겠지만 운현은 그럴 의도가 없었다.
소월은 운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운현은 찻주전자를 들어 새 잔을 채운 후 소월 가까이에 놓았다.
소월은 손을 뻗어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그녀는 상 위에 놓인 고급스러운 술병을 바라보았다.
향기로운 미주가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술이 더 낫습니까?”
운현이 물었다.
“아니요. 차가 좋아요.”
그렇게 대답한 소월은 두 손으로 찻잔을 쥐고 차를 음미했다.
달칵.
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운현을 향해 말했다.
“하실 말씀이 무엇인가요?”
운현은 빙긋 웃었다.
“아주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혹시 특별히 사사한 분이 계십니까?”
사사한 사람이란 곧 스승으로 삼은 사람을 말한다.
소월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그녀는 본래 손님과 따로 자리를 가지지 않았다.
지난번 심가장의 자제에게 봉변을 당할 뻔한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잠시 이야기하자는 운현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은 그가 동료 예기를 도와주었기 때문이고, 무례한 짓을 하지 않으리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예상외였다.
표정으로 보아 그저 지나가듯 묻는 것도 아니었다.
“왜 그것이 궁금하신지 여쭤 봐도 될까요?”
소월이 조용히 되물었다.
운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찾아야 하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찾아야 하는 분요?”
“네. 사실은 그분의 명호도, 얼굴도, 어디에 계신지도 모르지만요.”
소월은 의아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찾으신다는 것이지요?”
“그분이 소를 부셨는데 그 음률이 대단히 뛰어났다고 하시더군요. 이 어르신께서 감탄하실 정도로요.”
객옹을 돌아보며 운현이 말했다.
소월은 객옹을 쳐다보았다.
아까 객옹이 ‘다르다’고 한 말의 의미를 그녀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운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주 강한 분입니다. 무공으로는 감히 누구도 그분을 위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월은 잠시 당황했다.
기예가 뛰어난 예인을 찾나 했더니 갑자기 누구도 위협 못 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라니 말이다.
“그런 분이라면 잘못 찾아오신 듯하군요.”
소월이 조용히 말했다.
“이곳 취선루가 아니라 창룡맹으로 가세요. 아직은 총단을 짓고 있는 중이지만 그곳에 천하제일의 고수께서 계신다고 하니까요.”
“아, 그게…….”
운현이 어색하게 웃으며 무언가 말하려 할 때였다.
“천하제일의 고수가 누구라던가?”
영호준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소월은 의아했지만 순순히 답했다.
“그야 창룡검주시지요.”
영호준을 바라보며 소월은 말을 이었다.
“창룡맹의 맹주이신 데다 홀로 영웅맹을 무너뜨리신 분이라 천하에 그 적수가 없다 하더군요.”
강호 무림에 대해 잘 모르는 소월마저 그 소문은 알고 있었다.
순식간에 중원을 장악한 일대 정파맹이자, 장강을 제 세상처럼 활보하던 영웅맹을 무너뜨린 창룡맹에 대해 듣지 못한 이가 누가 있을까?
게다가 이곳 항주에 창룡맹 총단이 들어서고 있었으니, 근래에는 창룡맹을 화제로 삼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크흠.”
운현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영호준은 빙긋 웃으며 소월에게 말했다.
“오, 그래? 아주 대단하신 분이군. 하지만 창룡맹으로 가도 우리가 찾는 분은 없을 걸세.”
슥.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며 영호준이 말을 이었다.
“이분이 바로 그 창룡검주시거든. 우리 맹주님이시기도 하고.”
“네?”
소월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창룡맹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창룡검주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창룡검주에 대한 소문은 이전부터 장강에 무성했지만 그가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적은 태평맹 용봉지회뿐이었다.
게다가 창룡맹이 워낙 단기간에 급부상했기에 맹주가 모습을 드러낼 만한 행사나 자리도 없었다.
그 결과 의도치 않게 창룡검주는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신비인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소월은 고개를 돌려 운현을 바라보았다.
쑥스러워하는 눈앞의 젊은 문사와 강호 무림의 신비 고수, 창룡검주는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소월이 멍하니 운현을 쳐다본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천하제일은 아닙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운현은 말했다.
“하지만 맹주는 맞습니다.”
소월은 그제야 경악했다.
조용하고 점잖은 이 문사가 바로 그 창룡맹의 맹주라니!
놀라움으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소월을 영호준이 싱글벙글하며 바라보고 있었다.